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책을 내면서 부제를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길이 다른 이유'라고 붙였고, 그것 때문에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마침내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도 페미니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 불을 더 키우는 데에 보태기는커녕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페미니즘의 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은 서로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말은 그래서 페미니즘을 활용할 수 없다거나 페미니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종교가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믿지만, 그래도 필요에 따라 과학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페미니즘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얼마든지 페미니즘을 활용해서 종교인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전통은 서로 다른 범주의 전통이기 때문에 어느 전통에 서서 자기 삶을 더 풍성하게 할 것이냐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 선택은 사실 종교 페미니즘이 등장하면서 더 불가피해졌다. 종교 페미니즘이 종교를 페미니즘의 의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페미니즘의 계보를 만들어 가는 학자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피할 수가 없다. 근대 교육이 탄생하기 이전에 여성의 자기 의식을 깨우고 지식과 문자의 세계로 여성을 인도한 것이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Gerda Lerner)도 1986년 처음 출간한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The Creation of Feminist Consciousness>에서 그 사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성의 인권을 둘러싸고 서구에서는 페미니즘의 의제와 기독교 여성들의 의제가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아주 쉽게 혼합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확고하게 자기 계보를 세워 가기 시작한 페미니즘은, 더 이상 20세기 초의 페미니즘 모습이 아니었고 종교와는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종교 페미니즘은 그러한 페미니즘에서 태어난 일종의 이단적 존재인데, 이단적 존재라 하더라도 그 계보 역시 페미니즘의 연장이지 종교 전통의 연장은 아니다. 종교 전통 안의 문제를 바로잡기 보다는 페미니즘으로 정의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두 회에 걸쳐서 다룬 이슬람 페미니즘과 유교 페미니즘은, 그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종교 전통으로 선회한 페미니즘들이다. 비서구 전통에서 나온 그 두 페미니즘과 달리, 이번에 다룰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서구 안에서 종교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어떻게 자유주의 계보의 종교 페미니즘이 종교의 개선보다는 페미니즘을 상위 규범으로 해서 종교의 전복을 시도하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종교 페미니즘의 중요한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자주 거론되는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나 엘리자베스 슈슬러-피오렌자는 둘 다 가톨릭 신자로서 현재의 기독교 성경을 기반으로는 여성신학의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해방신학을 참조해서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을 적용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접근하지 않고 가부장제의 음모가 담긴, 그래서 '의심'의 눈초리로 먼저 접근해야 하는 인간 저자와 편집자들의 책으로 보았다. 이들에게 죄와 악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부장제이며, 이들이 추구하는 선은 가부장제의 종식이다. 따라서 예수의 대속적 사역도 별 의미가 없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들은 딱히 대속받을 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말이 자칫 남자와 여자를 편가르고 모든 남자를 다 비난하는 말로 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부장제의 종식은 여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좋은 것임을 설득하기 위해서, 나중에 슈슬러-피오렌자는 주장제(kyriarchy, 주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yrios'를 가지고 만든 합성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 세상의 지배 세력을 단지 아버지들만이 아닌, 인종과 계급과 종교 등 여러 요소에서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백인들, 기업가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등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들이 하나의 지배 체제 곧 주장제를 형성해 여성과 그 외 모든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고, 성경이 그것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매개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거기에서 여성과 기타 주변적 존재들의 해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학자들이 기독교의 이름을 달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전통을 통합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이것은 통합이 아니라 페미니즘 전통으로 기독교 전통을 뒤집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종교성이 응집된 경전인 성경을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도구인 가부장제를 상위 개념으로 가져와서 뒤집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가부장제라는 이론적 도구를 기독교인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해석의 우위 범주로서 페미니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독교 전통은 그 전통 안에서 성경을 해석해 온 계보가 있고, 그 해석의 방법론은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빌려 온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종교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쪽으로 사용하지 자기 종교의 기반을 해체하지는 않는다. 즉 성경은 성경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학적 접근을 하지, 성경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는 순간 기독교의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전통의 기독교인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여성 신학자는 다 가톨릭 신자다. 류터와 슈슬러-피오렌자 외 여성신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보니 제바라(Ivone Gebara)도 가톨릭 신자로서 남미 출신의 수녀다. 가톨릭 전통은 종교개혁 계보를 잇는 개신교 전통과는 달리 오직 성경에만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응집하지 않았다. 가시적으로도 하나의 교회 틀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신자의 정체성과 교회의 일원 됨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전례들이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정치체와 함께하면서 신민 혹은 시민들의 일상에 관여했기 때문에, 민간 신앙과의 결합에 있어서도 개신교보다 유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유연할 수 있는 이유도 사실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확고한 교회 정치체와 성직 체계가 있어서 자신의 종교적 경계와 질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과 같은 가톨릭 기반 여성신학자들의 작업이 자기 전통에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는지는 그들 전통 안에서 평가받을 일이다. 

