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개혁을 외친 급진적인 기독교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뉴스앤조이>는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로부터 톨스토이의 신앙관과 삶을 정리하는 글을 받아 두 차례 나눠 싣습니다. - 편집자 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흔히 레프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년 9월 9일~1910년 11월 20일)를 19세기의 마지막 작가로,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년 11월 11일~1881년 2월 9일)를 20세기의 문(門)을 연 작가로 말한다. 동시대에 태어나 자라고 활동했던 두 사람은 일생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부인들은 훗날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 서로에게 상당한 관심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부터 두 사람이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경쟁심과 함께 영광을 느꼈을 것이고, 톨스토이는 약간은 오만하게 정중했을 것이다. 그들은 출신부터 현저히 차이가 났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고작 자신이 죽었을 때 들어가 누울 2평 반의 땅이 필요할 뿐이다"(<사람에겐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 1886)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실제론 광대한 영지와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세습 귀족이었다.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라프 톨스토이(Граф Толсто́й, 백작 각하)'로 불렸고, 자신이 서명(書名)을 할 때도 그렇게 썼다. 저택 앞 '빈자(貧者)의 나무(이 나무 아래서 톨스토이가 돈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아래서 가난한 유랑자들에게 동전을 나누어 주었던 톨스토이. 그는 농민복을 입고 귀리죽을 먹고 쿠미스(말 젖을 발효시킨 바시키르 음료)를 마셨다. 농노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풀을 베어 건초를 말렸다. 동시에 어머니의 유산인 야스나야폴랴나('광대한 평원'이란 뜻)의 대영지에서 거의 매일 200여 명의 상주 방문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들은 당대의 예술가들이었고 각계 유명 인사들과 세계의 신문기자들이었다. 그의 발언과 사진은 곧 기사가 되어 세계로 타전되었고 민중들에게는 성자와 같은 숭배의 호응을 얻었다. 톨스토이는 젊어서는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8) 같은 불후의 명작들로 러시아의 자랑이자 세계의 거장(巨匠)이 되었다. 그러나 늙어서는 자신이 젊어서 쓴 모든 것과 속했던 세계 전체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인류의 예언자 소리를 들었다. 차르를 향해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유형은 물론 체포 구금 한 번 당하지 않았던 톨스토이. 그는 끝없이 당국의 주시를 받았지만 홀대할 수 없는 신분과 명성으로 태생의 권위와 위엄을 지킬 수 있었다. 오직 그의 부인(소피아 안드레예브나)만이 그를 가장 많이 괴롭혔다. 세상에서 톨스토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손에 꼽을 몇 사람이 있다면 나머지가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첫손에 꼽아야 할 사람일 것이다. 반은 농담이지만, 오죽하면 팔순 노인이 집을 뛰쳐나가 보름 만에 객사하고 말았을까.

