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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비신자, 종교적 신자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신앙 성숙의 기준
  • 정신실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8.31 15:06

집에 무신론자가 하나 있다. 한번씩 확고하게 표명하곤 한다.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나는 신은 없다고 생각해." 말과는 달리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간다. 열여섯 나이에 맞게 주일학교 수련회를 즐거워하고 또래와 어울리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인데 철이 들어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이후로 한결같이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 이 말에는 대체로 울분이 깔려 있다.

나는 그 울분을 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직장 생활 하는 엄마를 대신해 낮의 엄마가 되어 주신 할아버지이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으시고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거의 매일 저녁 할아버지를 찾았다. 아이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지만, 함께 기도하자는 어른들 말을 따랐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우리 모두 그날이 마지막인 것을 알지 못했던 그날)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가 타신 휠체어를 밀고 병원 뜰을 산책하던 아이는 풋매실 두 알을 땄다. 하나는 할아버지 것으로, 하나는 제 것으로. 다음 날 임종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 내내 아이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도통 모르겠다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사촌 누나들 사이를 배회하곤 했다. 다음 해 여름, 매실청을 담그려고 손질하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내가 할아버지 병원에 계실 때 매실 따서 드린 거 알아? 엄마랑 아빠랑 병원에서 울고 있을 때 내가 혼자 할아버지 침대에 가봤는데 내가 드린 매실이 있었어. 내 주머니에도 매실이 있었어. 매실 두 개를 다 밖에다 던져 버렸어. 화가 나서 던졌어."

슬픔 대신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몇 년 후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많은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그해 봄과 여름 간간이 광화문에 피케팅을 나갔다. 주목받는 것을 몹시 힘들어하는,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광장에 섰다. 손수 만든 피켓에는 "세월호에 있던 형과 누나들이 불쌍해요. 엄마 아빠들이 불쌍해요. 진실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엄마의 제안에 고민 끝에 수락한 것이지만 이렇듯 내향적인 아이가 피켓을 들고 광장에 섰다는 것은 큰 용기였다.

아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더 강력하게 피력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찾아보면서 자기 확신을 굳혀 가는 것 같았다. 영화 '피아니스트 The Pianist'(2002)를 보고 나오더니 거실의 카펫을 발로 차고 심술이 난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어. 이런 일을 겪고 어떻게 하나님이나 신 같은 걸 믿을 수 있겠냐고. 연예인이 한 사람 죽어도 우리가 그렇게 충격을 받는데. 세월호에서 삼백몇 명이 죽고 우리가 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라는 걸 믿을 수 있어. 하나님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부재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끔은 여러 말로 아이와 논쟁도 해 보지만 나는 나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더듬어 보면 수년 전 호스피스에서 매실 두 알을 팽개치던 그때, 어쩌면 아이는 할아버지를 고쳐 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하나님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스캇 펙에 의하면, 이 아이는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적이진 않은 아이이다. 스캇 펙은 신앙 성숙의 복잡함을 이해하기 위해 영성과 종교, 두 용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종교는 "특정한 신조를 가지며 그에 합당한 자격의 한계를 정하고 있는 믿음의 구성체"로, 영성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을 인용하여 "만물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라 정의하였다.

기독교적 신조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그에 따른 종교적 행위도 미미하지만 최소한 더 높은 힘을 향한 갈망은 큰 아이이다. 1년에 성경을 몇 회 통독하고 수십 년 새벽 기도를 이어 오는 신자가 누구보다 편협하여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면, 그는 종교적이긴 하나 영적이진 않은 것이다. 이 시대 개신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종교적일 뿐 영성은 없는 사람들이 만든 편협한 하나님일지도 모른다. 무신론자 아들에게서 "만물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힘"을 찾는 구도자로의 면모는 충분히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종교 중독에 가까운 신앙을 가진 나. 일찍이 종교의 옷을 입고, 옷이 나인지 내가 옷인지 하고 살았던 내게 "하나님은 없다"는 아들이 나오다니. 사실을 말하자면 철렁 내려앉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받아 온 의무로서의 신앙 교육이 싫어서 다르게 키워 보자는 마음이 있었지만 말이다. 매일 저녁 의무로 하는 가정 예배가 싫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패밀리 데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과 놀다 춤추다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었다. 대림 시기에 맞춰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한 주 한 주 대림초에 불을 밝히며 그분의 오심을 기리곤 했다.

