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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프다
김영봉 목사 7월 22일 주일 설교
  • 김영봉 (bong-320@hanmail.net)
  • 승인 2018.07.24 12:51

1.

지지난 주간 저는 두 번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 교우의 따님 장례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저와 함께 사역하던 후배 목사님의 장례식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일찍, 너무나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 아프게 떠나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은 오열과 통곡을 하기도 하셨고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기도 하셨습니다. 설교를 맡은 분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이르고 아픈 죽음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가족들이 당한 아픔과 슬픔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두 번의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 번 절감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픈 것이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안 보일 뿐입니다. 누구는 더 아프고 누구는 덜 아플 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삶의 질서가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진 이후로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 상실과 고통은 인생이라는 패키지에 옵션이 아닙니다.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난 인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여 우리 모두가 변화되기 이전까지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시대가 흘러갈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던 질병들은 하나씩 점령되어 가고 있는데, 마음의 질병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신과 계통의 약물 판매가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한 것이 벌써 반세기도 넘었는데, 그 추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개인주의화한 생활 패턴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바깥에서 상처 받고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가족이 좁은 공간에서 모여 살았기에 누군가는 그 문제를 알아차리게 되어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 각기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산다 해도 다 각기 제 일에 바빠서 서로의 얼굴 표정을 읽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품어 안을 수밖에 없고, 품어 안은 상처는 속에서 곪아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술 문명은 우리 마음의 질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현대 기술 문명의 발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과 관심을 외부에 돌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태어나는 아이들은 그냥 두면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에 눈을 박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ADHD(주의력결핍장애)가 15%나 증가했다는 통계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내면을 돌아볼 여유 없이 외부의 것들에 붙들려 살게 만드는 것이 현대 문명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늘 우리 사회는 우리를 성공과 성취를 향해 질주하도록 몰아세웁니다. '조금만 더'라는 잡을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어릴 때부터 숨이 차도록 달리게 만듭니다. 그로 인해 우울증 환자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만 따져도 15세부터 24세 사이의 청소년들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매년 50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매일 20명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뜻입니다. 1960년대에 비해 세 배가 늘어난 것이라고 하니 앞으로는 얼마나 더 심해지겠습니까.

이렇듯, 우리의 마음의 질병은 심각하고 마음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다양하고 또한 많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을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릅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우리가 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기억해도 사는 것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2.

요즈음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의 한계를 거듭 시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대면하면 어김없이 얼음 같은 눈빛과 비수 같은 말로 상처를 후벼 파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때로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교회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경우에는 매우 괴롭습니다.

그럴 경우, '저 사람도 아픈 사람이다'라고, 혹은 '저 사람이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그렇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상처 되는 말과 행동을 더 많이, 더 쉽게, 더 자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라는 영성 작가가 상처와 아픔에 대해 기억할 만한 말을 했습니다.

"상처는 전환되지 않으면 전이된다(If you don’t transform your suffering, you will transmit it)."

누군가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에 아픈 말과 행동을 할 때 그것을 나를 향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상처가 나에게 전이됩니다. 그러면 나도 그 사람과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처가 나에게 전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당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차가운 눈빛과 거친 말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면에서는 상처가 곪아서 푹푹 썩어 가고 있는데, 겉으로는 너무도 괜찮은 사람으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항상 웃는 사람, 누구에게나 잘하는 사람, 어떤 일에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만, 상처를 감추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줍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을까요.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나을까요.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품에 안고 스스로를 질식시키며 사는 것이 나을까요.

