이 글은 1월 14일 게재한 '중산충 복음주의로서의 진보적 복음주의'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편집자 주
1. 진보적 복음주의 지성의 현실

언젠가 진보적 복음주의의 대표 저자 중 하나인 한 구약학자의 출간 기념 북 토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명문대를 나와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오랜 기간 국내 교수로 활동했다. 당시 나는 '복음주의 지성'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저자에게 큰 기대를 갖고 북 토크에 참가했다. 모세오경을 다룬 책을 소개하며 저자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주장했다. 한 참가자가 모세 저작설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자기 주장을 학술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 예언서를 전공했으니 설령 잘 모를 수도 있다손치더라도 그의 답변은 질문의 본의에서 한참 벗어났다. 차라리 '지적 정직함'을 선택해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의 강연과 책은 구약학 자체에 관한 내용보다는, '하나님나라신학', '대안적 세계 질서' 등으로 포장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또 한번은 진보적 복음주의 대표 저자·학자인 어느 목사가 해외 저자의 책에 붙인 해설을 봤다. 해설을 쓴 목사는 저자가 해명하고자 목표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는 비판을 가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마따나 한계를 극복했다면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이 극복될 수 있었다고 썼다. 저자의 글은 전혀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해설자 목사의 비평은 전혀 학술적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소개한 문구 맨 앞에는 영국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다. 진보적 복음주의 내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진보적 복음주의 스피커의 이야기에 항상 의아함을 갖고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는데, 진보적 복음주의에 속한 신학자·목회자들은 하나같이,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사회학을 전공한 교수보다도 더 많은 해답(발언이 아니라)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진리를 말하는 듯한 완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2. 진보적 복음주의에 지성은 존재하는가

나는 앞선 글에서 진보적 복음주의가 지성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진보적 복음주의는 지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지성에 애정을 가진 것'과 '지성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앞선 두 학자와 목회자 모두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지성인'으로 호명되는 사람이지만 이들은 전혀 지성적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진보적 복음주의 지성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마크 A. 놀의 말을 빌려 비틀어 말한다면 "복음주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보적 복음주의의 스캔들"1)이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태생부터 대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그 이후 교수·학자가 이 종교 집단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지성을 숭앙하는 진보적 복음주의 특유의 전통이 자리 잡았다. 진보적 복음주의에 소속된 대표 인물, 저자 대부분은 학자이거나 학위를 소지한 활동가다. 그렇다면 이들의 활동은 학술 활동인가. 나는 그렇지 않거나, 성실한 일부 학자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본디 학술 활동이라면, 학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식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신학 영역에서의 학술 활동 예로는 이른바 '바울에 관한 새 관점'(NPP,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흐름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학자와 그들의 학술적 생산물을 떠올릴 수 있다. NPP 연구자들은 기존 신학이 지닌 바울 해석을 새롭게 갱신했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비교적 최근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 NPP 연구도 마찬가지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학술 작업이다. 학술 활동은 새로운 인식·지식 생산에 전문적으로 기여하는 일이다. 이것이 '학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진보적 복음주의의 대표 저자·학자들은 그런 지식 생산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이 활동하는 장(field)이 '학문의 장'이라기보다는 '종교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학계에서 새로운 전문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종교 영역에서 근본주의를 해체하거나, 사회참여를 추동하고 보수·극우주의 정치를 비판하는 일이다. 서두에 언급한 예시뿐 아니라, 진보적 복음주의 흐름에 있는 저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회운동 혹은 종교적 실천의 목적을 지녔을 뿐, 전문 지식과 학술적 생산을 염두에 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신학계가 가진 고질적 문제일 수도 있다. 교단에 종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학술 활동과 작업물 생산이 어렵다는 점, 다시 말해 학문의 장이 종교의 장에 식민화됐다는 점과 신학자는 대부분 목사라는 직업을 겸직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에서 아카데미 운동, 설교, 학술 발표 등이 가장 혼재된 종교 집단은 진보적 복음주의일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학자 타이틀로 설교하고, 아카데미에서 활동한다. 문제는 이들의 관심사가 고유한 신학적 학술 작품 생산보다는 사회 실천에 있기 때문에, 전문 영역을 빈번하게 넘어서곤 한다는 점이다. 신학보다는 경제·정치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논하고, 이를 통해 특정 성향의 정치적 행동을 자극·촉발하는 일이 학자로서의 학술 활동보다 빈번할 것이다.

