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교단의 총회가 끝이 났다. 세간의 이목도 이목이려니와 교인들의 관심도 전에 없이 높았다. 총회나 노회와 같은 교단의 공적 행사에 일반 교인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전과는 2019년은 달랐다.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김태영 총회장) 총회를 향한 관심은 작년에 이어 최고조였다. 2018년에는 '명성교회' 사안에 극적 반전을 만들며 언론의 이목을 집중했고, 이후 열린 교단 '재판국' 또한 극적 결과를 내놓으며 공공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019년의 결과물 또한 반전이다. 헌법을 스스로 부정하고 만 이번 총회는 공적인 증언의 장이라기보다는 사사로운 타협의 장으로 전락했다. 법이 엄중하나 딱 한 번만 어길 기회를 부여하겠다는데, 신학적 논리가 빈약하고 법리적 논리 또한 공허하다.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일제히 의중을 꿰뚫어 정치적 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으니 누군가 말한 대로 한국교회의 조종을 울리는 상징적 결과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도대체 이런 비이성적인 판단이 왜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애초에 신앙 공동체는 비이성적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인가.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인상이 그렇다 해도, 신앙을 비이성적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 오해라는 것이 오늘날 많은 학자들 증언이다. 이는 신앙이 과학적이라거나 증명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이성주의'가 은폐한 독선과 폭력의 사태를 성찰한 결과로 나타난 의외의 부산물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아예 이성주의 요구에 부응한 일단의 분파가 과학적 논리로 신앙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일탈적 설명이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예컨대 객관적이며 공적인 증언인 '창조신학'과는 달리 과학으로 창조를 증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오히려 근대의 '이성주의'에 패배하고 기독교 본래의 공적 진리를 사사화하는 우를 과감하게 행하고 있다.

고백의 근거

20세기 신학적 지형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비판과 저항, 대안의 모색이라는 작용, 반작용,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말로 하자면 '진자 운동'의 궤도를 따라 형성되어 왔다. 자유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이 제시한 방법을 수용하고, 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한 신앙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소위 '방법론'의 시대가 열렸다. 신학은 단지 고백되거나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교리에 담긴 통찰과 의미를 해석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박은 인간의 학문적 명증성이 신앙의 계시성을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로마서 강해> 제2판 서문의 그 유명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인간)은 땅에 있다!"는 선언이 그러했다. 그 자신도 이 선언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자유주의 놀이판에 떨어진 폭탄이라 했던가. 그렇게 방법론으로 환원되었던 계시신학은 다시 신학의 전면에 등장했다.

우리는 예배 순서에 따라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기도 하고, '주의 기도문'을 따라 공동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합의로 고백된 신앙 유산을 공적으로 증언하고, 성경에 기원을 둔 기도문 또한 공적인 권위를 인정한다. 방법론이 유산들의 진위를 따져 물은 죄과(?)로 신학의 법정에서 파면되었어야 했다면, 계시적 신앙을 객관화하고 신앙고백을 공동의 유산으로 인정하는 법적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전통이다. 공동체적 고백의 기원은 전통에 서 있다. 기독교 전통의 기원적 사건은 성육신 사건이며, 우리 신앙고백의 법적 권위는 이 기원적 사건에 터해 있을 때 정당한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이 이후 전개되는 고백신앙의 논리이다. 고백신학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 형성에 방점을 둔다. 신앙 공동체 기원을 성육신 사건의 계시적 의의와 그에 대한 초기 공동체의 고백들에 두면서 객관적 지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대체로 이런 신학적 분위기를 지지한다. 20세기 초기 복음주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다른 이름이었다. 1940년대 칼 헨리(Karl Henry)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서 있는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와의 차별성만 부각하고 사회적 실천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명확히 구별하는 존 스토트(John Stott)에 와서 어느 정도 극복된 것으로 보인다.

고백신학이 '근본주의'와의 차별적 지형을 형성해 '복음주의'로 이어졌다면, 그 한국적 지형은 어떠한가? 한국은 여전히 '근본주의'의 포로 상태인 보수적 '복음주의'가 고백신학 전통을 대변하고, 기독교 신앙의 증언을 교회의 전통과 고백에 두면서도 그의 공적 층위를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즉 한국교회는 고백신학 전통을 전통적 기원에 대한 존중과 계시적 신앙의 열망 정도에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적 합리성의 거부를 목표로 삼는 듯하다.

