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시절, 한번씩 나더러 뭘 공부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종교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어려운 거 공부한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은퇴하신 여성학과 교수님도 종교가 여성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학자들이 종교를 연구해야 하는데, 어려워서 그런지 잘 안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사람들이 종교를 어렵다고 할 때, 어렵다는 말의 의미는 '난해하다'가 아닌 '난감하다'라고 나는 해석한다. 난해하다는 것은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지만, 난감하다는 것은 개인적 감정이 반영된 말이다. 내가 그 대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종교와 무관할 것 같은 무신론자도 종교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조용히 무신론자로 사는 사람보다는 종교를 배격하고 종교를 폄하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역시 종교에 대한 개인적 감정의 표현이다. 무신론자들이 특히나 공격하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상대해야 하는 신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반감도 그만큼 커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은 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부인하지 못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게 되어 있는 인간사에서, 삶의 의미를 따지고들 대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만큼 좋은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을 이 땅에서 표상하는 제도로 자리 잡은 종교를 무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발끝에 채이는 무엇이다.

종교에 대한 불만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자란 전통이기 때문에 그 안에 남아 있든 스스로 선택해서 종교 안으로 들어왔든, 제도화한 종교는 우리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종교를 자기 마음에 맞게, 혹은 현대의 흐름에 맞게 바꾸어 보려고 한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보니 황금은 없고 거위는 죽어 버린 것처럼, 시대에 맞게 종교를 이리저리 난도질하다 보면 종교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 말은, 종교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를 믿는 구성원의 필요가 달라지고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 종교는 변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렇게 변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종교라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 원래 필요로 했던 의미들을 제대로 부여해 줄 수 있다.

종교 페미니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이 종교를 믿는 여성들에게 제대로 도움을 주려면 종교의 영역을 지키면서 작업을 해야 한다. 종교의 영역을 해체하거나 종교를 페미니즘으로 축소해 버리면 여성들은 그동안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 왔던 종교를 상실하고 페미니즘의 신념만 떠안게 된다.

