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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logy)의 종말
구원론 종말의 시대(3)
  • 신광은 (calebkshin@daum.net)
  • 승인 2017.04.13 17:48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에 이어 '구원론 종말의 시대'에 관해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 필자 주

1. 칭의론이 위태롭다
2. 천국과 지옥의 실종
3. 구원-론(logy)의 종말

1. 들어가는 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설명해 오던 언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옳다. 특히 그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천국 지옥 기독교'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통렬하다.(Borg,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1장) 그러나 나는 그가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정확히 짚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기독교 언어의 위기 원인을 '천당 지옥 기독교관'과 '문자주의'에서 찾았는데(위의 책, 13쪽),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 두 원인이 전부인지는 묻고 싶다.

만일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기독교 언어의 위기로 본다면 그것은 구원론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전체의 위기요, 나아가 기독교 신앙 전반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유달리 '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라는 정황 속에서 보자면 이 위기는 무엇보다도 구원론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 몇 차례 지적했듯이 개신교회는 구원론을 초석 삼아 세워졌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글에서 나는 구원론과 함께 기독교 신앙 및 교리 전반이 언어의 위기로 말미암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게 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2. 게토화된 기독교 언어

기독교 언어의 위기 징후는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및 신학의 언어가 게토화된 사실에서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의 언어를 교회 밖의 사람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교회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 갔을 때 주고받는 '집사님', '권사님', 혹은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낯선 호칭이 그 작은 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의 생경함은 더욱 말할 것이 없다. 갑작스럽게 전철에 올라탄 50대 여성이 지하철을 휘젓고 다니며 쏟아 내는 종말의 메시지, '회개하라'는 둥,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둥,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는 둥… 노스트라다무스류의 묵시적 언어들은 목사인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말에 성경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인용과 세상 문화에 대한 번득이는 비판과 통찰이 들어 있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럽다. 차라리 정신병자의 횡설수설이면 좋을 뻔했는데, 진리의 편린들이 들어 있는 바람에 기독교 언어 자체가 청자들에게 미친 소리로 들려지겠다 싶으니 낯이 뜨뜻해진다.

한 구도자가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안에서 듣는 말은 분명 '한국말'인데 도통 모르겠는 말들뿐이다. 안내하시는 분들의 한복이나 양복도 어색하고, 갑자기 자신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황스럽다. 찬송가나 복음성가 내용도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 통성 기도할 때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고 중얼거리는 청중들을 보면 어딘가 섬뜩하다. 장로님의 길고 긴 기도는 거의 외계어 수준이고, 설교도 알 듯 모를 듯하다. 설교 본문이 하박국서라는데 이게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가. 목사가 설교하는데 중간중간에 사람들은 왜 자꾸 '아멘'하면서 끼어드는 걸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데 그건 또 무슨 뜻인가. 복음서·제자·훈련·리더·목장·사역·선교·지상명령·성령 충만·창조·심판·영성·성숙… 암호들은 끝이 없다.

복음반을 찾았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천국, 지옥은 익숙한 단어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복음반 강사가 가르치는 내용도 알쏭달쏭하다. 중간중간 턱 턱 걸리는 용어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십자가·보혈·부활·예정·칭의·성화·영화·종말·재림… 끝도 없다. 그리고 결론은 '믿음'이 중요하단다. 믿으면 천국에 간단다. 믿으라고? 뭘 믿으라는 거지? 강사가 하는 말에 그냥 동의하라는 말인가? 인감도장 찍을 필요가 없다면 그까짓 거 '믿는다'고 해 두지 뭐. 근데 그 정도로만 믿어도 천국에 가는 걸까? 에이 설마… 그렇게 갈 수 있는 게 천국이라면 그런 천국은 허당일 것이 분명해.

이처럼 기독교 언어는 외부인 입장에서는 어색함과 낯설음으로 충만하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는 잘도 쓴다. 그래서 게토화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어가 마치 갈라파고스제도의 생태계처럼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관념성과 추상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신학적 개념의 남발, 서양 언어의 무분별한 차용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사실 게토화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1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초대교회 공동체도 로마제국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게토화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물고기 표시 같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암호도 많이 만들어 냈다. 초대교회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만만치 않다. 흔히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요, 소통의 달인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예수님은 일반 청중에게 전하실 메시지와 제자 공동체에게 전하실 메시지를 늘 구분하셨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나, 요한복음 12장부터 나오는 최후의만찬 자리에서의 가르침, 특히 새 계명 수여는 고립된 제자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바울도 '외인'과 '교중 사람들'(고전 5:12)을 자주 구분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어느 정도 게토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지금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의 게토화 현상과 사뭇 달랐다는 데 있다. 당시의 게토화 현상이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사이에 두었던 필연적 단절과 대조성의 산물이라면, 현대 교회의 게토화 현상은 대조성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누가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서 교회를 대조 사회라고 생각하겠는가? 세상의 논리가 거의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가. 기업과 메가 처치는 뭐가 다른가. 마케팅, 경영, 기술의 무분별한 수용은 또 어떤가? 정치 편향성, 물신숭배… 이런,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다.