말년의 톨스토이는 오직 종교적 구원 문제와 거기서 나오는 성령을 받은 자의 윤리적 탐구에 자신을 바쳤다. 사유의 주제는 단순 명료해졌지만 싸워야 할 상대는 늘어만 갔다.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이래 회심한 기독교적 죄인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로서 현실의 사회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논조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긴장으로 점점 치열해졌다. 그의 근본주의는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그 어떤 혁명가들보다도 급진적이었다. 그는 사유재산, 경찰, 군대, 사법제도, 국가의 통치 그리고 최종적으로 교의(Dogma) 체계와 조직으로서 교회를 거부했다. 당국과 교회는 물론 지식사회 전체가 이해할 수 없다, 정도가 지나치다, 톨스토이는 미쳤다, 라고 도리질할 정도로 비타협적인 근본적 종교 윤리로 비폭력, 무저항, 비가담의 톨스토이즘을 전파했다. 단 한 가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민중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가 사는 툴라는 또 하나의 러시아, 그는 또 한 명의 차르라 불렸다. 물론 그가 그런 따위에 동요될 사람은 아니었다. 오직 신의 자녀로서 인간의 윤리는 그의 구원이었고 종교였고 신이었다. 현대적인 정치 상황과 현실적인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그는 이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해결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렇게 해서 19세기의 마지막 작가가 된 것일까.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도스토옙스키는 빈민 병원 의사로 은퇴한 부친이 작은 영지를 확보한 덕분에 명목상 귀족이 된 사람이다. 그는 평생 간질 발작과 생계와 도박 빚에 쫓겼다. 늘 첫 구상만 있고 어떻게 작품을 끝내야 할지 모르는 독촉의 긴박함 속에서 글을 썼다. 오죽 바빴으면 속기사와 결혼까지 했을까. 연극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 도스토옙스키는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쉴 새 없이 원고를 읊어 댔다. 책상 앞에 앉은 속기사는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할 정도의 성실한 집중력으로 타이핑을 했다.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다음 날 한 뭉치의 원고로 만들어 왔다. 이렇게 쓴 첫 작품이 그 유명한 <죄와 벌>(1866)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두 번째 부인 안나 스니트키나의 이야기다. 다행스러운 것은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는 그라피냐(백작 부인) 소피아 톨스타야와 달리 평생을 일관되게 남편을 존경하고 숭배했다는 점이다.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처녀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평론가 벨린스키에게 '제2의 고골'이란 칭찬을 들으며 문단에 데뷔했던 도스토옙스키. 그는 페트라셉스키 사회주의 서클에 가담한 죄로 10년 시베리아 유형을 살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빼앗겼다. 이후 간질병 발작이 심해졌고 표면적인 성품은 불안한 듯 조심스럽고 진중해졌다. 문학에서 그가 찾아낸 주제는 더 안전하고 온건한 정교회적 구원이었다. 정치적으로 차르의 전제 권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애국적 슬라브주의자로 자처했다. 반대 심리의 보상처럼 그의 소설은 단순한 사건에 얽힌 모순된 관념들의 치열함으로 난해함이 더해 갔다. 그는 자신만의 공장을 차린 듯 현실의 소재를 비현실적으로 가공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쓴 작가의 아내는 그의 공정이 이루어지는 비밀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비판자들에게 그는 자신의 관념은 다른 사람들(예컨대 톨스토이?)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예술가는 미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유럽을 떠돌며 미친 듯이 도박에 탐닉하고 간질 발작을 겪으면서 써 내려간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 명성으로 푸시킨 탄생 80년을 맞이하여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시인의 동상 제막식에서 그는 러시아 문단의 대표로 연설을 했다. 그는 거기서 푸시킨을 러시아 역사의 예언자로 칭송했다. 러시아와 유럽을 통합함으로써 장차 정교회 신앙 아래 세계를 통합할 러시아의 운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러시아의 예언자가 된 것 같았다. 러시아와 유럽을 통합함으로써 장차 정교회 신앙 아래 세계를 통합할 러시아의 운명을 제시하는. 그러나 이후 러시아제국의 운명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러시아적이고 정교회 기독교적 구원의 사명이 무엇인지, 오늘날까지도 의견들이 난분분하다. 오히려 그의 문명(文名)은 러시아제국의 국가주의적 영광에 도취했던 그의 예언과는 사뭇 다른 곳에서 떨쳐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끝없는 모순의 닫히지 않는 가능성과 끝나지 않을 대화로 진전되는 20세기의 문을 열었던 것인가? 그러나 기억할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역시 한결같이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의 절망 속에서 한줄기 종교적 구원의 빛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한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한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의존성의 결핍, 의존의 원천 봉쇄. 그들은 세상을 불신했고 믿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고아로 자라났고 도스토옙스키 역시 크게 다른 형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고 미성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다. 톨스토이는 캅카스와 세바스토폴에서 전쟁(크림전쟁)을 겪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그들은 자신과 처지가 다를 바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속에서 무엇이든지 홀로 책임지고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니고 자기 자신 스스로 얻은 것으로. 여기서 근원적이고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백의 필연적 이유가 생긴다. 세상을 지배하는 냉혹한 가짜 언어에 대항한 사랑 가득한 절대 언어의 탐구. 바로 이런 내적 투쟁이 자신들의 시대 제정러시아와 만나서 격돌하게 되었다. 때마침 그 시기는 '인민의 의지'와 '토지와 자유' 등 테러 단체들과 서구주의, 슬라브주의, 인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이 만개하던 세기말 종말론적 리얼리즘의 시대였다. 누구든 곧 닥쳐올 미증유의 재앙이 감지되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의 유난한 종교적 탐구로의 귀결은 이러한 태생의 고독과 그 정직한 고백이 만난 세상의 분위기와 관련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개인의 내면이든지, 사회의 구조이든지, 자신들의 대답 없는 고독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대답이 주어질 때까지 결코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적당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래 준비된 위기 1
- 죽음

모든 것을 하나의 주제로 결집시키는 것, 그것은 톨스토이가 청년 시절부터 일관되게 기울여온 노력이었다.