지금까지 자유주의 종교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종교보다 우위의 범주로 두고 종교를 그 기준에 맞게 해체해 왔다. 종교 간 차이보다는 페미니스트냐 아니냐의 차이가 더 유의미했다. 이 말은,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은 같은 기독교인지만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보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같은 페미니스트인 다른 종교의 혹은 무종교의 사람들과 더 동질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서로 모이면 너희 종교는 얼마큼 페미니즘의 성과를 이루었느냐를 논의하면서 서로 연대 의식을 다진다. 우리가 교회에 모였다가 사명을 안고 세상으로 흩어지듯, 페미니즘의 보편성 아래 함께 모였다가 사명을 안고 자기 종교로 흩어진다. 이들이 결국 지키고자 하는 것은 페미니즘이지 종교가 아니다. 이미 페미니즘을 종교보다 우위의 보편적 기준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이 어느 전통에 설지 입장을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는 여성인 내게 제대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가. 혹 그렇지 않다면, 페미니즘이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을 내게 줄 수 있다고 진정 믿는가. 인간은 가치중립적인 지대에 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전통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의 전통에 서기로 선택했다면 그대로 좋다. 그 전통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충실하면 된다. 그러나 종교의 전통에 서기로 선택했다면 종교가 가고자 하는 방향 안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그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것과 별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들 돌아오는 반응은 종교가 너무 좁다는 것이다. 아마도 종교를 택했다고 하면, 선교 단체 같은 곳에서 시키는 제자 훈련에 충실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여성들에게 도덕적인 삶이란 전통적인 여성상을 따르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가 더 좁게 느껴질 수 있다. 만약 종교가 정말 자신에게 그것밖에 주지 못한다고 믿는다면 페미니즘 전통으로 갈아탈 수 있다. 종교가 계속 발끝에 채인다면 종교성를 유의미하게 해 주는 기반을 지켜야 종교가 줄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종교성을 유의미하게 지켜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가톨릭과 달리 전통도 전례도 마다하고 오직 성경 하나에 모든 종교적 정체성을 응집해 놓은 개신교는 성경을 해체하면 종교적 기반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페미니스트를 비롯해 모든 여성에게 큰 숙제이자 도전이다. 성경에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가부장적 구절이 많고, 성경의 권위를 빌려서 교회가 가부장적 가치들을 옹호하고 전파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 인정하기에는 지금 우리 정서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이 성경을 이리저리 쪼개고 해체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은 거위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이 계시가 된 것이라면 성경을 해체하고 난 후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공허한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성경을 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자니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이 딜레마를 안고도 종교 안에 머물기로 선택한 여성들에게 특별한 지혜와 영감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은 이러한 위치에 처한 기독교 여성들에게 몇 가지 참고점을 시사한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맞서 자기 종교를 옹호하려 한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지키면서 페미니즘 작업을 해 나갈 때 이들은 서구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스트들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경전에 대한 태도이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경전을 대하는 태도는 기독교 보수주의가 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 그들은 경전의 신성함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도 기독교의 경전만큼 현대 여성들을 난감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럼에도 경전 자체를 해체하지는 않는다. 마고 바드란(Margo Badran)이라는 이집트 출신 이슬람 페미니스트는 이슬람 페미니즘이 무슬림이 다수인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른 세속 페미니즘들과 구분되는 확고한 특징으로, 바로 이 경전 기반을 꼽는다. 물론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즘도 경전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의 경전은 자유주의 이념에 맞게 해체된 경전, 곧 종교성을 상실한 책이다. 그러나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식으로 쿠란을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쿠란에 온전히 의지하는 쪽을 택한다. 