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erry Christmas!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맞아 교우 여러분의 마음에, 가정에 그리고 하시는 모든 일 위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성탄절에서 '예수 지우기'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급속하게 세가 불어난 '새로운 무신론 운동'이 제일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종교들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이제 가장 급성장하는 교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모든 기독교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면서 성경 이야기를 예로 썼다가 교사로부터 제지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을 몇 번 읽지 않고는 영미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배웠는데, 이제는 학교에서 성경이 금서로 취급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는 크리스마스캐럴도 학교에서는 더 이상 부를 수 없고,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당황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성탄절은 교회가 세상에 내어 준 상태였습니다. 요즘 말로 '아웃 소싱'(out sourcing)을 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탄을 말하기 전에 백화점에서 먼저 예수를 선전하여 돈 버는 일로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저 안에 예수가 어디에 있는가?" 혹은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 모습을 보고 뭐라 하실까?" 질문하곤 했습니다. 마치 아이의 돌을 맞아 친구들을 불러 놓고는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과 많이도 닮았습니다. 아이는 불편하여 보채고, 음식 장만하느라 지친 아내는 아이 곁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속으로 생각하지요. '도대체 이게 뭐야?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자는 거야, 자기들끼리 놀자는 거야?'

이렇게 보면, 변화된 상황은 우리에게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백화점에서 돈 벌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없이 그들 나름의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할 사람들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백화점에서는 상품에 예수님을 끼워 팔았지만, 이제는 교회가 '상품화하지 않은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세상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앉아 그분의 오심의 의미를 묵상하고, 그분의 오심을 감사하며 축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자,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사하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마리아의 찬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종의 찬송가 가사입니다. 라틴어 첫 자를 따서 '마그니피캇'(Magnificat)이라고도 불립니다. 자신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부른 찬양의 노래입니다.

당시 관습으로 볼 때,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을 때 마리아 나이는 13세에서 16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동네에 살던 소녀였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 공생애 이야기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셉이 가난하여 늦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다가 마리아와 약혼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즈음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도 역시 가난한 집 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천사의 방문을 받고 마리아는 일단 순종하겠다고 답을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만일 임신 사실이 알려지고 요셉과 가족들이 자기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 나사렛 동네 한복판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우리는 여러 가상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숨통을 스스로 조입니다. '이러면 어쩌나?' 혹은 '저러면 어쩌나?' 상상하면서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게 됩니다. 마리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스스로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고는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상상했던 가상 시나리오대로 일이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미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일에 집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매일 노력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예배 시작 전에 보여 드리는 성경 말씀이 있지요? 시편 46장 1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우리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합니다.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하나님처럼 통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럴 만한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니 불안해지는 것이지요.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라고! 그러니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너는 잠잠히 있으라고!

이제 겨우 10대를 넘어선 시골 소녀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립니다. 골방에 숨어서 '이를 어쩌나…' 하고 있는데, 친척 엘리사벳 아주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눅 1:39)"

"서둘러"라고 번역한 말은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취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 같았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는 지체 없이, 서둘러, 황급히 유대 산골로 떠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위기를 만나 불안과 두려움에 심하게 흔들릴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 만나면 안심이 되고 위로를 얻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여러분에게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목사로서 저는 교인들이 저를 엘리사벳처럼 여겨 주실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 유교 문화와 한국교회의 부성적 성향 때문에 교인들은 부끄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 생기면 목사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가끔 삶의 위기를 만난 교우님이 마리아처럼 황급히 찾아와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럴 때면 목사로 부름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한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초대받고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은 큰 영예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인가 엘리사벳 같은 품이 되어 주신 적이 있습니까. 삶의 위기에 봉착해 여러분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 두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해 줍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엘리사벳 같은 사람 하나 없고, 여러분을 엘리사벳처럼 여겨 줄 사람도 하나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잘 살았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3.

엘리사벳의 따뜻한 품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차분히 생각하는 중에 마리아는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비천한 몸을 통해 오신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에 대한 추구와 갈망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초월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덮어놓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 종교성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심리학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 번 경험해 본 것이 아니고는 그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렇게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추구한다면 과거에 그것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초월자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인류에게 있다는 말은 인간 존재 깊은 곳에 하나님을 경험했던 기억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찾고 연합되기 전까지 인간의 내면적인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갈망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의식은 하지 못하지만 가장 절실히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아이에게 '사랑' 혹은 '거부' 둘 중 하나로 해석됩니다. 만일 아이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면 그 아이의 감성과 인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갓 태어난 아기는 언제 사랑을 받아 보았기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존재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16).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은 사랑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신을 향한 갈증은 분명한데, 그 신이 누구인지, 우리 편에서는 알아낼 길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수 많은 종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모든 종교의 뿌리는 결국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신을 향한 갈증에 있습니다. 신을 더듬어 찾은 결과로 나온 것들입니다.

