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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는 살아 있는 삶이어야 한다
[서평] 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새물결플러스)
  • 크리스찬북뉴스 (cbooknews@naver.com)
  • 승인 2017.10.18 17:07

거두절미하고, 삶과 상관없는 교리는 버려야 한다. 삶에서 교리를 배제하려는 신학자는 신학자가 아니다. 교리는 삶이고, 삶은 곧 교리다. 그러니 교리와 삶은 불가분의 관계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삶의 두 가지 양태다. 삶과 상관없는 신학을 듣고, 신학책을 읽고 사람들은 독백처럼 주절거린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나와 신학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성경은 믿음의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고,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에서 기록되었다. 그런데 신학이 신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니 신학이야말로 삶을 위해 필요하고, 신학은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신학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도로시 세이어즈는 "설교자가 교리를 너무 강조해서 교회가 텅 비게 되었다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듣곤 한다"며, "그런데 사실은 그 정반대다"라고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교리를 너무나 재미없게 그리고 무의미하게 재잘거리는 것에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리는 참으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고 부를 만한 것"이라고 말한 세이어즈의 말은 참으로 타당하다. 이제 교리가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시대와 역사 속에서 흘러갔는지를 살핀 한 권의 책이 나왔다. 교리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만한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말이다.

<송영의 삼위일체론 - 경배와 찬미의 신학> / 이동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00쪽 / 1만 5,000원

삼위일체가 주는 교훈

삼위일체 교리는 왜 흥미진진한 것일까. 저자는 1장에서 명료하게 규정한다. 먼저 "신학은 곧 신론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진행되며,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종결되는 것"(17~18쪽)이기 때문이다. 신론은 다시 '삼위일체론'으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태초에 고독한 일위의 신이 아니라 사귐과 교제 가운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 삼위의 신"(20쪽)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다시 '송영'으로 정의된다. 신학, 곧 신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탄하고 찬양하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21쪽)이다. 경배되지 않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하늘 위에 무정(無情)하게 독존(獨存)하는 하나님을 연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창조된 시공 속에 개입하시고 참여하시며, 적극 피조물들과 소통하신다. 하나님은 찬양받기를 원하시며, 피조물을 마땅히 찬양해야 한다. 세이어즈가 말한 대로 삼위일체 교리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인 것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더하면 모두 20장으로 구분했다. 필자의 견해로 에필로그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실천에 관하여'란 제목을 가진 이 대목은 이 책의 핵심이자 저자가 개진한 모든 본문의 결론에 해당된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 책은 1장부터 18장까지 연이어 있다. 차라리 3부 정도로 나누어 장을 할당했다면 좀 더 명료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비슷한 내용이 여러 곳에서 뒤섞여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필자의 소견상 3부로 나누면 이렇다. 먼저 1부는 1장부터 6장까지로 서론 부분에 해당되며 삼위일체론의 개론에 해당된다. 2부는 7장부터 17장까지이며, 교회사 속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두 관점을 다룬다. 마지막 18장은 삶에서 어떻게 삼위일체 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살핀다. 결론은 다양성, 일치성, 상호 관계성, 사귐, 봉사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적용점을 제시하고 마무리한다. 다양성은 삼위에서, 일치성은 본질에서, 상호 관계성은 삼위의 관계와 인간과의 사이에서, 사귐은 상호 관계성의 사이에서, 봉사는 삼위의 만물에 대한 것에서 찾는다.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부터 계시된 교리"(277쪽)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개입은 삼위일체로 나타나며, 피조물은 삼위일체적 구원 방식을 따라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저자는 초대교회로부터 중세와 종교개혁, 근현대에 이르는 삼위일체 교리의 변화를 추적한다. 1장에서 실천적 삼위일체론의 의미를 규명한 다음 2장에서 하나님의 신 지식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누구시며 또 어떠한 분이 되시고자 하는가에 대한 지식"(34쪽)이라고 정의한다. 즉, 신 지식은 관계성 속에서 획득되어야 한다.

