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신자의 위기냐,
교회의 위기냐

가나안 신자가 출현했다. 혹자는 한국에 100만 명이 넘는 가나안 신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의 신앙>, 35쪽). 가나안 신자 현상은 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다. 그들은 교회를 출석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과연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는 바야흐로 '교회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만일 가능하지 않다면 '가나안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고 말해야 한다. 현재 기성 교회는 두 번째 답변을 자주 하는 모양이다.

'가나안 신자는 신자가 아니며, 구원이 위태로우니 속히 교회로 돌아오라!'

기성 교회에서는 가나안 신자를 위태로운 처지로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위태로운 것은 가나안 신자가 아니고 교회, 정확히 말해서 제도 교회다. 가나안 신자 현상이 말해 주는 바는 오늘날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위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가 어떤 종류의 위기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프로테스탄트 내러티브에 따르면, 지금의 교회는 500년 전 가톨릭교회와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망하고 말 것이다. 교회 개혁 운동가들이 말하는 교회의 위기란, 500년 전 가톨릭교회가 보여 줬던 신앙적, 신학적, 윤리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 기복신앙, 선행을 통한 구원, 지옥과 죽음에 대한 공포 악용, 교권주의와 권위주의, 성직 매매, 목회자의 돈과 권력의 추구, 교회의 사유화, 목회자의 도덕적 타락, 목회자의 성적 타락, 낮은 신학적 수준, 교회 건축에 대한 몰두, 영광의 신학, 남성 중심주의 등….

하지만 내가 볼 때 현대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는 그런 신학적, 윤리적 타락과는 다른 종류의 위기다. 가나안 신자 현상은 바로 그 위기를 보여 준다.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새로운 종류의 위기는 훨씬 더 근본적인 위기다. 아마도 그것은 교회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위기가 아닐까 싶다. 미리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 위기는 신자들이 누리는 '자유의 확대'가 초래한 위기라 할 수 있다.

자유 확대의 역사

개별 신자가 누리는 자유를 정량적으로 측정해 본다면 중세 가톨릭교회 신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21세기 현대 교회 신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최대치에 육박한다. 중세 가톨릭교회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그래프로 그려 본다면 꾸준히 상승하는 직선으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교회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현대 재판은 사람의 행동을 처벌하지 마음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세의 종교 재판은 행동은 물론이고, 생각이나 사상도 처벌 대상이었다. 종교재판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판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로 인해 신자는, 행동은 물론이고 양심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다.

자기 마음에 맞는 교리나 신학을 선택한다거나, 출석하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전무했다. 교회와 신앙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고 운명적인 것이었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러다 종교개혁과 함께, 신앙과 교회는 선택 가능한 것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개별 신자들이 곧바로 신앙과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선택의 자유가 군주에게 주어졌다. 군주가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중 어느 한 종교를 선택하면, 그 군주의 지배를 받던 신자들은 자동적으로 군주가 선택한 종교를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성공회다. 헨리 8세의 결단과 함께 영국의 가톨릭 신자는 하루아침에 성공회 신자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일찍부터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아나뱁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신앙고백에 기초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발적 선택으로 교회에 소속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적이고 운명적인 소속이 아니라 자발적인 결단으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교회(free church)의 이상이라고 한다.

이 자유교회의 이상은 영국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후에 침례교회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자유교회의 이상은 자유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 확대에 기여한 사람들 중 계몽주의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볼테르, 루소, 스피노자 등 계몽주의자들은 루터와 칼뱅이 소리 높여 외쳤던 종교의자유를 사상과양심의자유로 발전시킨다. 이들의 자유사상은 다방면에 영향을 줬다. 특히 미국의 헌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수정헌법을 통해,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종교가 자유롭게 경합할 수 있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계몽주의자들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미국 침례교회 설립자 로저 윌리엄스는 프로비던스(Providence) 자치구를 세웠고, 윌리엄 펜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자치구를 세웠다. 이들 자치구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무한히 보장한 구역으로 오늘날 미국의 모형이 되었다. 자유의 땅 미국에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는 더욱 확대되었다.

1차, 2차 대부흥 운동은 신자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신자들은 부흥파(new light)와 반부흥파(old light)를 선택할 수 있었다. 더불어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 가톨릭, 성결교 등 여러 교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은 정통 교단뿐 아니라 제7일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같은 이단까지도 포함해 크게 넓어졌다.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말하는 '이단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유는 더욱 확대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신자들은 이제 교단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개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선택의 폭은 무한히 넓어졌다. 자가용 덕분에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교회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선택을 위해 수많은 목사의 설교를 인터넷으로 미리 들어 볼 수도 있었다.

