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아트뮤지엄 입구에 있는 조형물. 십자가, 기도하는 사람 모양을 비롯해 기독교 관련 기호가 새겨져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차를 타고 산기슭 도로를 가로지르다 보면 수백 개 조각상으로 가득한 미술관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미술관을 표방하는 'C아트뮤지엄'이다.

C아트뮤지엄을 설립한 이는 원로 조각가 정관모 교수(성신여대 명예)다. 기독교 예술 발전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에 2006년 7만 평 부지를 매입해 C아트뮤지엄을 설립했다.

대표작은 대형 예수 얼굴상이다. 폭 15m, 높이 15m에 이르는 철제 조각상으로, 받침대까지 합치면 높이가 22.5m다. 예수 얼굴 조각상 중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정 교수와 용접공 5명이 만드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대형 얼굴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대다수 조각가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죠. 처음에는 자화상을 조각하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교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수님이 임종하기 직전 모습을 상상하고 표현해 봤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독백을 내뱉은 그 순간이요. 모든 고통이 지나가고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배제된 상태를 나타냈어요. 영원한 평온함으로 임하는 모습을요."

C아트뮤지엄은 대형 예수 얼굴상을 포함해 조각상 1,300점과 그림 200여 점을 전시한다. 대다수가 정관모 교수 작품이다. 예수의 부활, 십자가, 평화, 사랑, 요나 이야기와 출애굽 사건 같은 성경 속 일화 등을 현대미술로 재현했다.

C아트뮤지엄에 있는 대형 예수 얼굴상. 높이가 22.5m. 십자가에 달려 임종하기 직전의 예수 얼굴을 재현했다. 받침대는 카타콤을 형상화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신을 향한 의지, 작품으로

정관모 교수 작품을 보면 종교성이 느껴진다. 조각상 대부분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어떤 의미인지 정 교수에게 묻자, 신에게 닿으려는 의지를 반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대인은 절대자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오벨리스크처럼 높은 기념비를 만들었죠. 어릴 때 저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인생은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같은 고민을 작품에 담고 싶었죠. 그런 이유로 수직 형태 조각상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정관모 교수는 어머니에게 기독교 신앙을 이어받았다. 어릴 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중학생 때 교회에 나가면서, 어릴 때 어머니가 가르친 내용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 교수는 만주에서 자랐다. 태어난 곳은 대전이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가족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고향을 등졌다. 해방 전까지 그가 살던 곳은 오늘날 중국 후린시(虎林市). 정 교수는 그곳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러시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도시였어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죠. 무장한 도적들이 활개 치고, 소련군이 틈만 나면 재물을 훔치고 여자들을 겁탈했어요.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께서는 조선인 수백 명과 함께 만주를 떠났어요.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지나 서울에 도착한 뒤 남대문시장에서 국밥을 먹었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광복이 가져다 준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정 교수는 가족들과 다시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2년 후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정 교수는 공주중학교에 복학하고, 동네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정관모 교수는 어릴 때부터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 성향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회에서 찬양대도 하고 예배에 꾸준히 나갔지만 신앙은 막연했다. 머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남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믿음을 갖기 시작한 건 미국 유학 생활 때다.

미국 유학 생활 5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는 31세 때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대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남들보다 미술에 조예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세계 무대에서 그는 단순한 무명작가였다. 마트,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남들과 비슷한 이야기예요. 가장 바닥을 치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난 거죠. 신앙이 제게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어요."

"작품 활동,
신께 드리는 기도와 같아"

정 교수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초기는 미국 유학 때로 습작 시기다. 중기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로, 한국적 현대예술에 집중했던 때다. 2000년대 이후는 말기로, 기독교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정 교수는 1970년대부터 '한국적 현대미술'을 추구했다. 한국 현대미술은 서양미술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독자성 없이 모방하는 데 그쳤다고 정 교수는 판단했다. 한국적 현대미술을 고민하던 중 예술의 역할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미쳤다. 이후 민속 용품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윤목, 정주목, 정낭과 같은 민속 용품을 현대 조각미술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격동의 시대를 맞았던 한국을 표현한 조형물. 뉴스앤조이 박요셉
거꾸로 선 나무. 뉴스앤조이 박요셉
오병이어 십자가. 뉴스앤조이 박요셉
C아트뮤지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은 조형물. 뉴스앤조이 박요셉
십자가 제단화. 중앙에 있는 붉은 십자가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2000년대 이후부터는 작품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 다양한 형태와 색깔을 가진 십자가 120여 개를 조각하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표현한 비석들을 만들었다. 전통 용품을 현대미술로 재현하던 그가 이제는 십자가, 예수, 교회, 성경 속 이야기를 현대 조각미술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들은 평론가들 눈치를 많이 봅니다. 평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도 평론가에게 혹평을 듣는 건 아닌지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은 못하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학계에서 인정해 주는 현대미술만 해 왔던 거죠.

2000년대 은퇴하고 나면서, 이제는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대형 예수 얼굴상, 십자가 조각상을 만든 것도 그 이유죠. 작품에는 제가 늘 품어 왔던 의문, 번민, 갈등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신에게 드리는 기도와 같습니다."

요즘도 정 교수는 작품 활동을 위해 매일 작업실을 찾는다. 평균 8~10시간 전문 서적을 읽으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조각을 한다. 조각칼을 하도 많이 쥐어 손가락에 있는 지문은 다 닳고 없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근력이 약해져 조각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작품을 계속 내놓을 계획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표현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정관모 교수. 뉴스앤조이 박요셉

C아트뮤지엄의 C는 'Contemporary(이 시대)', 'Creativity(창조적)', 'Christianity(기독교 정신)'을 의미한다. 정관모 교수는 한국교회가 기독교 문화 예술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설립했다.

주말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미술관을 방문한다. 요즘처럼 날씨가 따뜻해지면 미술관 방문을 문의하는 교회가 많다고 한다. 미술관에는 전시관 외에 교육실·식당이 있어, 단체가 방문하기 편하다.

"C아트뮤지엄이 기독교인들에게 문화도 즐기고 영성도 키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작품이 사람들의 신앙에 조금이나마 울림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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