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복과 관련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부와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파괴하는 매우 커다란 재앙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 속에서 열외에 서야 하고, 어디가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습니다. 가난한 자는 병들고, 외롭고, 팔려 다니고, 미움 받습니다. 이웃과 동기들조차도 싫어합니다.(잠 14:20, 19:7)

더욱이 가난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가난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인식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음에도 교회 안팎에 매우 깊이 뿌리 내리고 있어 가난한 자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확보되지 않으면 행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절대 가난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갈등의 뿌리를 캐 들어가 보십시오. 그 속에 무엇이 가로 놓여 있습니까? 결국은 소유의 문제, 부와 가난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영원히 지속될 지상 최대의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바울은 몸을 괴롭히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바울은 몸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질병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은 후부터 몸에 가시가 있는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바울의 이 경험을 들으면서, 특히 주님이 응답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와 가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우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보기에 몸의 가시는 반드시 뽑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기에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가시로 바울을 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치 않았지만 바울을 위해서는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뿐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억울하고 뽑아버려야 할 것 같지만, 주님이 보기에는 그 상황이 그에게 최선이고, 가장 적합한 것이기에 허락한 것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원치 않는 상황,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부와 가난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

부와 가난의 문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매우 쉽게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고, 하나님은 그 정의를 위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 없이 균등하게 소유하는 것이 불평등을 극복한 이상적인 사회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꼭 그럴까요? 가난한 자는 없어져야 할 인간사회의 수치요 걸림돌일까요? 가난한 자야말로 인간 사회를 위해, 또 인간을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닐까요. 개인적으로야 무척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공산주의는 소유의 균등분배를 통해 부자나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혁명을 통해 그런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적 방식은 일차적인 지혜에 불과합니다. 매우 평면적인 해결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평면적이거나 일차원적이지 않습니다. 신비롭고 다차원적이며 입체적입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만,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섭리하시며, 부자와 가난한 자를 통해서 부와 가난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런 방식이 비록 사람의 계산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부자들만 사는 사회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회가 과연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회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나눔이 있고 눈물이 있는 사회일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성경은 부자들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1-5)

에스겔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였으니."(겔 28:4-5) 그렇습니다. 품꾼에게 주어야 할 삯을 낚아채고,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쌓기에 바쁘고, 많은 재물로 인해 마음이 거만해져 하나님 같이 되어버린 자들이 가득한 사회, 그 사회가 과연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향기를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품는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커다란 감동과 훈훈함이 온 사회를 뒤덮지 않을까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껴안는 모습 속에서 진한 기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이런 사회가 부자들로 가득한 사회나 부의 균등분배로 성취한 평등사회보다 인간과 인간사회를 위해 훨씬 유익한 사회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사회보다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존하는 사회가 하나님의 지혜에 걸맞은 사회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부자를 만드시고, 부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영적 황폐함을 방지하기 위해 가난한 자를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책임지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시고, 또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가난함을 잃지 않기 바라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난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없음을 아시고 가난한 자를 우리 옆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아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너무 잔인한 방식이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역겨운 방식인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을 아시는 그분께서 선택한 길이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두신 뜻은

물론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부자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들은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옆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합니다. 부자들만의 동네를 만들어 가난한 자들을 따돌리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매개로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직면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물음에 책임 있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창고를 여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에 부자는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자들을 없애려 합니다. 아담이 타락 후에 하나님의 물음에 회피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또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25:45)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했느냐 다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을 다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음을 제기하기 위해 가난한 자를 우리 곁에 두셨습니다.

<제8요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유명 강사로 성공했지만 차갑고 계산적이고 정확하고 일만 아는 남편과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떠난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리가, 다운증훈군을 갖고 있는 조지를 만나 잃어버린 가정의 평화를 회복한다는 것이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장애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끝없이 거절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골칫거리로 내동댕이침을 당해야 하는 조지, 그래서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조지가 역설적으로 아리의 구원자가 되어 그의 뒤틀린 삶과 깨어진 가정의 평화를 회복시켜주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날과 연계해 전개됩니다. 신은 첫째 날 태양을 만들었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쉬기 위해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빠진 것이 없나 생각한 뒤 여덟째 날에는 조지를 만들고, 보기에 참 좋았다는 자막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나는 마지막 자막을 보면서 자꼬 반 도마엘 감독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은 사회의 천덕꾸러기나 삶의 훼방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최후의 작품이고, 장애인이 없는 사회보다는 장애인이 있는 사회가 더 완전한 사회일 수 있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역설적 메시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헨리 나웬 신부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헨리 나웬은 하버드대학교 교수 자리를 내놓고 장 바니에가 설립한 라르쉬(새벽공동체)에 들어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장애인을 돌보는 책임을 맡습니다. 난생 처음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은 헨리는 아담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난감하고 힘들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 형세가 역전되어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담이 헨리의 선생이 되며, 삶의 광야를 헤매며 혼란 가운데 있는 함께 걷고 이끌어주고 있는 자는 바로 아담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아담이 죽은 후에 헨리는 고백합니다. 아담은 헨리가 자기 자신에게 뿌리 내리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아담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아담의 삶은 나에게 진실하고 영속적인 선물이었으며, 라르쉬가 나의 공동체가 되고 안식처가 된 것도 아담 때문'이라고.