교회 선택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교회뿐 아니라 타 종교나 무신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모든 신앙과 종교, 사상은 상품이 되어서 백화점에 진열되고, 사람들은 그렇게 진열된 것들 중에 아무것이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피터 버거가 말한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이 도래했다.

시장 상황은 20세기 후반 등장한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과 조화를 이룬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진리는 다수다. 진리가 여럿이니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며, 그 어떤 진리도 자신을 최종 진리라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하나의 진리를 택할 수 있으며, 또 언제라도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할 수 있다. 하나의 진리를 택한 것이 나머지 진리를 버리는 것을 뜻하지도 않게 되었다. 필요하다면 여러 개의 진리를 택할 수도 있고, 여러 개를 뒤섞어 하이브리드 진리를 만들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간 사상의 자유는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자유와 교회의 변증법

자유 확대가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교회의 안정성의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종교의자유를 외친 뒤, 오늘날까지 개신교인은 자유는 선이고 자유의 억압은 악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해서 부단한 자유의 증진만이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진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유의 확대는 도리어 교회의 기초를 침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교권주의와 권위주의로 인해 자유와 신앙을 말살하고 거대한 바벨론으로 타락해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은 바로 그렇게 타락한 바벨론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가톨릭을 향한 개신교회의 공격은 교회의 가톨릭성(catholicity), 즉 공교회성과 통일성을 공격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가톨릭을 '사탄의 회'로 규정한 개신교인들은 점차 지구상 모든 교회가 하나의 교회라는 오래된 교회론적 공리를 망각해 교회의 기초를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이 공교회(catholic)이라는 용어나, 교회 일치(ecumenical)를 위한 모든 시도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출애굽한 개신교인들은 이전에 누려 보지 못했던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단이 생겨났다. 교단은 각자 나름의 신학과 신앙관을 바탕으로 만든 교회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은 곧 교단이 제2의 바티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티칸에 대한 저항은 점차 교단에 대한 저항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교단으로부터의 출애굽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개교회 중심주의가 출현하게 되었다. 교단은 가톨릭교회를 대신하는 공교회적 구조였다. 교단이 무너지자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공교회적 구조도 함께 붕괴되었다. 이제 교회 질서는 개교회들 간의 무한 경쟁의 질서가 되었다.

또다시 개신교 신자들은 개교회도 교권주의와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개교회도 바벨론이다. 참교회는 그러한 바벨론 구조 안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금 개교회로부터 출애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 신자 현상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교회 그 자체로부터 출애굽하고 있다.

교회로부터 출애굽하는 가나안 신자 현상은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개신교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소위 '냉담자'라고 해서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가나안 신자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또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의 <종교 없음>(베가북스)이 잘 보여 주듯 미국에서는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제도권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신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29쪽). 독일의 경우도 전체 국민의 2/3이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라고 밝히지만 교회를 출석하는 신자는 5% 남짓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가나안 신자 현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가톨릭교회의 '냉담자'나 유럽 교회의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신자들을 모두 싸잡아 '가나안 신자'라고 부르는 것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자고로 개념이란 엄밀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글의 전반적인 논지가 지난 500년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의 확대'라는 보편적 현상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 간파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나안 신자'라는 개념을 다소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혜량해 주셨으면 한다.

가나안 신자 현상은 교회의 안정성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징후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의 확대로 인해 초래된 결과다. 이로 보건대 자유와 교회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개신교회나 가톨릭교회나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도 가나안 신자들이 개신교회 못지않게 많은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교회 간의 긴장은 개신교회에서 더욱 첨예하고 위협적이다. 개신교회가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추구는 교회의 안정성을 위태롭게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스 큉(Hans Küng)의 통찰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신앙의 절대화가 교회를 파멸시키며, 이것을 개신교회의 위험이라고 했다. 반대로 가톨릭교회의 위험은 교회를 절대화시켜서 신앙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했다(한스 큉, <교회>, 44쪽).

가톨릭교회는 자유가 극적으로 증가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의 절대화를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태생적으로 신앙주의(fideism)적 교회다. 프로테스탄티즘적일수록 교회의 안정성은 약화된다. 이것이 지금의 개신교회가 가지는 위기의 본질이다.

첨언하자면, 신앙은 자유와 불가분 관계다. '프로테스탄티즘적'이라는 말은 신앙과 자유의 강조를 뜻한다. 역설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적 자유의 추구와 신앙주의 강조가 교회의 안정성을 더욱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실험 교회의 시대

오늘날 여기저기서 실험적인 교회가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교회, 건강한 교회, 개혁적인 교회, 상황화된 교회를 표방하며 많은 이들이 교회 실험에 뛰어들고 있다. 이 얼마나 프로테스탄트적인 현상인가!