대놓고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일상에 스민 하나님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내심 기대도 컸고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 교육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제 스스로 성경을 찾아 읽을 날이 있겠지. 제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할 날이 있겠지. 기대와 달리 더욱 회의론자가 되어 가는 아들이다. 스스로 큐티를 한다거나 수련회에 가서 뜨겁게 기도했다는 주변 아이들 얘길 들으면 옆집 아이 성적 오른다는 얘기처럼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지기도 했다. 이러다 정말 아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영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느 주일 예배 시간, 이 찬송을 부르다 갑자기 목에 메였다.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늘 끝날까지 주소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가 구원의 능력을 입을 수 있을까. 이 아이의 신앙은, 그리고 나의 신앙은 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일까.

신앙이 좋다는 것, 성숙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발화 빈도수가 그 척도일까. 새벽 기도 출석률이 신앙 좋음과 비례하는 것인가. 아니면 술 담배 끊고 십일조를 하게 되었다? 영적으로 자라는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스캇 펙은 영적 성장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한 정신의학자이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동안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고 한다. 어려움에 부닥친 많은 종교인이 찾아와 치료 과정을 끝낸 후에 흔히 무신론자·불가지론자·회의론자가 되는가 하면, 고통에 처한 무신론자·회의론자가 치료 후에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같은 치료사가 같은 방법으로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종교적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경험을 통해 스캇 펙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인간의 영적 생활에는 검증할 수 있는 단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스캇 펙의 영적 발달 4단계를 길게 인용하려 한다[<스캇 펙 박사의 평화 만들기>(열음사)].

1단계는 혼란스럽고 반사회적인 단계이다. 실질적인 믿음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훈련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혼란스러움'이다. 자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하는 척한다 해도(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남을 조종하려 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2단계는 형식적, 제도적인 단계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여기 속한다고 하는데, 이 단계 특징은 종교 형식에 대한 집착이다. 따라서 제도적, 또는 형식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외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로 바라보며, 내면에 존재하시는 성령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 단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거대하고 친절한 경찰'이라고 한다.

3단계는 회의적이고 개인적인 단계이다. 더는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이다. 개인적이긴 해도 1단계처럼 반사회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자주 사회적 대의에 깊이 투신한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회의적'이다. 더욱 진보된 3단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문제에조차 회의적이지만 분명 2단계에 만족하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더 발달했다고 스캇 펙은 말한다.

4단계는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이다. 가장 성숙한 영적 단계로, 이 사람들은 이성적이지만 이성을 맹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품은 의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와 타자, 모든 피조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에 '공동체적'이고, 신성한 것을 향한 인식이 열리고 신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의미로 '신비적'이다.

스캇 펙은 단계들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각 단계와 단계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대개는 이 단계 저 단계 왔다 갔다 한다. 실제 단계보다 더 앞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외형적으로는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믿음의 발달을 시작하지도 않은 1단계일 수도 있다. 회의론자로서 교회 개혁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은 3단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자기 뜻대로 하고 단지 남을 조종하려는 반사회적 마음의 동인에 따른 행동일 수도 있다. 회의론자인 양 행동하고 선망하지만, 내적으로 누구보다 형식적·종교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각 단계에는, 단계별 사람들의 취약함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는 지도자도 있을 것이다. 2단계 사람들의 '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담보 삼아 헌금과 헌신을 강요하는 지도자들이 있을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속 시원한 날 선 비판으로 3단계 회의론자들의 귀를 잡아당기지만, 실제 동인은 자아도취와 이기심인 지도자가 있을 수 있다. 삶과 신앙의 원리를 통달한 것인 양, 신비가를 자처하여 시대의 목마른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영적 지도를 가장한 이러한 농간을 통해서도 어떤 사람들의 신앙이 자라게 된다는 점이다.