둘 다 안 좋습니다. 둘 다 결국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아우르는 인기 있는 영성 작가입니다. 그는 무능한 아버지와 유능한 어머니 아래서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냉정한 분으로,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엄하게 키웠습니다. 그래서 브레넌은 어머니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브레넌은 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의 사건을 경험합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냉담함에 대해 대놓고 불평했다가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입니다. 할머니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정도로 심했다고 하지요.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브레넌은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작심합니다. 그것을 브레넌은 '거래했다'고 말합니다. 브레넌은 그때의 마음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나 자신과 한 거래 때문에 나는 성인기의 대부분을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경이로움도 느끼지도 못하며, 자기 존중감도 없이 지내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략) 슬플 때는 기쁜 척했고, 실망했을 때는 흥분한 척했고, 심지어 속으로는 정말로 화가 났는데도 상냥한 척했다. 내 모습과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사기꾼으로 살았다. 그러나 사기꾼으로 살면 해롭기만 할 뿐이다." (<모든 것이 은혜다>, 61쪽)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자꾸 말썽 부리고 자주 심사를 뒤집어 놓는다면 다행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의 자녀가 늘 착하고 늘 말 잘 듣고 늘 고분고분하다면 그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 아이도 브레넌처럼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스스로와 거래를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혹은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흉한 모습으로 드러낼 상처를 품고 연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연극을 너무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수십 년을 산 사람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상처를 철저히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곁을 떠나갑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다 아픈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진실로 그 사람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울증이 현대판 흑사병이 된 이 시대를 사는 지혜 중 하나입니다.

3.

진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나도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마 7:3-5).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꺼내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처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에 있어서 심한 사람이 있고 조금 가벼운 사람은 있지만,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상처를 대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에 대처할 수 있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나는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하게 될 것입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것을 대면하기가 두려워집니다. 상처가 만들어 내는 아픈 말과 행동을 자신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듭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주변에서 고립되는 자신을 보고 좌절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대면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 괴물과 싸워 이길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중독으로, 때로는 폭언으로, 때로는 폭행으로 도피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해서는 안 될 불행한 선택을 합니다.

산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유한한 존재들이며 모두 상처 입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깨어진 존재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지는 것, 넘어지는 것, 실패하는 것,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하여 잘 살던 자녀 중 하나가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잘 자라던 아이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 어느 날 사랑하는 자녀가 동성애자임을 고백할 때, 혹은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가던 자녀가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부모님들이 그러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나의 인생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나도 아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아픔과 고통을 피하고 살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힘써야 하지요. 그러나 고통에 있어서 예외는 없습니다. 인생은 공평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는 상처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상처 그리고 앞으로 받을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지 않도록 길을 찾아야 합니다.

4.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상처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고, 외로울 때 외롭다고 말하고, 울어야 할 때 울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상처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세익스피어가 했다면서 이런 글을 인용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우는 사람은 하수다.
어려움을 당하여 참는 사람은 중간이다.
어려움을 당하여 웃는 사람은 고수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원전을 찾아 읽고 싶었습니다. 인용된 글만 보면, 세익스피어가 인생을 이렇게도 몰랐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하고 보니, 어려움을 당하여 참는 사람이 제일 하수입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웃는 사람은 고수가 아니라 정신 나간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우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그렇게 무너져 운 다음에야 진실로 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다른 한국 남성들처럼 '남자는 세 번 운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버스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팔목이 찢어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세 바늘을 꿰매야 하는데, 마취할래? 참을래?" 저는 그 질문이 "너 진짜 남자냐?"라는 질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참았습니다. 끝나고 나서 의사와 간호사가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남성다움을 확인받은 것으로 인해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렇게 강해지려고 하다가 결국 부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받아야 하는 모든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이를 악물고 속으로 쌓아 놓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부러지고 맙니다.

앞에서 저의 '센 이야기'를 했으니 저의 '약한 이야기'도 하나 나누지요. 2년 전, 11년 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환송 예배에서 정들었던 교우들과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돌아왔는데, 마음이 허전하여 그냥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깥이 아직 밝았기에 산책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아내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더니, 피곤하다고 혼자 가랍니다. 야속했지만 홀로 숲을 걸었습니다.

그 숲길의 끝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을 걷다가 호숫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앉아 있는 제 뇌리에는 11년 동안의 목회 여정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지나갔습니다. 1000명이 넘는 교인들과 11년 동안 지냈으니 무슨 일은 없었겠습니까. 좋은 일도 있었고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뿌듯한 보람을 느낄 때도 있었고, 견디기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위기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굴곡을 지나 큰 실수 없이 사역을 마치게 된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 안에서 무엇인가 뜨겁고 강력한 것이 솟아올랐습니다. 11년 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제 내면의 아이가 고개를 쳐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 아이는 저를 제압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저 너머에 있을 어머니를 향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나 잘했지? 씨, 이만하면 잘 참았지? 잘 견뎠지? 그렇다고 해 줘, 엄마. '내 아들, 잘했다. 참 장하다'고 말해 줘!"