"철학은 항상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세계의 모든 복잡한 현상이 다양성으로부터 단일한 것으로 환원될 때의 그 긴장되고 정연한 사고 과정을 다루는 것이 좋았다." (<참회록>, 1879)

톨스토이의 일생을 이끌어 온 두 주제는 죽음과 구원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다. 개인적 사회적 삶의 기초로서의 모든 윤리는 거기서 나온다. 죽음이 주어져 있는데도 거기에 입각해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그 다음 일체의 삶과 행위와 그 결과는 무의미해진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결국 진리에 입장에선 언제나 부정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톨스토이 후기의 이미지―도덕가, 영성가, 구도자, 예언자, 사회사상가,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다. 비록 그가 자신의 저작에서 정교회 조직과 그 교의(Dogma)를 격렬하게 해부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복음서에서 영성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적 회심과 거기로부터 발전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역설한 설교자였다. 이 점이 그를 모든 당대의 보편적인 인텔리겐치아 지식인들과 및 신학 사상가들과 구별되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톨스토이가 쓴 <참회록> 초판.

그는 세습 귀족으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장군, 장관, 주지사, 외교관 같은 고위직을 지냈다. 외가인 볼콘스키 공작 가계는 로마노프왕조보다 오래된 귀족 가문이었다. <전쟁과 평화>의 한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그의 외가 쪽 할아버지뻘인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이 모델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략(조국전쟁, 1812~1814년) 당시 전쟁 영웅이면서, 1825년 알렉산드르 1세 사망 당시 발생했던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이 사건은 '데카브리스트 반란(12월 혁명당 반란)'이라 불린다. 나폴레옹전쟁을 통해 유럽의 민중 혁명 사상과 그 변화를 경험한 일단의 장교들이 봉건 전제를 타도하고 입헌군주제로 국체를 바꾸려고 일으킨 쿠데타였다.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20년 중노동의 시베리아 유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톨스토이는 '농민 공작'이라 불렸던 이 존경받는 친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요컨대 그는 그 누구에게도 굽힐 줄 모르는 귀족적 오만함과 차르 체제에도 도전할 정도의 고결한 존엄성과 진지성, 조국과 민중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닌 귀족 가문의 정치적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첫 번째 중요한 인생 배경이다.

두 번째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가족력의 질병을 들 수 있다. 톨스토이의 어머니 마리야 볼콘스카야는 위로 3명의 형을 낳고 그가 2살이 되었을 때, 여동생 마리야를 낳다가 죽었다. 모친의 가계로부터 유전된 질병은 결핵이었다. 톨스토이의 맏형 니콜라이와 셋째 형 드미트리도 젊은 날 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형제들의 끔찍한 임종을 지켜보았다. 톨스토이 자신도 몇 차례 치명적인 사고와 질병으로 목숨의 위기를 맞았었다. 2살 때 어머니가, 9살 때는 아버지가 길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함으로써 그의 형제들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연이어 그들의 후원자였던 고모들도 차례로 죽었다. 청년 시절에는 형제들이 사망했고, 장년 이후에는 자녀들 가운데 5명이나 요절했다. 이 죽음의 연속인 가정사와 그것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의지가 또한 그의 인생의 한 축이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 역시 일생을 생에 대한 긍정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았어야 했음을 의미한다. 개인적 실존의 위기와 드높은 귀족적 고결성. 거기서 나오는 일체의 죽음(억압)과 싸우는 사회 개혁의 사명 의식이 일찍부터 톨스토이라는 한 개성적 인격 속에 상극으로 맞물려 있었다.

오래 준비된 위기 2 ​​​​​​
- 전쟁

톨스토이의 인생은 흔히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는 출생으로부터 약 22세까지,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이전 시기다. 그는 귀족으로는 유복했지만 인생의 중심적인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운데 청년으로 성장해 버렸다. 톨스토이는 훗날 자신은 한낱 고아로서 누구에게 인생의 갈 길을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상태에서 아무 의미 없이 살았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기록광이었다. 일생을 두고 일기를 썼고, 특별한 내용은 비밀 일기에 따로 썼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온갖 종류의 악행의 전 과정을 고해성사를 하듯 분석해서 기록했다. 이 훈련으로 문학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지만, 이것은 그가 일찍부터 무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죄의식과 구원의 탐구에 몰두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외모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가졌었다. 코가 너무 크고 인상이 호감을 주지 못하는데다 자신감이 없어 의심의 성향이 강해졌다. 사교의 장에서도 주변을 떠돌았다. 당대의 작가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에서 유독 혼자 팔짱을 낀 채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는 그의 오만한 태도는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리라. 신혼 시절 톨스토이의 아내는 벌써 그가 사람들 개개인의 성실성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사실상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인간이라고 쓰고 있다.