하지만 신은 우리 편에서 더듬어 찾아 올라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존재라면 신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신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우상'이 그것입니다. 진짜 신이라면 초월자여야 하고 절대자여야 하며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라면 우리 편에서 더듬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 쪽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신 과정, 그분이 자라나신 과정, 그분이 3년 동안의 공생애에서 하신 말씀과 행적, 그분이 죽으신 과정과 결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그리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모두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그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진지하게 씨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붙들고 씨름한다면 과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아드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 멀리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관심하시고 개입하시는 분임을 증거해 줍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드님이 자신의 태를 통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기처럼 비천한 여인에게 그런 영예가 주어졌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가문 좋고 지체 높은 집 딸에게나 어울릴 영예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되었다니, 그게 쉽게 믿어졌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눅 1:46-50)."

길을 걷다 보면, 수백 혹은 수천 마리 개미들이 까맣게 모여서 무엇인가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가 있지요? 허리를 숙여 그 많은 개미 중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개미에게 여러분은 어머어마하게 큰 존재입니다. 반면 여러분에게 그 개미는 너무도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개미 떼를 밟아 죽이면서도 마음에 털끝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에 비하여 너무도 작기에 그 생명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개미 정도에 비할까요? 우리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에게 작고 덧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십니다.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시 139:1-4)."

다윗이 한 나라 왕으로,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관심하시고 살피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쉽게 믿어집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고 이 세상에는 76억 명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만, 알고 보면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자' 혹은 '초월자'라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의 능력이 우리 능력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우리처럼 생각해서 "그건 불가능해!"라느니 "말도 안 돼!"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저 멀리 어디엔가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함께하시고 참여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보듯,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마리아를 택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5.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참여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마리아 같은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때 마리아처럼 높임 받을 사람들도 있지만 헤롯처럼 내쫓길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이어 갑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 1:51-53)."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왕들"과 "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다 해도 자신들의 악행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죄악을 행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인 동시에 심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죄악 된 생활을 고쳐야 합니다. 그분은 마침내 온 우주의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권력자나 거대한 갑부 혹은 희대의 살인마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를 위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과 계획을 다 보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하나 하나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사십니까. 정말, 진짜로, 진실로, 실제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까.

저는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다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속은,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믿음대로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적인 영역에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홀로 있을 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앙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평소에는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는데, 어떤 상황에 이르면 신앙이고 뭐고 다 제쳐 두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야만성을 드러내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말과 행동을 반복해 가면서도 주일이면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 중직도 되고, 때로는 선교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이처럼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민 교회가 대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민 교회에는 갈등과 분열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시간, 잠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으시는지요?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 많은 일 중에 당장 그만둘 일이 없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꾸미는 일 중에 당장 내버려야 할 일은 없습니까?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직고해야 한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예수께서 오신 날을 맞아 예배하면서 먼저 회개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얼마 전에 읽은 시편의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내 법도를 전파하며, 내 언약의 말을 감히 너의 입에서 읇조리느냐? 너희는 내 교훈을 역겨워하고, 나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말았다. 도둑을 만나면 곧 그와 친구가 되고, 간음하는 자를 만나면 곧 그와 한 패거리가 되었다. 입으로는 악을 꾸며 내고, 혀로는 거짓을 지어내었다(시 50:16-19)."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읇조리며 경건한 척하면서 실제로 사는 것은 죄악을 탐하며 살고 있는 위선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이 모든 일을 너희가 저질렀어도 내가 잠잠했더니, 너희는 틀림없이 '내가' 너희와 같은 줄로 잘못 생각하는구나(시 50:21)."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정한 생각을 품고, 이웃에게 상처 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며, 음행과 음란을 추구하고, 근거 없이 헐뜯고 비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그 입으로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까.

요즈음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전설이나 신화나 동화처럼 취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요한이 창작한 이야기라면 지금쯤 모든 것이 해명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보고 적어 놓은 환상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진짜로 초월적인 세상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반증해 줍니다. 그 모든 환상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결국 다 갚으실 것이니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화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에 관심하시고 살피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증명해 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의 신음 소리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부정한 생각까지도 보시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탄절은 추석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또 하나의 명절이 아닙니다. 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보다 더 감사하고 기쁜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날을 회개의 날로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고,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그 하나님은 마침내 심판자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오셨던 주님께서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지할 것은 주님의 보혈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주님, 제게 비록 허물이 많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 입어 선하고 진실하고 바르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쓴 것을 아시지요? 주님의 기준에는 너무도 못 미치겠지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은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렇게 살지 않으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2018년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결단해 보시면 어떨까요?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늘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고후 2:17)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시 19:14) 소망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위 글은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김영봉 목사) 2018년 12월 23일 예배 설교문(제목: 진실로 믿는가? / 본문: 누가복음 1장 46-56절)입니다. 김영봉 목사의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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