반면 '오직 성경'이라는 전통을 이어 가는 개신교는, 성경을 의심하게 되면 자신의 종교적 범주 자체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종교 페미니즘에서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 캐롤 크리스트(Carol Christ)는 개신교 전통 출신으로서 결국 기독교를 떠나 여신 종교로 갔다. 따라서 특정 교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론도 약한 복음주의는, 성경을 해체하면 그만큼 종교적 정체성도 타격받을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 전통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좀 더 이어 가자면, 페미니즘 전통에서 종교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들이 활발하던 1980년대에 나온 2-4세기의 초기 기독교 여성에 대한 연구들은, 그 여성들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한 행동들을 해방의 맥락에서 읽어 내려 한다. 고대 로마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독교는 이 여성들에게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이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정의하며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갔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이원론에 기초해 몸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전통도 기존의 권위 구조에 도전한다는 측면에서 여성 해방과 연결해 해석했다. 그러나 몸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전통을 오늘날 몸을 인식의 중요한 매개로 여기는 페미니즘과 연결하는 것은 오류이며, 근대 이후 개인주의 사회와는 사뭇 다른, 가부장을 중심으로 명예라는 문화 규범 속에 인간관계가 촘촘하게 얽힌 사회에서 이러한 '개인'의 행위성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고 지적하는 반론들이 곧 뒤따랐다. 

결국 1980년대에 나온 여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연구들은 페미니즘 연구가 확산되던 당시 분위기에 힘입어 페미니즘이라는 의제를 가지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려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궁극적으로는 페미니즘의 영역을 키워 준다. 종교도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게 목적인 연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여성신학과 같이 움직인다. 성경 안에서 여성 해방을 지지하지 않는 구절은 교회가 제국과 결탁해 가부장제를 강화하면서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 경전에 포함한 것이라 보고, 그러한 편집 과정을 증명하려는 연구 또한 페미니즘의 계보를 탄탄하게 해 주는 역사적 연구들이다.  

교회 안에서 적잖이 차별받은 여성들에게 이러한 연구들은 제법 매력적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취할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관점의 연구들이 교회 안에 잘못된 전통이나 관행을 수정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용의 한계는 곧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갈림길이기도 한데, 성경을 우선 의심의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안에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받아들이기 힘든 모순들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접근들을 찾느냐에 따라 내가 어느 전통에 서느냐가 정해진다. 

이것은 평등 사상이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다. 성경은 해석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고 성경이 무엇을 말한다고 보건 그것은 곧 해석의 결과다. 그리고 성경은 누구나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성경으로 믿는 공동체는 그 성경으로 표방되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 안에서 그 구성원들을 형성해 가기 위해 해석 작업을 한다. 따라서 그러한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성경을 성경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전통에서 성경을 평가하는 것이거나 다른 전통을 세우는 데에 성경의 권위를 활용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은 성경을 성경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게 아니라 페미니즘 전통을 세우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접근하는 방식이 이성과 경험을 우위에 두는 하나의 해석학적 접근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작업이 곧 진리이고 정의인 양 주장하기 때문에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 이들은 진보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사실 그 방법론은 근대적 토대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성경에서 평등을 읽어 내는 것을 하나의 해석으로 보지 않고, 이미 성경은 평등에 관한 책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도 버릴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 전통에 기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기독교에 기여하는 게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남녀평등이 아닌 남녀의 상보적 관계를 주장해 왔다. 상보론은 여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남자와 여자는 영적으로는 대등하지만, 현실에서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은 다르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서는 현실 속에서도 평등할 수 있다는 평등론의 주장이 늘었고, 성경을 성경대로 인정하면서 해석의 접근을 통해 그러한 평등론을 개진한다. 이러한 변화는 다분히 페미니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남성과 같은 근대 교육을 받고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교회는 고려할 수밖에 없다. 지금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의 바람은 교회가 그것을 제대로 고려해 주고 있지 않다는 의사 표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복음주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빌려 올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서로 다른 전통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기 입장을 정해야 한다. 

내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왜 그렇게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구분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하려 하느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전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내가 학문적으로 검증했다는 사실 외에도, 기독교인으로서 내 종교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종교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내 종교의 기반을 허물 생각은 없다. 페미니즘을 오래 공부한 입장에서 나는 궁극적으로 페미니즘보다 기독교가 내 인생을 복되게 사는 데 더 만족스러운 답을 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복음주의 신학자 니콜라 호가드 크리건과 크리스틴 D. 폴(Nicola Hoggard Creegan and Christine D. Pohl)이 <경계에서 살기: 복음주의 여성, 페미니즘, 그리고 신학 학계 Living on the Boundaries: Evangelical Women, Feminism and the Theological Academy>(IVP, 2005)에서 연구한 많은 복음주의 학계 여성들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여성신학이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고, 자유주의 여성신학자들이 복음주의 여성을 무시하는 것도 경험했다. 