사실 실험적인 교회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기성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메가 처치 현상 속에서 교회 생활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교회를 탈출해 나와서 교회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교회 실험은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 실험이 작은 교회 전성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작은 교회 전성시대라 하는가? 메가 처치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교회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이는 메가 처치 현상으로 말미암아 중형 교회들이 몰락해 교회의 질서가 극소수 메가 처치와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로 양극화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목회자 과잉 공급도 한몫하고 있다. 해서 수많은 목회자가 교회 개척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원하든 원치 않든 작은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바벨론을 꼭 닮은 메가 처치에 비해 작은 교회는 분명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메가 처치는 건강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반면 작은 교회는 건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은 교회가 곧 건강한 교회라는 말은 아니다. 메가 처치 현상 속에서 메가 처치나 작은 교회는 모두 동일한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무한히 성장하고자 하는 강력한 흐름이다. 이러한 메가 처치 현상 속에서 나름의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 운동은 분명 격려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작은 교회는 태생적으로 교회 안정성이 심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작은 교회다. 물론 반대로 작은 교회는 세우기도 무척 쉽다. 왜냐? 작으니까.… 이미 교단 구조가 무너졌으며, 신학생의 대량 양산으로 교회 개척을 감시하고, 지도하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수를 받는 것도 너무나 쉽다.

교단은 선교라는 명목으로 목사 안수와 교회 개척 과정을 점점 더 자유롭고,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 교단이 까다롭게 해도 상관없다. 독립 교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면 교단을 탈퇴해 독립 교단으로 가면 그만이다. 해서 쉽게 세울 수 있고, 또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 모습이고, 특히 작은 교회의 현실이다. 이것은 교회의 안정성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 보여 주는 예다.

요즘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 교회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정 교회는 사랑과 공동체성에 기초해서 안정적인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 언제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말이 가정 교회지 정말로 가족끼리만 집에서 예배드리는 가족 교회도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 목사, 전도사, 사모가 주일날 교회를 안 나가고 집에서 혼자서 간단하게 예배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이들도 사실상 가나안 신자다. 가나안 목회자들은 가나안 신자들과는 본질상 다르다고 해야 할까? 목회자는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이들은 교회를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 제단'을 쌓고 있다고 봐줘야 할까?

교회 실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는 노력은 격려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 실험에서 '실험'이라는 말은 극도의 불안정성을 내포한다. 실험적인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교회라는 구조 자체를 지속시키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꿈꾸는 그 이상을 실험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자신이 출석하는 실험적인 교회가 그러한 이상을 보여 주지 못하면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를 떠나기 전에 한바탕 논쟁거리를 던져 놓기 일쑤다. "지금 우리 교회는 기성 교회와 뭐가 다릅니까?" 요는 기성 교회와 다르지 못하다면, 그런 교회는 있으나 마나 하다는 말이다. 교회의 불안정성이 극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 신자 시대에
던져야 할 질문

교회의 불안정성은 더욱 커져 가리라고 예상된다. 교회라는 구조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줄어들 것이다. 이미 가나안 신자들에게 교회는 '반드시 나가야 하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왜 교회를 안 나오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왜 교회를 다니냐고 반문하는 것이다(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의 신앙>, 34쪽).

이들의 반문은 교회의 위기를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정말로 왜 우리는 교회를 나가는 것일까. 왜 교회를 안 나가면 안 되는 것일까. 교회라는 제도를 반드시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오늘날 개신교회는 뭐라고 답을 줄 수 있을까.

가톨릭교회도 가나안 신자(?) 현상이 개신교회 못지않게 심하다는 점에 대해 앞서 밝힌 바 있다. 사실 교회 출석에 대한 충성도는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보다 크다. 그러나 교회 안정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에 비해 훨씬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거대한 가톨릭교회 구조 그 자체를 고수할 수 있는 여러 신학적, 교리적 명분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회는 그에 비해 교회라는 제도를 지속시켜야 하는 신학적 명분이 취약하다. 앞에서 봤듯 프로테스탄티즘적이 될수록 교회의 안정성은 취약해질 수 있는 것이 개신교회의 교회론적 딜레마이다.

지난 500년 동안 개신교회는 전통이라는 관성 덕에 오늘날까지 제도적 교회를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점차 자유가 확대되면서 교회의 안정성은 취약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2,000여 년간 지속되어 왔던 제도 교회에 대한 의심은 극에 달했다. 제도 교회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 가나안 신자 시대에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론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교회에 대한 전망은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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