기독교는 사실 속으로는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해 버렸다. 다만 겉으로만 기독교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종교 놀음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기독교 언어의 고립주의는 실은 교회가 세상과 똑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인 셈이다. 시뮬라시옹은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Baudrillard, <시뮬라시옹> 참조). 결국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은 교회 속에 알찬 신앙의 부재를 은폐하는 수단이다. 상징력을 상실한 상징처럼 기독교 언어는 기표만 남았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전문용어(?)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마치 전문가들이 굳이 어려운 전문용어를 휘갈기면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을 배제하듯이 교회는 그러한 게토화된 언어로 외부인을 소위 '세상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이며 배제한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내용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데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다 눈치채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 언어가 외인들 가슴에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 지식인들은 성경의 언어가 주는 충격에 전율했다. 여성과 하층민들은 성경의 평등사상에 뛸 듯이 기뻐했다. 지금이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경멸적 언어의 대명사지만 100년 전 평양 시대에서는 그 말만으로도 뭇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보다 지금의 기독교 언어는 훨씬 더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귀만 간지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사실을 교중 사람들만 모른다. 게토 안에서 여전히 자신들만의 언어가 잘 통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교중 사람들조차 서서히 텅 빈 언어의 실체를 느끼고 있다. 매주 강단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종교 언어가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귀만 간질이는 현상에 이제 교인들도 점차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언어의 게토화 현상의 진짜 위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3. 교리의 종말

1) 명제적 진리관의 종말

기독교 언어 위기 문제에서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교리의 종말'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는 바람 잡는 것 같은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해서 현대인은 기독교 교리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기독교 교리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다. 수많은 이단이 만들어진 것도 결국은 교리 때문이고, 수많은 사람이 교리 때문에 죽었다. 신학자들은 신학 개념이나 단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수십 년을 고심했으며, 그 단어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았다. 그런 단어들로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단어들로 사도신경을 비롯한 수많은 신조(혹은 신경, creed)들이 만들어졌다. 그 신조는 정통과 이단을 결정짓는 표준이 되었고, 그 표준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바뀌었다. 필리오케(Filióque)라는 단어 하나가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헬라어로 ‘i’(이오타) 하나로 아리우스(Arius)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와 테오토코스(Theotokos)의 논쟁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이단으로 찍혀져 나갔다.

교리는 신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5세기 동유럽의 민중들은 저잣거리에서 단성론과 양성론에 대해서 열띠게 논쟁했고, 16세기 서유럽 시민들은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서 흥분하며 토론했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열렬하게 신앙하고 있는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도 사실은 12세기 가톨릭 신학자 안셀름(Anselm)의 '만족설' 교리에서 빚진 것이다. 교리는 신자들에게도 중요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예전과 전통 대신 교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개신교회 내 경건주의 흐름이 교리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긴 했어도 교리를 강조하는 정통주의(Orthodoxy) 흐름은 개신교회사 속에서 도도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에서는 기독교인조차 기독교 교리를 주제로 밥상머리에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원인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 외부적 원인도 만만치 않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교리의 종말이라는 현상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했던 사람인데, 그는 그 원인을 현대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19세기 전후로 현대 정신이 '절망선'을 넘으면서 명제적 진리가 멸시 당하게 되었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쉐퍼는 헤겔(G. W. F. Hegel)의 변증법과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의 실존주의가 인류의 정신을 절망선 너머로 인도했다고 개탄했는데, 이러한 진단에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19세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명제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진부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적 진리에 대한 멸시는 기독교 교리의 종말 현상의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제적 진리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쉐퍼의 판단은 정확했다. 현대인은 진리를 명제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가 똘레랑스의 미덕을 강조한 이래로, 사람들은 점차 절대 진리의 선포보다 '사견'을 전제로 자기 생각을 제안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은 점차 사라졌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의견으로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한 토론과 논쟁의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설이 '진리'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그 진리라는 지위는 또 다른 진리가 등장할 때까지 잠깐 누리는 명예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관은 칼 포퍼(Karl Popper)의 '열린사회'의 개념을 통해 잘 나타난다. 영원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다. 영원한 진리라는 개념은 전체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전체주의 사회는 닫힌 사회며, 닫힌 사회는 열린사회의 적이다. 열린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모두가 진리를 경합하는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다른 의견에 의해 반증되기 전까지 그 의견은 진리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Popper, <열린사회와 그 적들> 참조).