이렇게 말할 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내가 따라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나가던 노인 부부가 저에게 찾아와 "Are you okay?"라고 물어볼 정도로 온몸을 흔들며 울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교인들이 저를 괴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몸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는 어른 흉내를 내느라고 저의 내면에 쌓인 상처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교회의 목사로 행세하느라 내면에 쌓였던 피로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목사였기에 언제나 져야 했고, 언제나 참아야 했고, 언제나 의연해야 했고, 언제나 침착해야 했고, 모든 상처를 품어 안아야 했던 11년의 쓰레기가 고스란히 비워진 것입니다.

실컷 울고 났을 때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납덩이 같은 무엇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채워진 것 같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제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그때 제 내면이 비워지고 제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위로를 받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이렇게 아이처럼, 소녀처럼 무너져 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상처에 정직해지십시오.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강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약해져야 할 때 약해지는 것이 진실로 강한 것입니다. 특히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오신 남성 교우 여러분, 약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성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때로는 무너져 내려 통곡해야 합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절규해야 합니다. 그것은 약한 것도 아니고 불신앙적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5.

나의 내면에 있는 상처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마음에 있는 감정들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통곡해야 할 때 통곡하고, 원망이 치밀어 오를 때 원망하고, 쓴 물이 올라올 때 그 쓴 물을 뱉어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시편을 통해 배우는 기도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장된 찬양과 감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진정한 상처의 치유는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입을 때 시작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야만 상처가 치유될 수 있고, 상처를 전이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이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상처는 대개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숨기고 있는 한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두렵지만 치유를 위해 용기를 내어 믿을 만한 사람에게 꺼내 보여야 합니다. 이민 사회에는 다른 사람들의 입이 무서워서 자신의 상처가 알려질까 두려워 쉬쉬하며 사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지켜야 할 체면이 너무 커서 그럽니다. 체면을 지키려 하면 내면이 망가집니다. 체면 불구하고 상처를 내어놓는 사람들은 내면의 건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체면 구기는 일로 생각하는 일들이 여럿 있습니다. 자녀가 겪는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 질환, 마음의 질병으로 발생하는 마약 중독 혹은 자살이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특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이런 일을 만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합니다. 체면에 목숨 걸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요.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취하는 경우 "아파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울증이 깊어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암으로 투병하다가 죽은 것과 본질상 같습니다. 자녀가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을 때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수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도 최근에 우울증이 재발되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러십니다. 우울증이 깊어지면 '나만 없어지면 돼!'라는 생각이 너무도 강하게 든다고. 다행히 10년 전에는 그 위기를 넘겼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십니다. 그런 상황에 이르면 정상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살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자살로 10년도 넘게 계속 고통받고 있는 가족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그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동안 여러 여성을 사귀었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야기만 하면 헤어져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못 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 결혼하게 된 자매를 만나서는 작심하고 첫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요. 그랬더니 그 자매가 그것을 아픔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기적을 얻었습니다.

자살은 이렇게 남겨진 가족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남깁니다. 그렇기에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이 깊어진 상태에서는 그런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죽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흉이나 수치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남이 알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고백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 자신의 상처를 내어놓고 서로 기도해 주며 품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교회는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더 많은 상처를 겪게 만드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민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교회를 찾아야 옳은데,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교회를 떠납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치유의 공동체가 되기를 진실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기억하십시다. 모두 아픕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내 자신의 상처에 정직해지십시다. 약해져야 할 때 약해지고 무너져야 할 때 무너지고 울어야 할 때 우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믿음의 형제 자매 앞에 내놓기를 주저하지 마십시다. 바울 사도가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인생 여정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아들이고 또한 그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연결 고리가 나에게서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 상처를 알기에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숨기고 있는 상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 나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 땅의 모든 상처 받은 심령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봉 /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목사

위 글은 버지니아 와싱톤사귐의교회 김영봉 목사의 7월 22일 주일예배 설교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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