이들에게 쿠란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사람의 해석과 이해는 변해도 쿠란은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쿠란에 의지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이슬람이 부상하면서 이슬람의 언어로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게 된 상황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세속 페미니즘과는 다르게 이슬람이라는 종교 안에서 페미니즘 작업을 하겠다고 표방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고, 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쿠란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특수성도 작용한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원어 자체에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과 달리 쿠란은 그것이 기록된 언어 곧 아랍어 원문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원어로 쿠란을 낭독하는 것도 중요한 의식이다. 성경을 번역으로 접하는 게 워낙 익숙한 우리는 언어의 내용과 형식의 상관성을 잘 생각하지 않는데, 쿠란은 그 언어의 형식과 소리도 의미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직접 아랍어로 쿠란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모든 경전이 그렇듯 원어를 안다고 그 의미를 투명하게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슬람 사회 안에서는 쿠란 이외에 선지자 무함마드의 행적과 이야기를 기록한 하디스나 수나와 같은 다른 경전들이 때로 쿠란에 맞먹기도 하는,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특히 소수파인 시아파와 달리 다수파인 수니파는 하디스를 중요한 경전으로 여긴다.) 쿠란의 의미들이 명쾌하지 않다면 신의 뜻에 가장 부합하게 산 모델로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것은 당연했고 따라서 그의 행적들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슬람 관습 안의 여성 혐오적 요소들이 하디스 전통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쿠란의 권위에 더욱 의지해서 쿠란 이외의 경전들이 가지는 강력한 지위에 효과적으로 도전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성경과 달리 쿠란에는 하와의 창조 방식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암시하는 구절은 있지만 성경처럼 구체적으로 아담의 갈비뼈라는 언급은 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가 여성을 남성의 파생적 존재로, 그리고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해석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무슬림들은 암묵적으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디스에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갈비뼈가 아니라 굽어진 갈비뼈라고 해서 여성의 성격과 연결해 놓았다. 기준이 되는 '곧은 남자'와 달리 여자는 갈비뼈처럼 굽었으니 억지로 펴려 하면 부러진다는 것이다. 쿠란에는 없는 이야기를 하디스가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 셈이다. 하디스보다 쿠란의 권위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하디스를 무시할 수 있다면, 여자와 남자의 창조 방식에서 평등성을 유출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쿠란에 성차별적 구절이 없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쿠란에는 남녀의 동등성을 명시하는 구절도 같이 있기 때문에, 쿠란보다 더 분명하게 가부장적 해석이 많이 들어간 하디스를 일단 배제하고 나면 경전에 기반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기가 수월해진다. 이것은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는 전략이다. 종교 즉 신의 영감을 받은 경전은 가부장제를 지지하지 않으며 가부장제는 후대의 잘못된 해석 곧 가부장제 문화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전략이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관습 안의 가부장성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관습을 구성한 가부장제 문화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주로 초기에 이슬람 페미니즘 작업을 한 학자들이 많이 취한 전략이다. 이슬람 사회 안에서도 1970~1980년대에는 세속 페미니즘이 우세했지만,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슬람이라는 종교 안에서 페미니즘 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여성 혐오의 종교로 계속해서 재현해 온 것에 대한 불만, 서구식 자유주의에 대한 회의, 그리고 정치적 이슬람의 영향 등 복합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우선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여성 혐오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게 중요했고, 여러 학자가 이슬람이라는 종교 안에서 할 수 있는 페미니즘 방법들을 모색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즉 서구식 페미니즘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슬람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 기틀이 탄생한 것이다.