절대적 진리관의 해체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급진적으로 개진되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이들은 아예 '진리'라는 말 자체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대문자 진리(Truth)는 없다. 소문자 진리들(truths)만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정서를 가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단죄한다. 인식론적 제국주의란 '나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식의 진리관이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여하한 형태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도 거부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진리관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명제적 진리는 'A는 B이다'라는 식으로 구성될 것인데, 그 방식이나 내용이 오만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강압적인 아우라가 가득하다. 현대의 교양인이라면,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 따라서 명제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는 독선적인 시도는 자제되어야 한다.

조지 린드벡(George A. Lindbeck)은 <교리의 본질>에서 명제적인 교리의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인식-명제적' 형태의 기독교 교리는 '문화-언어적' 형태의 담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Lindbeck, <교리의 본질> 참조). 교리는 부적절하다. 다만 '담론'이나 '이야기'만 가능할 것이다. 그의 대안에 대해서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지금의 시대정신이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지적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명제적 진리관의 위기는 기독교 교리의 위기 원인이 된다. 대부분 기독교 교리(dogma)는 명제적 진리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니케아신조를 비롯한 여러 신조들(creeds)이나 신앙 공식들(formula)은 압축적 명제의 형태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정리해 주고 있는 것들이다. 신조나 공식, 교리들은 "내 생각에는…"이라는 단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명제적 형식으로 진술만 있다. 정의상 신조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그토록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다. 기독교 교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21세기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지탱해 왔던 교리, 곧 -'론'(logy)의 해체적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 형이상학의 종말

기독교 교리가 종말적 상황에 처한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기술의 정신이 편만하게 퍼져 있는 현대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들,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의 관심은 지독히도 '물질적'이고 '현세적'이다. 천상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거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사고할 줄 모르게 되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뭘까.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말이다. 단어의 뜻을 풀이하자면 '물리학(physics) 뒤(meta)'라는 뜻이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탐구는 물리학(physics)이라고 했고, 물리학 다음에 오는 학문은 존재의 본질(essentia)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물리학은 형이하학(形而下學), 존재론은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번역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형이상학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며, 초과학적인 대상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사고라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발전했다. 신화적(mythos)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logos) 사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근원'(arche)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만물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들은 만물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뒤이어서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이데아'(Idea)가 천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이데아 역시 초월적인 존재다. 비슷하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탐구를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형이상학적 사고는 자주 '신'에 대한 탐구로 연결된다. 예컨대, 제1원인,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혹은 일자(The One) 등에 대한 탐구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이면서, 신학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신학자들도 형이상학적 방법론으로 신에 대해서 연구했다. 형이상학은 초월에 대한 학문이고, 그것은 신학과 인척 관계에 있다.

17세기를 지나면서 형이상학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과학혁명과 함께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사의사탑에서 이루어졌다고 전설처럼 전해오는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장의 이론을 단번에 폐기해 버렸다. 바야흐로 과학이 새로운 정신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물리학은 더 이상 형이상학보다 열등한 학문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로, 형이상학의 추락이다. 18세기 칸트(Kant)에 이르러서 형이상학은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형이상학을 과학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떼어서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옮긴 사람이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과학적 이성과 형이상학적 이성으로 분리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이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한 유물론자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은 제거되고 오직 과학적 이성만 남게 된다. 초자연적, 초월적, 초과학적 영역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형이상학의 위축과 더불어서 신이 존재할 영역도 지상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니체 이후로, 이제 신은 지상에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형이상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일 없는 철학자들의 말장난'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교리(dogma)가 위기에 내몰린 것도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기독교 교리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었다. 예컨대, 삼위일체론 같은 경우는 단적인 예다. 개신교회 구원론도 마찬가지다. 칭의, 전가, 이중 예정, 중간 지식, 속죄 등… 이런 것들은 일상의 삶과 연관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면서 이러한 기독교 교리도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대인은 더 이상 이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귀를 열 마음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연관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여기에 기독교 교리의 딜레마가 있다. 본성상 다분히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현대인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4. 말의 굴욕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말하는 '말의 굴욕'이다. 말의 굴욕은 앞서 언급했던 것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현대사회는 '말'(word)이 굴욕당하고, 능욕당하는 사회다. 말이 뭘까? 말이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매개다.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 인격과 인격의 교통이다. 나아가 말은 인간 존재 자체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 뜻은 자신의 존재의 내어 준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말'(word)을 통해 세상 속에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심하셨다.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성경은 그것을 '말씀'(word)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사도들 말을 통해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는다. 그리고 또한 말로 기독교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한다. 말로 진리가 계시된다. 말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없고, 기독교 진리도 전달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말'이 경멸당하고 있다. 그리고 말의 굴욕이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자크 엘륄의 통찰이다.(Ellul, <말의 굴욕> 참조)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법정에서는 증언보다 증거가 우선한다. 이는 사람의 말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말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진실보다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경험칙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말이다.