3. 진보적 복음주의의 '분식집형 지식인'

이런 문제는 한국 신학계 구조나 목사라는 직업적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적 복음주의 내부 학자들의 자의식 자체가 1980년대 계몽적 지식인, 즉 구시대적 마르크스주의의 '총체적 지식인'상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이들은 '지식인이라면 사회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에게 불(fire)이라는 계몽을 선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까닭에 진보적 복음주의 스피커들은 그들의 전문 영역을 넘어서는 발언을 매우 빈번하고도 자연스럽게 한다. 당장 소셜미디어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들은 각종 사회 현안에 대답하면서 특별히 현재 집권 중인 민주당, 문재인 정권을 적극 옹호한다.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한 진보적 복음주의 출판사 대표는 언젠가 국제정치에 관해 논하면서, 국가 사이에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 '깡패' 같은 질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국제질서를 힘의 논리로 파악하는 것은 국제정치학계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받은 현실주의(realism) 주류 이론이다. 그 출판사 대표는 국제정치를 읽는 아주 기초적인 리터러시도 없이 부정확한 정보에 의한 편향을 넓혀 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소셜미디어상에서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진보적 복음주의 대중의 무수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근본주의 개신교발 가짜 뉴스 현상과 다를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또 진보적 복음주의는 항상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지만, 정작 이들이 경제지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제대로 된 경제지표를 읽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이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신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잡성이 점증을 넘어 폭증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없다. 사회과학 내부에서도 이미 전문화가 많이 진행됐기 때문에, 같은 분과 내에서도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직업윤리다. 심지어는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도 확연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지금 시대의 현실이며, 이를 인정하는 것이 지적으로도 정직하다.

나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문성이 없다면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참된 진리를 인식하고 있는 지식인' 따위는 환상이라는 게 일찍이 밝혀졌지만, 진보적 복음주의에서는 아직도 본인이 마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가진 듯, 엄청난 전문성을 가진 듯 착각하고 행세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보통 전문가는 자신이 전공한 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생산한다. 하지만 진보적 복음주의 지식인은 대중주의와 영합해 정치·경제 등 모든 사회 이슈에 해답을 내놓으려 하고, 심지어는 그것만이 정답인 것처럼 말한다. 나는 이러한 진보적 복음주의 지식인을 '분식집형 지식인'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어떤 요리사가 한 음식에 일생을 걸고 연구해 그 음식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릴 때, 우리는 그를 장인匠人이라고 부른다. 진보적 복음주의 지식인을 요리사에 비유하면, 장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연구하기보다는, 당장 대중·정치권·사회의 취향에 맞춰 즉석조리한 육개장도 팔고, 김밥도 팔고, 떡라면도 팔고, 돈가스도 파는 분식집형 지식인이다. 나는 분식집을 폄하할 의도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각자 다른 역할이 있는 것이다. 분식집은 분식집대로, 특정 음식 전문점은 전문점대로 고유의 가치와 미덕이 존재한다. 문제는 즉석조리 식품을 마치 장인의 음식인 것처럼 속여 파는 데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의 지식인은 신학 연구를 통해 전인미답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한다기보다는 언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언제는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또 언제는 정치적 보수·극우주의를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다. 이는 분식집형 지식인의 전범典範이다. 심지어 자신들이 분식집형 지식인이라는 자의식도, 지적 성실함과 정직성도 없다. 되레 모든 음식의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진보적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다.

4. 지금 필요한 것은 영역별 분화·전문화다

이러한 현상에는 진보적 복음주의 내에 제대로 된 역할 구분이 없다는 점이 큰 한계로 작용한다. '복음주의'라는 종교운동과 '신학'이라는 학술·지식 생산은 구분돼야 한다. 지금 진보적 복음주의에는 학자라기도 애매하고 종교인이라기도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많다. 학자들은 학자 행세하지만 사실 이렇다 할 학술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들이 생산해 내는 저술 대부분은 사회운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마저도 기존 영미 복음주의를 포함한 서구 학자들의 성과를 그대로 수입해 소개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종교인, 즉 목회자가 있느냐. 이 역시도 내세울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애매한 상황은 진보적 복음주의가 가진 한계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는 이전과 다르게 각 영역을 전문화하는 것이 이 종교운동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복음주의 계열에서 지성의 빈곤 현상은 고질적 문제였다. 복음주의 내지는 기독교 세계관 1세대에 가까운 인물 중에, 신학자가 아닌 비신학 계열 학자 중에서도 제대로 된 학술 업적을 인정받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들 역시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생산하기보다 종교 실천이나 사회 비평을 위한 글을 주로 썼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초학력 자체가 절대적으로 낮았던 시절, '해외 박사' 타이틀은 그들을 삼라만상에 답할 수 있는 총체적 지식인으로 만들어 줬다. 학계에 쉽게 진입해 쉽게 자리 잡고 학술 활동보다는 종교 에세이나 사회 비평에 주력하면서도 오랜 기간 학계 권력으로 자리했던 그들을 '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경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진보적 복음주의가 고유의 신학적인 학술 작업을 생산해 내지 못하거나 이 흐름을 대표할 수 있는 종교인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진보적 복음주의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분식집형 지식인을 탈피해야 하고 고유의 영역을 창출해야 한다. 학자·지식인은 새로운 학술 갱신에 힘쓰고, 목회자는 이를 대중의 언어로 쉽게 풀어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아마추어 정치 평론, 사회 비평이나 하면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는 열광적 지지자에 기대 스스로 '지성'이라 착각한다면,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는 제외되고 시간이 지나 진보적 복음주의는 정치 얘기 좋아하는 아저씨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두크나이트 /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진보적 복음주의로 이적했다가 3년 전 결국 비신자가 됐다. 대학에서 사회학과 정치외교학을 공부했고, 종교 바깥에서 한국 개신교를 관찰하고 있다.

1)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Ivp,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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