복음주의적 세계 이해와 신앙고백은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사적 변동이 요구하는 신학적 대응의 필요성에 따라 유효기간을 다해 가고 있다. 기독교 내부의 전통과 고백에 터해 기독교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부각하는 것 자체를 선교의 실천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은 놀랍도록 역동적이나 오늘의 세계적 역동에는 더 이상 적합지 않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단순 도식으로도 해명되지 않는 세계의 발전과 진보는 분명 다른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고백신학의 신학적 정당성을 완전히 허물지는 못한다. 기독교 신앙의 기원을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부활'의 역사성에 두는 이상, 고백의 실천을 내부 결속 동력으로 전환했다 하여, 선교적 실천의 무대를 교회의 제도적 확대로 환원했다 하여 신학적 객관성이 상실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시대적 맥락과 요청에 따른 공적 증언의 가능성이다. 복음주의 신앙이나 고백신학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번 총회에서 목도한 사건들이 그 증거를 보여 준다. 성육신 사건의 증언자들이 자신들의 고백을 어떻게 사적인 욕망으로 둔갑하는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사유화하는지, 공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어떻게 자신들의 고백을 배신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고백의 객관성이나 역사성은 증명 가능하거나 과학적 해명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권위는 비이성적인 고백 행위 때문에 무너진다.

합의가 되었든 타협이 되었든,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하는 증언이 외부를 향해 공적인 설득력을 가질 때 자신들의 고백적 행위가 정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담임목사직 대물림'을 허용하고 헌법을 스스로 거스른 이번 예장통합 총회의 결정은 공적 권위를 현저히 상실했다. 이는 한국교회가 유효기간이 다한 '고백신학'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는커녕 구시대의 마지막 열차에 올라 폭주하는 꼴이다.

'방법론'으로서의 공공신학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고 '공적인 것'을 시민사회 문법으로 이해하려 했던 근대적 방식은 종교를 비이성적이고 증명이 불가한 것으로 '사적인 것'에 위치하게 했다. 비판 이론으로 이데올로기를 사회변동 주요인으로 꼽았던 좌파 지식인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종교가 사회적 변동의 근원적 역할,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토대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실로 100년 만에 벌어진 전복적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아직 고백신학의 명분에만 집착해 그 방법론적 해명을 공적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신학 지형이 답답한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 공공신학의 쓸모는 매력적이다. 공공의 담론에 대응하고 우리 신앙고백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노출하기 원한다면, 다원적 문법을 요구하고 개방적 태도를 전제하는 공론의 장에 참여,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의 공적 증언을 위해서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고백의 기원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고백이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것임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다른 혹은 더 적절한 방법론에 대한 회피가 계몽의 시대, 그 변증법에 동의했던 자유주의의 환원적 방법론으로 인해 남겨진 트라우마 때문이라면, 그 도착적 증오를 우회해 우리 고백이 우리의 현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조건임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

즉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 우리가 투기된 세상에서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개시하면 되겠다. 우리 고백이 공적인 논의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고백에는 그 논의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기원이 담겨 있다고 증언하는 법을 모두 훈련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것은 공론장의 언어로, 성령의 새 술에 담긴 번역된 언어로, 21세기의 급격한 변동을 포괄하는 초월적 세속어로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

가난 문제에는 모두가 함께 사는 공동체의 언어로, 이념적 갈등 문제에는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동선의 언어로, 차별과 배제 문제에는 사랑과 포용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 고백은 비이성적인 것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오욕의 독방에 영원히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제 고백을 담아 왔던 옛 그릇을 잘 보관해서 공적 증언의 차가움이 지치게 할 때마다 한번씩 꺼내 영혼의 온도를 높이는 일에 사용할 것이다.

공공신학의 방법론은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애써 합리적이고자 한다. 신학의 자리를 공공의 시민사회에 놓기에 따르게 되는 문법의 특성이다. 그러나 근대가 실수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이원론적 구도를 따르지 않으려 한다. 즉 고백과 주관에 증명과 객관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것에 녹아 있는 기원적 진리 체계를 존중하여 오늘에 적합한 언어로 번역하는 일, 곧 분석과 해석의 구성적 대응이 요긴하게 작동될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이고 고백적인 신학으로 오늘 시민사회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적절히 답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착각한 군인이 한참 뒤에 섬에서 나와 이제 사라진 적을 피해 우왕좌왕 헤매는 꼴이 한국교회 모습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의 발전은 거듭되었고, 2017년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공론의 진보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이미 사라진 적을 피해 다니고 있다.

공공신학의 방법론은 그래서 공적이다. 즉 시민사회 의제를 논의하는 원탁에 앉아 관련 전문가들과 활동가들의 토론과 대화에 참여하고, 객관적인 정보와 기록을 분석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또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설득력을 갖도록 비판의 소리에 개방된다. 신학적 통찰도 수정 가능성을 인정하고, 더 좋은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더 많은 자료를 참고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동의 선에 부합하는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한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지금 한국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과오는 심각하다. 이번 총회 결정으로 이제 한국교회는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야 할지 모른다. 더욱이 토론과 이견을 차단하는 두려움 없는 과감성의 기원은 어디란 말인가! 공적 증언을 포기하고 만 이번 결정에 좌절하자니 이미 시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부끄럽다. 저들은 저들의 길을 가고, 필자는 필자의 길을 갈 것이다. 그 길이 우리의 고백을 더 새롭게 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성석환 / 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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