말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말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말은 사물과 1대1 대응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은 대상보다 너무 많은 뜻을 담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램을 짤 때, 인간 말 대신에 기계어를 쓴다. 기계어는 대상과 언어가 완벽하게 1대1 대응 관계를 가진다. 기계어는 간단하고, 명료하고, 정확하다. 예컨대, 수학의 계산식은 항구적으로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하지만 말은 그렇지 않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찰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이러한 말의 부정확성에 대한 혐오가 현대사회에서 말이 무시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말이 경멸당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말이 선전(propaganda)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거 기간 후보자의 말은 철저하게 표 확보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간주된다. 말하는 사람의 본뜻은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상대방 후보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린다. 선의가 악의가 되고, 악의가 선의가 된다. 말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의제를 선점하여,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선거는 전쟁이고 말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사는 무기다. 마치 총알이나 대포알과 같다. 선거에서 말의 가치는 오로지 표 득실로 결정된다. 이런 말은 인격과 무관하다. 오염된 말이며, 선전의 도구이다.

그런데 이것은 선거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사회 속에서 모든 말이 선전의 수단이 되고 있다. 기술 사회에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무관한 기호들이 되고 있다. 말은 말인데 '주인'이 없다. 우리 사회는 광고 카피, 뉴스 멘트,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로 넘쳐 난다. 그러나 그 말들은 하나같이 주인이 없는 말들이다. 이들 말은 오로지 효과로 측정되는 선전의 도구다. 물건을 사게 하거나, 뉴스를 믿게 하거나, 드라마 시청률을 올리거나, 음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선전의 도구이다. 비슷하게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친구 관리를 위한 경영이 된다. '좋아요'와 '공유'의 숫자는 영향력을 의미하며, SNS에서 영향력은 자산이다. 이처럼 기술 사회에서 말은 타인을 현혹하거나, 설득하는 수단일 뿐이다.

현대인은 타인의 인격이 말로써 다가오는 무거운 경험을 잃어버렸다. 인격을 담은 대화는 너무 무겁다. 그런 대화는 즐거운 분위기를 깬다. 무거운 대화는 예의 없는 대화다. 대화가 너무 무거우니 카톡을 보낸다. 카톡 메시지는 인격을 한층 걸러내 주기 때문이다. 말은 가벼워졌다. '아브라카타브라' 같은 뜻 없는 주문을 말하면서 재밌어라 할 때, 조롱의 대상은 말 자체다. 비슷하게 낄낄대며 지껄이는 유행어도 말에 대한 조롱이다. 말이 굴욕당하고 있다.

말이 당하는 이러한 굴욕은 기독교 진리의 위기를 초래한다. 기독교 진리는 오로지 말로써만 전달 가능하다. 이때의 말은 정보의 전달이나 선전의 도구, 혹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격이 담긴 말이라야 한다. 그 말은 천금 같이 무거운 말이다. 그런데 말이 위기에 처했다. 말은 가벼워졌으며,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선전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말의 위기와 함께 기독교 진리도 위기에 처하고 만다. 듣기 싫은 말을 할 때, '설교하지 마'라고 대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설교는 권위적인 명령이거나 강요된 설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혹은 설교는 설교란 장황하고, 의미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sound)나 소음(noise)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은 설교 역시 선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설교는 최상의 상품이 되고 있다. 일종의 지적 엔터테인먼트다. 사람들은 설교를 즐기기 위해서 듣는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늘 충돌과 대결이다. 해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투쟁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마치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대결하듯 청중은 설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씨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여 존재의 변화를 겪는 것이 설교의 본래 목적이다. 하지만 설교가 청중을 끌어모으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어 버린 현대 교회에서 설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거나, 자존심을 살살 어루만지는 아첨이 되어 가고 있다.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5. 나가는 글

이상이 기독교 언어가 당면한 위기 상황이다. 위에서 보듯이 기독교 언어의 위기는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지만, 교회 외부적인 문제도 적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이 내가 마커스 보그와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커스 보그의 제안, 곧 기독교 언어를 바꾸자는 제안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는 더 크고, 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담지하고, 전달해 왔던 기독교 신앙의 언어와 교리의 언어는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특별히 구원론을 초석으로 삼고 있는 개신교회의 경우, 구원-'론'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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