대영지 야스나야폴랴나 진입로.

카잔대학을 중퇴한 그는 영지 경영으로 뜻을 바꾸고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다(19세). 이 시기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1778년 7월 2일)를 읽었다. 루소는 그의 첫 번째 사상적 스승이었다.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휴머니즘적인 사상에 경도해 루소를 새긴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참회하는 귀족'이라는 동시대 지식인들의 고결한 삶을 동경한 그는 루소에게 영감을 받아 농민 계몽운동을 시도해 보려는 야심 찬 목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상만 드높았지 현실감각은 없었다. 그의 열성적인 개혁 조치들은 농노들마저도 이해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어리고 순진한 지주를 우습게 알았다. 그는 곧 실망해 방탕에 빠져 버린다. 도박과 술, 여자, 결투, 하룻밤에 야스나야폴랴나의 집과 농노 전체를 잃었던 적도 있었다. 절망 상태로부터의 도피처가 군대였다. 당시 캅카스 전선에 있던 맏형 니콜라이를 따라 군대에 입대했다. 거기서 23세 때 쓴 첫 소설 <유년시대>가 <현대인>에 발표됨으로써 작가로서 문단에 나서게 된다.

캅카스는 오늘날까지 테러와 진압의 전쟁 상황이 그치지 않고 있는 체첸, 다게스탄, 소치 같은 흑해 인접 지역이다. 푸시킨 이래 러시아 작가들은 러시아적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해 캅카스를 낭만과 모험의 땅으로 그렸다. 그러나 거기 사는 체첸인 체르케스인 등 토착민들은 강도, 살인자, 사기꾼으로 묘사했다. 전투에서 그들을 살상하는 러시아 군인들을 낭만적이고 용감한 영웅으로 형상화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토착민들을 자신들의 삶과 생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싸우는 약소민으로 기록한다. 그의 캅카스는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약소민족이 자기들의 땅에서 침략자인 러시아인들로 인해 고통받으며 투쟁하는, 가려지고 왜곡된 지난한 생활의 현장이었다. 그의 최후의 장편 <하지 무라드>(1901)는 이 시기 체험이 담긴 작품이다. 그는 젊은 날부터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직관을 가졌으며 약소민족의 자연스러운 삶과 생존을 옹호하고 제국주의의 압제를 비판하는 양심에 입각해 있었다.

톨스토이 청년 시절 모습.

러시아는 이 지역 기독교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캅카스를 점령하고 오스만 터키를 구축하면서 부동항 흑해를 차지하기 위해 크림반도 남쪽에 세바스토폴 항구를 건설했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그 세바스토폴이다). 남으로 진격하려는 기독교 러시아와 밀려나고 있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 세력, 러시아의 남진을 경계하려는 유럽 국가들이 연합해 맞붙은 전쟁이 크림전쟁(1853년 10월~1856년 2월)이다. 톨스토이는 이 전쟁에 포병 장교로 임관되어 참전하게 된다. 결과는 러시아의 패퇴. 흑해 제해권을 상실한 러시아군은 자국 군함까지 수장시켜가며 세바스토폴 항구를 봉쇄하고 8개의 보루를 구축한 다음 포격전으로 맞섰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연합군의 포격과 진격전으로 보루들을 하나씩 상실하면서 세바스토폴에서 퇴각하게 된다. 이때 쓴 세바스토폴 3부작(<1854년 12월의 세바스토폴>, <1855년 5월의 세바스토폴>, <1855년 8월 세바스토폴>)이 그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현대인>에 실린 이 연작소설은 전쟁을 치루며 애국심과 영웅주의에 몰입해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격렬한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연작의 주제는 러시아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아니다. 톨스토이의 일생에 걸친 일관성이기도 한 타협을 모르는 아나키즘적인 성향은 이때부터 이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이 전쟁 수기에서 기록해 놓은 이야기들에는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불굴의 의지가 담겼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비겁하지 않게 삶을 사랑하고 살려 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용기를 보여 준다. 그는 생을 열렬히 옹호하고 긍정하는 낭만주의적 리얼리스트가 되었다. 이 전쟁 수기 연작으로 그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명사가 되고 일약 저명한 작가가 되어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이었다.(계속)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설교집 <고뇌가 없다는 것>(포이에마, 2016)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1890년대 톨스토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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