이슬람 페미니즘이 탄생한 시기는 페미니즘이 다양성을 자신들의 모토로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일단 다양성 자체가 모토가 되면,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지지하는 것 외에 다른 핵심 윤리를 가지기 힘들다. 따라서 그냥 막연하게 다양하기만 할 게 아니라면 어느 전통에 서서 어떤 여성들을 위할 것인지에 대한 노선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 사회의 많은 여성이 이슬람 전통 안에서 길을 찾는 이유가 여기 있다.

종교와 문화를 좀 더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를 초기 작업이라 했는데, 시기적으로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종교와 문화의 이러한 인위적 구분에 대해 회의적인 연구가 더 많이 나타나는 게 사실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가부장제 문화를 구분하려는 학자들은 하디스의 전통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쿠란을 인권과 페미니즘의 권리 장전으로 읽으려 한다. 즉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예수님을 페미니스트로 만들고 성경도 인권 선언문으로 만들려 하는 것처럼, 무함마드의 가부장성도 완화하고 쿠란도 인권 선언문으로 읽으려 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스트와 다른 점은 쿠란을 해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평등을 지지하는 것 같은 구절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현대적 평등의 의미를 읽어 내려 하고, 그렇지 않은 구절들에 대해서는 상황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든 종교의 경전을 평등의 의제에 부합하게 만들려고 한 결과다. 이슬람이 서구에서 반여성적인 종교로 재현되어 온 것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이 반여성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변호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든 가부장제로부터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회의적인 연구가 더 많이 나왔다. 다르게 말하면, 연구가 더 정교해졌다고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 학자 라자 루니(Raja Rhouni)는 쿠란이나 이슬람이 페미니스트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순진한 발상이며, 성평등이 쿠란의 규범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하디스를 배제하고 쿠란에만 집중한다고 해서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이란 기반의 인류학자이자 이슬람 학자인 지바 미르-호세이니(Ziba Mir-Hosseini)는 이슬람 안에서 페미니즘이나 인권의 계보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주로 서구 담론 안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보다는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종교적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슬람 페미니즘 작업을 할 때 쉽게 자유주의 의제에 휩쓸리기보다는 종교라는 영역에 제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안에서 여성들이 제대로 번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물꼬를 터야 한다는 뜻이다. 이 노선 학자들은 쿠란의 가부장성을 굳이 은폐하려 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쿠란이 종교의 경전으로 지향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즉 성평등이 쿠란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다고 보려 하는 토대주의적 입장이 아닌, 계속되는 해석의 전통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신학 전통 안에서 씨름하면서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쿠란의 의미들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이 후자의 흐름은 종교를 페미니즘 의제로 환원하지 않고 종교의 고유 영역을 지키면서 종교가 여성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려는 작업이다. 종교 고유 영역에 대한 배려 없이 모든 것을 일원론적으로 보려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접근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루니는 쿠란의 남성 중심적 담론에 대한 변명을 할 필요 없이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인정하고 다루는 것이 이슬람 안에서의 여성 인권 논의를 더 강력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 고유 영역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자유주의 의제로 쉽게 축소하지 않으려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쿠란이든 성경이든 그것이 신의 계시라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분명 도전이라면 도전이다. 합리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들도 단지 신의 계시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계시도 해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 인식 체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앞에서 사람의 해석과 이해는 변해도 쿠란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미국 기반 이슬람 페미니스트 아미나 와두드(Amina Wadud)의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경전에 다가가는 방법은 해석을 통해서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몇천 년 전에 주어진 신의 계시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거울에 보는 그것이 신의 계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해석 작업을 통해서 최선을 다해 그 계시에 다가가려 하는 것이다. 이 해석 작업은 불가피하게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필요를 반영하고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런던 기반 이슬람 학자 캐런 바우어(Karen Bauer)는 쿠란에 나타난 젠더 위계 연구에서 쿠란을 해체하지 않고도 어떻게 현대 쿠란 해석가들이 중세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남녀의 본질적 평등을 지지하는지를 보여 준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게 당연시되었던 중세와는 달리 현대에 와서는 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우월과 열등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 입장에서 이 '차이'는 여전히 문제의 해결이기보다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종교적으로 유의미하다. 불변하는 신의 계시라고 믿는 쿠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변화는 그 종교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에 종교가 반응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에게 어느 정도 평등 의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통합되기를 원하는 이 여성들의 열망은 종교가 아무리 가부장적이라 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기 종교에 여성을 존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자 한다면 말이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이처럼 서구의 자유주의나 세속주의 전통보다 이슬람 안에서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번영을 고민하며 자기 종교를 지키고자 한다. 서구의 편견과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도 이 문제는 그들에게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고 이슬람을 가부장제 문화로부터 구원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 전략에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일단 이슬람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적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서구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중요한 업적이다. 자기 전통 안에서 할 수 있는 페미니즘 방법들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는 전략은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잘 사용하는 전략이다. 바로 기독교를 가부장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유교 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과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한 작업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는 전략을 구사해도 자신들이 형성된 이슬람 문화 안에서의 정체성이 분열되지 않는 반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자신이 형성된 유교 문화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더 쉽게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한국 기독교 안에서 실효성 있게 작업할 수 있는 페미니즘 방법들을 고민하지 않고, 서구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을 그대로 수입해 억지로 상황을 끼워 맞추려 한다는 뜻이다.

물론 기독교 안에는 유교 문화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가부장성을 극복할 자원이 많다. 그러나 그 극복 방식은 자기 토양에 맞게 이루어져야지 무조건 부인하고 비판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즉 한국교회가 유교 때문에 서구 자유주의처럼 기독교를 해체해서 페미니즘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한국 기독교는 유교 문화의 젠더 관계를 흡수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독교 정체성은 유교 문화의 인간 관계와 적절하게 혼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변화의 시도도 그것을 고려하면서 해야 변화다운 변화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처럼 서구의 이론만 읊거나 선동적인 구호만 외치다 끝나 버린다. 그 후 남는 것은 종교성이 죽어 버린 거위의 허망함이다.

이슬람 페미니즘의 작업은 비서구 전통에서 경전을 해체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하는 페미니즘 사례를 보여 준다. 그들이 서구 사회의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은 그들처럼 비서구 사회에 속한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만하다. 물론 한국의 기독교가 자기 전통 안에서 하는 작업은 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유교 문화 기반 위에 서구 기독교가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은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이 되어 온 같은 비서구권 사회인 우리에게 서구의 자유주의가 자신의 옷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신선한 자극제이다. 바드란은 페미니즘을 자기 토양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국 토양의 기독교 전통에서 페미니즘이 자라게 하려면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유교 전통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번 글에서 유교 페미니즘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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