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여러 번 되작거리며 읽었다. 설교에 관한 목사님의 생각을 공감하기도 해서지만 개인적으로 설교 강단을 떠날 때쯤 이런 책 한 권 써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였다. 김영봉 목사님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김동호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규장)에 맞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IVP)란 책을 발간했던 2003년 즈음이었다. 흔히 말하는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이었다. 그 이후 <사귐의 기도>(IVP)를 통해 다시 기도의 본질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을 접했다. 그 어간에 <기독교사상>에서 '다시 기도를 생각한다'는 특집이 꾸려졌는데 거기에 김영봉 목사님의 글과 손끝 무딘 본인의 글도 함께 실렸다. 목사님은 글을 통해 사귐의 기도를 한 번 더 강조하셨고, 본인은 '통성과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기도 형식을 살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님의 글을 읽다 보면 늘 생각의 결이 비슷해서 외로운 길을 걷다 좋은 길동무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

<설교자의 일주일>(복있는사람)은 학자가 쓴 설교론과 목회자가 쓴 설교론이 어떤 차이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것도 10년 동안 학교 강단을 경험했던 목회자가 쓴 설교론이어서 비록 목사님이 설교학 교수는 아니었다 하여도 학자적 기풍과 목회 현장이 만나 책의 깊이를 더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설교와 관련된 책은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책을 열어 보면 눈이 쉽게 가지도 않고 솔직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외국에서 유행하는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진열해 놓기도 하고, 여러 학자의 주장을 짜깁기해 놓기도 해서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라고 중얼거리기 일쑤이다. 설교에 대한 통찰과 한국적 상황에서 갖는 목회적 고민을 적확하게 밝히는 책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설교자의 일주일>은 설교의 현장과 설교자의 삶 그리고 설교 본문이라는 세 기둥을 세워 튼실한 설교론을 구축하고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목사님이 평소에 품고 있던 벽돌 같은 설교 철학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것들 하나하나는 설교를 고민하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마음에 새겨야 할 '꿀팁'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의 일주일>은 단순한 '설교론'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설교 목회론'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황홀한 글 감옥>(시사IN북)에서 조정래는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삼다(三多)'를 해야 하는데 이는 '많이 읽고(多讀), 많이 생각하고(多商量), 많이 쓰라(多作)'고 권한다. 많이 읽고, 많이 읽은 만큼 생각하고, 비로소 글을 쓰는 것 말고 좋은 글을 쓸 재간이 없다는 충고이다. <설교자의 일주일>을 그렇게 읽고, 읽은 만큼 생각의 시간을 채우면 읽는 이들의 설교가 더 단단히 여물어 깊이를 더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군데군데에서 목사님으로부터 필독서를 소개받는 것은 책의 내용과 함께 또 하나의 감사거리이다.

<설교자의 일주일> / 김영봉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438쪽 / 1만 9,500원

<설교자의 일주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는 '설교자와 말씀 사이'라고 제목 붙인 '에토스'인데 설교자의 '윤리'와 '성품'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설교자와 회중'이라는 '파토스'로, 설교자의 '정서'와 '감정'을 가리킨다. 셋째는 '설교와 본문 사이'라는 '로고스'인데, 설교의 '논리'와 '이론'을 뜻한다. 글의 진행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따르지만 그 안에는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품성과 정서와 논리가 잘 정리되어 있다. 설교와 연설이 같을 수는 없지만 말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면에서 적잖은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점을 책은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에토스, 설교자와 말씀 사이

"말하는 사람의 품성이 믿음을 주는 데 있어 최고의 힘"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설교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성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지속적인 영적 훈련을 통해 "삶이 설교의 주석"이 되고, 에토스로부터 로고스가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78쪽). 책은 진실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 탐욕에서 벗어난 바른 사귐의 기도가 무엇이며, 피상성과 분주함을 벗어나 마음을 다하는 관조적 삶이 어떤 것인지,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샘을 파듯 파고드는 성경 묵상'(115쪽)이 무엇인지를 간곡한 마음으로 전해 준다. 샘을 파는 성경 묵상은 '발효 과정' 혹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행위'(305쪽)로 표현된다. 가르치지만 가르침을 받지 않는 설교자들을 향한 일갈이다(롬 2:21). 거룩한 에토스의 적들을 리처드 포스트의 책 제목과 같이 <돈 섹스 권력>(두란노)으로 꼽았는데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설교자 내면이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만이 우리를 헛된 거짓 사랑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다.

파토스, 설교자와 회중 사이

말은 사람의 마음과 정서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말하는 파토스의 문제이다. 듣는 사람의 감정이 어떤가에 따라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설교자의 마음이 건강하고, 상처가 있다면 바르게 치유되어야 건강한 복음적 파토스를 간직할 수 있다. 그래야 말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고 설교자를 위협하는 '당연시'(매너리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199쪽). 설교자의 정서와 감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어떻게 회중의 정서를 배려하며 공감해야 하는지를 체감된 목회 현장의 이야기와 함께 들려준다.

로고스, 설교와 본문 사이

로고스는 '논리', '이론', '학문'을 뜻하는 말인데 말의 어휘, 표현 방식, 논리 등에 관한 것이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로고스보다 그 중요도에 있어 앞서더라도 좋은 에토스와 파토스에 정연한 로고스가 더해지면 말의 힘은 한층 강력해진다(259쪽). 로고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설교 본문과 얼마나 성실히 씨름하는가이다. 본문을 성실하게 연구하고 애타게 묵상한다면 설교의 형식과 외피는 어떠하든지 말씀의 수맥이 터지게 될 것이다. 책은 여러 유형의 설교가 갖는 장단점을 비교하여 언급하지만 본문을 대하는 설교자의 태도를 가장 강조한다. 그렇다고 설교의 형식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예화나 유머를 사용하는 것과 설교문을 작성하는 법, 소수자에 대한 배려, 설교의 피드백과 특별히 말을 표현하는 딕션(diction)까지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요소들을 가볍지 않게 다룬다.

김영봉 목사님은 책을 통해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꺼림칙한 일들을 슬그머니 감추지 않을 뿐 아니라, 설교자들의 아픈 약점을 작심한 듯 발라내서 독청독성(獨淸獨醒)하게 보일 수도 있다. '회개가 추억이 된 설교'(97쪽)와 '설교 재활용'(62쪽)의 문제(이것을 책 말미에는 '자가 표절'이라 했다)가 그렇다. 또한 사례비에 대해서 교회에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과 심방 혹은 목회 활동의 대가로 주는 사례비를 사양한다는 것, 부흥회나 강연회에서 받은 사례비조차 교회 헌금으로 드리는 것(152쪽) 등이 그렇다. 또한 감정을 조작하는 설교에 대한 경고(174쪽), 자신의 설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는 것은 목회자 자신의 열등감 때문이라는 것(397쪽), "목사도 사람인데"라는 말로 자신을 적당히 합리화하지 말라(125쪽)가 그렇다. 어떤 이들은 작고 힘든 교회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 담임 목회자의 젠체하는 이야기라고 이죽거릴 수 있다. 당연히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바른 원칙과 원리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맥없이 관성으로 굴러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는 되지 않을까. 그만치에 김영봉 목사님의 생각과 글이 놓여 있다. "상황을 핑계 삼지 말고 부단히 길을 찾으라"(404쪽). 가슴 깊이 쏘는 말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서중한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다빈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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