헨리는 아담의 죽음을 보고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는 아담과 관계를 맺었고, 그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우리의 관계는 내 생애 가장 의미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다. 아담의 죽음은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어떤 책이나 교수 이상으로 나를 예수님의 인격으로 다가가도록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잠을 깨워주는 전화 벨 소리였다."

라르쉬 공동체의 고백을 담은 헌장에는 매우 놀라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보통 환영·경탄·자발성·솔직함이라는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우리 마음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기억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신호다."

헨리가 아담에게서 발견한 장애인의 존재 비밀을 자꼬 반 도마엘 감독은 영화로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가난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난의 문제는 어떨까요? 가난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보다는 가난한 자가 있는 사회가 더 완전한 사회일 수 있다는 역설 말입니다. 이것이 매우 위험하고 오해를 받을 여지가 많은 발상인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가난을 바라보는 가장 근본적이고 신적 지혜에 가까운 시선이 아닐까요?

물론 이런 시선이 현실화되기에는 인간이 너무 악합니다. 절대 현실화될 수 없는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공존과 화해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와 가난은 끝없이 투쟁하고 시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이 인류의 진정한 가난함을 위해 필요하다는 진실까지 폐기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현실화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근본적 진실을 놓지 않는 것이 무가치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현실의 비참함을 들이대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집어치우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걸 이야기하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될 것이고, 가난한 자들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며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빌미로 삼을 것이 분명한 만큼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 부와 가난의 문제의 심각성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삼킨다는 데 있습니다.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 노동자들의 삶이 저당돼 있고,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자본가들의 목구멍은 가난한 자들의 생존 기반을 무차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이 자기들의 자본을 증식시키는데 동원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미끼를 던져주면서 놀랍게 부를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삼킨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는 교회마저도 형편이 그러합니다. 하물며 세상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어떤 이론이나 지혜로도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고, 사회적인 장치를 제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부자가 되는 과정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습니다. 만일 부자가 되는 과정이 정의롭다면 부자를 기쁨으로 인정하고 축복할 수도 있겠으나, 부를 쌓는 과정이 정의로울 수 없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위해 부자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승복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내세우지만 실은 부자들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를 쌓는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현실적 진실 앞에서 무슨 이야기가 먹혀들겠습니까. 부자를 적대시하고 투쟁하는 것 외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부와 가난의 문제는 복잡해져버렸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결코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희망합니다. 듣는 이가 없겠지만 작은 목소리로라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기쁨으로 배려하고 돌보고 나누고 존중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기쁨으로 축복하고 그들의 돌봄을 감사히 받으며, 부자들을 깨우기 위해 나를 가난케 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장애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듯, 가난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야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고통스럽고, 저주의 자리에 빠져든 것 같은 낭패감과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겠지만, 좀 더 멀리 그리고 깊이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이 펼치신 진실에 주목하고, 이 진실을 가르칠 때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난을 자랑할 수 있어야

바울이 몸의 가시가 버거워 빼달라고 간구했지만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했던 것처럼, 가난에 대해서도 한없이 불편하고 저주받은 자처럼 취급당해야 하는 것이 억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와 인류의 영적 황폐함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며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한 신앙의 사람은 있는데, 왜 가난에 대해서는 내게 유익이라는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부의 균등분배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를 공존케 함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자를 동시에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나는 가난에 대해서도 능히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뿐 아니라 가난을 자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의 세계, 하나님나라의 보화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의 문제가 결코 만만하고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인정합니다. 인류의 지혜를 다 모아도 쉽게 풀 수 없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의 문제를 특별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병선/ <어느 목회자의 고백>·<신앙의 마스터클래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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