누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그 누가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단계마다 틈입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삯꾼 목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다 변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을 통해서도 믿음을 전수받는 사람이 있으니 그 신비를 어찌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말은 그 삯꾼들에게 돌려줄 일이다.

영적 성숙을 향한 갈망이 컸던 내게 이렇듯 검증 가능한 영성 발달 단계는 위로였다. [스캇 펙 이전에는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의 발달 단계>(한국장로교출판사)가 있었다. 스캇 펙은 파울러의 연구를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누구에겐 유치하겠지만 가장 큰 위안은 그런 것이다. 기도 중에 뭘 그렇게 잘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기도해 보니까, 너 요즘 힘들구나." 하는 말을 건네 오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요즘 힘이 든다. (힘들지 않은 날이 어디 있다고!) 흔히 말하는 '영빨'이 센 사람들이다. 그 주관성의 폭력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 깊은 차원의 기도,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갈망하는데, 내게는 그런 '영빨'이 1도 없으니 말이다.

내 영성이 제대로 가고 있나 싶기도 하고. 예수님 시대부터 사람들은 표적을 구했고, 나 역시 어리석은 그들의 후손이라 성숙에 대한 뚜렷한 지표를 갈구했었다. 스캇 펙이나 제임스 파울러가 주는 위안은, 종교적이며(2단계) 동시에 의심하고 회의하는(3단계) 어쩌면 지독한 이기주의로 반사회적이기도 한(1단계) 나도 그럭저럭 잘 가고 있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스캇 펙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가 각기 다른 영적 발달 단계에 있다는 점은 공동체를 방해하기보다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높은 발달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이전 단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 로어는 어떤 사람이 현재 영적 단계가 참으로 이전보다 더 성숙한 단계인지 알아보는 리트머스는 그 이전의 모든 단계를 존중하느냐 아니냐 여부에 있다고 했다[<벌거벗은 지금 >(바오로딸)]. 그러니까 기도가 조금 깊어졌고 신앙의 다른 차원을 깨닫게 됐다고 하여 어떤 이의 기도를 기복적이라 손가락질하거나 저급한 신앙으로 단정 짓고 있다면 그리 멀리 오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편이 낫다.

스캇 펙과 제임스 파울러, 리처드 로어를 소환하여 길게 떠들어 댔지만 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가는 그 여정을, 그 자신과 하나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놀라운 일이 있었다. 회의론자 아들이 뜬금없는 고백을 한 것이다. 아이의 마지막 말처럼 모를 일이다. 오직 모를 뿐이다.

"엄마, 내가 원래 하나님을 안 믿잖아. 알지? 내가 목사 아들이지만 교회는 원래 다녔으니까 그냥 다니는 거고, 예수님을 믿어서 다니는 건 아니라는 거. 그런데 실은……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어, 실은…… 엄마, 나 요즘 기도해. 뭘 해 달라 이런 기도는 아니고. 그냥 굉장히 모순적인 기도를 해.

말하자면 나한테 믿음이 없잖아. 아씨, 나 믿음, 은혜 이런 말 싫어하는데……. 아무튼 내가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되거든. 그런데 그 기도를 내가 아직 확실히 믿지 않는 하나님에게 하는 거야. 말이 안 되지? 사실 믿고 싶어서 기도하는 건 아니야. 나는 아직도 하나님이 있다는 걸 안 믿어. 그런데 안 믿는 하나님에게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걸 하고 있다니! 이런 모순적인 기도를 계속해야 하나?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기도하게 됐는지……."

정신실 작가가 '신앙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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