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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종교 페미니즘의 길
[양혜원의 종교 페미니즘 수업] 방법론을 고민하다
  • 양혜원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12.21 12:22

교회는 어떤 곳일까. 나는 교회에서 만나 교회에서 결혼하신 부모님의 장녀로 태어나 교회를 당연한 내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자랐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내 삶의 일부로 여기고 계속 살 수도 있었다. 주간 행사처럼 일요일 아침이면 괜찮은 옷을 골라 입고 가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일어났다 앉았다, 노래를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눈 감았다 하면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을 반복할 수 있었다. 물론 약간 과장이 섞인 말이다. 교회는 그렇게 문턱만 넘나들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다. 세례가 있고 입교가 있고 성찬이 있다. 즉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는 절차가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습관처럼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도 입교를 해야 하고, 입교 공부는 성인 세례 공부보다 간단하지만 그래도 문답들이 한번쯤은 내가 이 집단의 멤버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그 문답이 남자와 여자에게 다르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고 같은 대답을 요구받는다.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느냐는 것이다. 이 간단한 질문 하나에 많은 전제가 들어가 있다. 우선 구원의 필요를 느끼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 다음에는 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그 구원을 의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구원을 가능케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예수라는 존재를 의지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그 구세주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며 그 믿음이 지금 내 삶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도 있다. 좀 더 조심스러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수라는 존재 하나만 믿으면 다 되는 거냐,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 하고 물을 것이다. 나아가서 그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도 물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 논쟁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다 들었을 때 여자들도 남자와 더불어 자신에게 필요한 구원을 얻은 것에 안도할 수 있었고, 방법이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재림을 약속한 예수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인간의 수명도 점점 더 늘어나 자신이 예수께로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날도 길어지면서 이 구원은 지금 이 세상 삶과 더 많은 상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이, 그리고 사회가 변하면서 기독교도 변했다. 특히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종교적 권위는 특별한 지위를 잃었고, 오늘날에는 종교가 아닌 국가가 사람의 일상과 존재 방식에 더 깊이 개입하고 있다. 종교는 더 이상 독자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국가의 비호하에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에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이 적극 동조했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낳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분리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적은 없다. 인간의 존재 방식과 존재 의미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서 종교는 그 신념을 전파하고 설득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동원해서 움직이게 해야 하는 정치의 속성은 종교적인 혹은 종교화한 가치와 신념에 기댈 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권위의 힘이 약해지고 점차 시민사회로 인간 사회의 질서를 통제하는 권한이 넘어오기 시작하던 종교개혁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 대한 통제가 더 심해지던 시기이다. 그러나 종교 제도와 시민사회가 점차적으로 분리되면서, 여성들은 교회가 아닌 시민사회를 상대로 권리 증진을 위한 싸움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도 종교가 개인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하면서 종교적 가치를 대신하는 시민적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고, 따라서 여성들도 남성들과 함께 종교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지는 우매한 것이라고 믿고 시민의 영역에서 진보를 위해 싸우는 쪽을 택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성과 역사의 진보를 믿던 시절, 종교적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에서 벗어나 여성도 남성처럼 이성의 힘으로 같이 진보 사회를 위한 노력에 동참할 수 있다는 신념이 탄생한 것이다.

모든 여성이 그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종교는 남성들에게보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돌보는 노동을 주로 담당해 온 여성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어서, 남성들이 점점 더 세속화할 때에도 여성들은 오히려 더 사명감을 가지고 종교를 지키기도 했다. 아버지가 대충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는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일수록 종교에 대해서는 남성과 같은 회의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성들의 시민 의식, 곧 주권 의식이 커지면서 종교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종교란 원래 그런 것이고, 이제 다른 대안들도 있으니 꼭 종교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된 것이다.

여성들의 시민 의식이 커 가던 시기는 또한 서구 사회가 다종교 사회의 현실을 조금씩 인정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나선 시기이지만, 동시에 불교가 미국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한 기독교가 다소 편협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불교는 딱히 이래라저래라 하는 지침도 없이 무한히 넓어 보이는 데다가 자신들에게는 타자인 동양의 신비감까지 곁들여져 마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서 기독교 페미니즘 다음으로 비서구 종교로는 불교 페미니즘이 빠르게 확산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형식적인 분리로 미국 주류 교회는 시민사회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방향으로 공적 공간에 참여하게 되었고, 1960~1970년대에 들어와 시민사회에서 여성과 유색인종의 온전한 시민적 통합 요구가 커지면서 그 여파는 종교 제도 안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종교 페미니즘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서구의 시민사회가 백인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말은, 동시에 교회 또한 백인 남성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말과 통하게 된 것이다.