미국 학계에서 주류는 자유주의 여성신학이고, 종교 안에서 나름대로 여성 이슈를 풀어 가고자하는 복음주의 여성들의 노력은 아예 거론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이나 유교는 자신들의 전통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제국주의라는 인상을 풍기기 싫어서라도 종교 안에서의 페미니즘 작업을 인정해 주지만, 복음주의는 서구 기반의 종교이면서도 여전히 종교성에 매이는 집단으로, 즉 덜 계몽된 집단으로 쉽게 치부된다. 그나마 이슬람 페미니즘과 유교 페미니즘이 인정되고 몰몬 페미니즘까지 세를 더하면서 복음주의 페미니즘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려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복음주의 페미니즘을 하는 여성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은 복음주의 진영의 소수로서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요구로 상처도 받고 불이익도 받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종교 기반을 허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 안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조금 더 페미니즘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주의답게 좀 더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체험과 영성을 강조하고 제도와 권위주의를 싫어한다. 그래서 성경이 더 중요한 면도 있다. 혼자서 성경과 마주하여 신의 뜻을 알아 가는 게 복음주의의 중요한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성경의 권위가 중요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개인의 체험 역시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의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지 않아도 자기 나름대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관습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용적인 입장과 아예 전통을 갈아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신학 교수인 파멜라 코크란(Pamela Cochran)은 <복음주의 페미니즘: 하나의 역사 Evangelical Feminism: A History>(NYU Press, 2005)에서, 케이 쿡(Kaye Cook)의 조사를 인용하며 복음주의에서 출발한 '복음주의여성정책회의'(Evangelical Women’s Caucus)가 점차 성경 중심성에서 벗어나 세속 페미니즘의 사회 정치적 의제를 더 많이 받아들이면서 더 확고하게 페미니스트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전통을 갈아타거나 진영을 바꾸는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우리는,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영 마음에 안 들면 페미니즘 전통을 받아들여도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위하는 척하면서 두 전통을 혼합하려는 노력은 결국 기독교가 아닌 페미니즘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크리건과 폴은 여성신학의 기본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부장제 질서에 여성들이 공모하는 것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은) 강하게 비판해 왔다. 그들은 기독교 전통에 문제가 있고 여성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가정한다. 심지어 보수주의 교회에 속한 여성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가 너무도 뿌리가 깊어서 여성들도 쉽게 그 요구에 따른다면서, 오직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거기에서 벗어나서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여성들은 어떠한 의미로든 '적'과 협력한다는 의심을 받으며, 그들의 진실성과 진정성은 의문시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가부장제에 대항해서 하는 논의의 논리적 귀결이고, 많은 페미니스트 그룹과 교실에서 이러한 입장은 암묵적으로 통용된다. 여성신학자들, 적어도 페미니즘의 핵심을 정의하는 사람들이자 일반 학계와 교류하는 사람들은 보수적 종교에 대해 확실하게 적이라고 선을 긋는다." (<경계에서 살기> 74-75쪽)

이것은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경험한 것이고,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Feminism and Religion'이라는 미국 종교 페미니스트들의 유명한 블로그에서는 얼마 전, 그동안 보수 종교의 여성들을 그렇게 무시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내가 지도 교수 소개로 이 블로그를 처음 팔로우하기 시작한 7년 전에 비해 최근 들어 여신 종교를 하는 필진이 부쩍 늘어나고 기존 종교의 필진들은 대폭 감소했다. 자유주의 종교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게 어느 정도 확인된 셈이다.) 

나는 묻고 싶다. 예수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게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위하는 것인가 페미니즘을 위하는 것인가. 페미니즘이 대세가 되면, 교회 안에서 여성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페미니즘 전통을 끌어들이는 게 언뜻 보면 교회를 더 세련되고 진보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마저 페미니스트로 만들면 결국에는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 줄 뿐이다. 복음주의자는 복음주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는 페미니즘 의제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도 복음주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복음주의가 페미니즘을 활용한다면, 그것은 복음주의 안의 여성들이 더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이지 페미니즘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코크란은 복음주의가 문화적 상관성을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영향력을 잃는다고 말한다. 유진 피터슨이 문화적 상관성을 경계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 말은 결국 교회가 여성 문제를 계속해서 페미니즘 전통으로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의 칭찬은 들을지 몰라도 예수의 존재는 (그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여성으로서 어떠한 방법론을 취해야 기독교 전통 안에서 여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다음 번 글에서는 그 방법론과 함께 지금까지 소개한 세 개의 페미니즘이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참고가 될 수 있는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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