3장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신론 차이를 명징하게 설명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거룩하다. 신약에서는 내재성이 강조되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드러나신다. 구약과 신약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다른 하나님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다른 존재 방식일 뿐이다. 4장부터 이어지는 본격적인 말씀과 경험, 내재와 경륜의 삼위일체론은 교회사 속에서 왜곡되고 오해되었던 두 관점을 분석한다.

하나의 관점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적 신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다. 저자는 유일신적 신론을 "전제군주적 일신론"(70쪽)으로 명명한다. 전제군주적 일신론은 그리스 철학이 영향을 받은 서방 교회가 추구한 신론이다. 이러한 신론은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지고, 다시 20세기에 칼 바르트 신학에 스며든다. 7장에서 가톨릭 교부 학자인 드 레뇽의 주장을 가지고 들어와 동서양 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차이를 비교한다.

"서방 신학은 먼저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그 자체로 다룬다. 그리고 난 후 구체성들(세 위격들)을 추구한다. 반면 동방 신학은 먼저 구체성들(세 위격들)을 다루고 나서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찾기 위해 이 구체성들을 파고든다. 서방세계는 위격을 본질의 한 양태로 간주하지만 동방 세계는 본질을 위격의 한 내용으로 간주한다." (레뇽, 81쪽)

면밀하게 이어지는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서방 신학은 본질에서 시작하여 삼위로 나가고, 동방 신학은 삼위에서 출발하여 본질로 나아가는 형태이다. 이러한 사색 방식으로 인해 서방은 삼위를 양태론적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아지고, 동방은 삼신론에 빠질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교부들의 이러한 오류를 가장 균형 있게 정리한 교부가 바로 갑바도기아 교부 중 한 명인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이다. 어거스틴은 그레고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받아 가장 명확하게 삼위일체를 규명하기에 이른다.

바른 삼위일체는 "본질의 하나 됨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고, 삼위의 구별을 위하여 본질의 하나 됨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178쪽)이다. 비록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다양성과 일치성, 내재와 초월 가운데서 약동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영광의 신비를 침묵 가운데서 묵상하며 찬양"(180쪽)하는 것이다.

교리는 독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필요는 하나님의 필요이며, 또한 인간의 필요이다.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협력과 합의, 교제와 사귐의 방식으로 구속의 드라마를 역사 속에서 성취해 가신다. 그러므로 교리는 하나님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찬양과 경배의 이유인 것이다. 저자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야말로 삼위일체 교리를 포함한 모든 교리의 근원이요 모태라"(227쪽)고 단언한다. 삼위일체는 경배의 대상임과 동시에 성화의 모델이다. 성화는 개인적 거룩에 머물지 않고 삼위일체적 모범을 따라야 한다. 앞서 언급한 저자의 결론, 다양성, 일치성, 상호관계성, 사귐, 봉사의 다섯 가지 삶의 형태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성화는 개인에서 관계로 확장되어야 마땅하고, 관계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맞다. 진심으로 교리는 살아 있는 삶이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실천적이어야

결론을 내려 보자. 삼위일체는 실천적이어야 한다. 교리는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충분히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삼위일체는 모호함과 해독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지만 역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끈다. 저자는 이런 부분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이론적인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성경신학이 약하다는 것이다. 한 장을 할애하여 성경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다루었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약점은 교리사의 논쟁을 길게 다룬 반면 사회적 참여와 삶으로 삼위일체를 다룬 부분이 한 장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부분을 줄이고 사회참여와 성경신학적 사색을 더 넣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가 아니라 책이 전체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강하고, 그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또한 칼 바르트와 같이 한 인물의 장단점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다 다른 부분에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몰아세운다. 차라리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에 관한 개론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논지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부분을 적절하게 수긍하던지 비판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신학자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반이 넘어가면서 불필요한 반복이 이어져 여러 곳에 기고한 논문을 수정 없이 덧붙여 놓은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힘들었다. 책의 주제와 논지는 명확하고 참신하다. 다만 중첩되는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이 좀 더 추가되어 완성도를 높였으면 하는 바람 적지 않다. 다음에 개정판이 되어 나온다면 꼭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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