종교 페미니즘이 우선 결합하기 쉬운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였다. 이미 성경의 권위를 해체해 버린 자유주의 배경에서 여성을 폄하하는 구절들이 오류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여기에서 오류라는 말은 곧 '남성 중심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남성 중심적'이라는 말은 성경을 편집하고 기록한 저자들이 다 남성이기 때문에 그 시각이 왜곡되었거나 편협하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교회와 성경을 연구한 신학자들 역시 다 남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한 신학 또한 편협하고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전례를 이끈 종교 지도자들 역시 남자였기 때문에 이 역시 편협하고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을 수정하려면 우선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종교 지도자와 신학자가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이들이 늘어나도 남성과 똑같은 신학을 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소위 페미니즘적 가치로 성경과 신학을 뒤집어야 비로소 '남성 중심성'이 초래한 왜곡과 편협 문제를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적 가치란 우선 반권위주의와 반폭력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여성의 성직 수행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독교가 자기들끼리는 물론 비기독교 국가에서 대해서도 폭력을 자행해 왔다는 진단에서 비롯되는 가치이다. 이 가치가 반드시 생물학적 여성과 결부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남성이 인류를 대변하는 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여성에게 이 가치를 더 많이 결부하면서 가부장적 종교에 대항한다. 즉 현실적으로는 여성도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다 가부장제에서 잘못 배워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여성들에게는 그 책임을 묻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다소 순진하게 페미니스트 여성이 지도자가 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를 오염시킨 가부장제의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중심의) 종교 페미니즘의 중요한 흐름이었다면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는 좀 더 정교한 연구들이 나오면서 해방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자기 종교 전통 안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행위성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종교가 그렇게 남성 중심적이고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왜 여성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거기에 동조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주어진 종교 제도 안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는 여성들의 주체적 경험을 부각해 주기도 했다.

이 두 가지 굵직한 흐름은 그러나 서로 보완되기보다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의 가부장성을 문제 삼는 학자들도 여자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는 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행위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결론은 늘 여전히 종교는 충분히 페미니스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로 이러한 방향으로 결론을 짓는 학자들이 자유주의 계통의 학자들이다. 자유주의 계통의 학자들은 종교 전통 계보를 따르지 않고 계몽주의 계보를 따르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종교를 평가한다. 반면에 주어진 종교 전통 안에서 작업을 하려는 학자들은 여성들의 경험이 반드시 종교 제도 변화나 개인 해방을 지향하지 않더라도 그 여성들이 종교 안에서 찾는 나름의 의미를 평가하려 노력한다. 물론 이들이 제도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전통 안에서 변화를 꾀하려 하지 계몽주의 기준으로 종교를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계통 학자들이 그냥 세속 페미니스트들처럼 종교를 떠나지 않고 서로 다른 계보를 포섭해 보려 노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만큼 종교는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자유주의의 영향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신교 역사와 서구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에 가장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종교 페미니즘에서 쓰는 방법 하나는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종교 페미니즘에서만 쓰는 방법은 아니다. 기독교인에게 친숙한 용어로 바꾸면 복음과 문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 페미니즘을 하는 사람에게 일단 종교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 종교가 속속들이 가부장적이라면 아무리 옹호하려 해도 옹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존의 종교가 그렇게 속속들이 가부장적이어서 수정하는 정도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도 종교를 떠나 여신 종교로 귀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종교를 구하는 한 가지 길은 종교가 아닌 문화가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기독교는, 혹은 이슬람은 평등했는데 가부장제 문화가 그것을 오염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미로슬라브 볼프도 지적하는 것으로, 모든 세계 종교가 처음 발원할 때는 그 시대에 가히 혁명적인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구현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해석학은 경전의 원정신은 성차별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야 페미니즘을 지지할 종교적 기반도 얻을 수 있고, 종교를 버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종교 자체가 진공상태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면, 자기 문화를 초월해서 형성될 수 있는 종교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그 첫 탄생의 짧은 순간 이후로 계속해서 가부장제를 이어 온 종교를 설명할 길도 요원하다. 종교가 가부장제도 못 고치고 무력하다면 왜 그 종교를 따른단 말인가. 그렇게 보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는 페미니스트가 더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종교와 문화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기 문화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종교는 가능하지 않고, 종교성이 하나도 없는 문화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이 방법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에게 유용한 방법이다. 다음번 글에서 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앞에서 기독교는 구원의 방법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구원의 방법이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여성에게 구원은 페미니즘에 있는 셈이다. 예수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구원을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종교 페미니즘은 이 기로에 서 있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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