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 역사 선생이 3·1 독립선언 지도자 33인을 폄훼하는 망언을 했다. 과거 인터넷 강의에서 한 발언이 드러난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가끔 아슬아슬하게 설명해서 불안했는데 결국 사고를 쳤다. 설민석 선생은 학교에서 인기 없는 역사 공부를 재밌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 고마운 역사 강사다. 그러나 설민석은 이번에 드러난 내용과 동일한 글을 이미 책으로 남겼으므로 의도적인 역사 왜곡을 한 것이다.

설민석 씨는 민족대표 33인이 삼일운동 당시 머문 태화관을 '룸살롱'이라고 표현했다. SBS 갈무리

태화관이 룸살롱이라고?

설민석 선생은 "당일날 민족 대표들은 현장에 나가지 않고 광화문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 룸살롱인 태화관에 갔다"고 실언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태화관은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고 광화문에는 본점이 있었다. 그날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는 본점인 광화문이 아니고, 인사동에 있는 지점이었다.

일전에 역사 유적을 탐방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인사동)까지 걸어가 봤다. 4분, 아주 가까운 거리다. 슬슬 뛰어서 되돌아와 보니 2분 40초. 민족 대표들이 지근거리에 자리 잡은 것은 만세 시위를 조정하고 연대하기 위한 조처였다. 얼마든지 다른 장소도 있었겠지만, 뛰어서 3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은 투쟁의 방법이 바뀐 것이지 대중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탑골공원과 연락하고 진행 상황도 기록할 수 있도록 여섯 명의 청년을 옆방에 대기시켰다. 태화관은 궁중요리 전문점이었지만 필요시 연회장으로도 쓰인 곳이다. 김익두 목사가 참여하는 장로교 축하 행사도 본점에서 열렸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따라서 태화관은 요즘의 호텔 개념이고 호텔 연회장에서 거사를 한 것으로 이해함이 옳다.

독립선언서는 2만 1,000장을 인쇄했다. 천도교와 교회의 조직망을 통해 거사 하루 전 전국에 성공적으로 배포 완료했다. 일본 신문(大阪朝日新聞 1919.3.17)도 "3월 1일 오후 2시 첫 시위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선언서는 이미 각 지방으로 빠짐없이 배포되었고 그날 관헌이 손병희 등 33명을 체포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이미 <독립신문> 호외라는 것이 발행되어 그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보도했다. 그 외 선언서 류와 같은 인쇄물이 수십 종이나 발행되었는데... 교묘하게 인쇄물을 이용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총독부를 앞지른 형국이다"라고 할 만큼 주도면밀한 거사 준비를 인정했다.

다만 거사일이 다가오면서 민족 대표들의 고민이 깊어진 것은 무력 충돌 문제였다. 천도교 측은 무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저변을 확대하지 못하고 궤멸된 동학농민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평화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신교 쪽은 처음부터 교리적인 원칙을 내세워 당연히 비폭력이었다. 세계열강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도 폭력 투쟁은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민족 대표들은 투쟁의 원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으로 할 것'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순간 경찰이 민족 대표들을 체포할 것이고 이때 대중은 흥분해서 폭력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민족 대표들은 폭력 사태는 탄압의 구실이 되고 결국 시위는 초반에 좌절된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급히 장소를 바꾸고 종로경찰서에 자진 체포됐다.

설민석은 이 대목에서도 "택시(인력거) 타고 자수한 게 민족 대표 33인"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분들이 호사하고 싶어 그랬을까? 역사 선생으로서 얼마나 가벼운 판단인가. 민족 대표들은 비폭력 무저항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비굴하게 도망가거나 숨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체포되어 정당하게 재판받으면서 투쟁하겠다는 결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설민석은 무엇이든 부정적 의식을 전제하고 보니 실언을 한 것이다. 

민족 대표는 만세 시위를 완벽히 준비했고, 선언서가 낭독되면 국민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민족 대표의 역할은 3·1혁명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한국인의 독립 투쟁의 의지를 밝히는 것까지라고 판단했다. 이런 뜻을 잘 헤아려 백성들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일본 언론에서도 밝히고 있다. "3월 1일 경성에서 1만 여명의 학생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돌 하나 던지는 자가 없어 우리 경비대도 이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상태였다."(大阪朝日新聞 1919.3.14) 벽초 홍명희도 3월 중순 괴산 만세 시위가 폭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적극 만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족 대표들의 뜻을 이해하고 비폭력 시위를 했다는 것이다.

술판을 벌였다고?

설민석 선생은 "낮술을 먹으며 기미독립 선언을 외쳤다"는 저속한 발언을 했다. 민족 지도자들이 대낮에 술판을 벌인 것으로 오해하게 했다.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그렇다. 축배다. 민족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역사의 현장에서 자축한 패러독스다. 친일파나 일신의 영달만 꿈꾸는 기회주의자들의 눈에는 독배지만.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은 "축배를 한 잔 들었을 수는 있지만,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 쪽의 목사나 장로들인데 술판을 벌였다는 느낌의 서술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 대표로 서명하는 순간 서대문형무소 입감 원서를 쓰는 것인데 무슨 술을 마시며 흥청거린다는 것인가? 역사를 보는 우리의 건강한 시선은 영화 '암살'에서 백발백중의 저격수 안옥윤만 독립투사로 보는 것이 아니다. 친일 앞잡이를 암살하라고 밀명을 내린 김구와 김원봉을 당연히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한다. 당시 33인의 연령대를 보면 감히 그분들을 폄훼한 것이 얼마나 송구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100년 전의 50대라면 지금은 어느 연령대일까? 50대 이상이 50%라는 것은 그분들의 투쟁의 자리가 어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개신교 대표 남강 이승훈은 33인 서명 순서로 의견이 분분할 때 "순서는 무슨 순서, 이것은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좌중을 정리했다. 그렇다. 일제강점기의 데스 노트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만세 시위 현장에 같이 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분들의 숭고한 투쟁 정신을 평가절하한다면 역사 현실 해석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민족 대표 중 최고령은 65세 정암 이종훈 열사다. 3년 가까이 옥중에 있었다. 출옥 당시 68세. 설민석과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학자연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어떤 방법의 투쟁을 해야 당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란 말인가? 손병희는 60세에 병보석으로 출감 후 두 해를 버티지 못하고 순국했다. 62세의 이종일, 58세의 양한묵, 박준승 열사가 고문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가장 젊은 나이의 이갑성조차 "나는 감옥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감옥은 지옥 이상의 지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절규했다.

꼭 시위 현장에서 죽어야만 당신들이 주장하는 독립투사인가? 3·1혁명 후 5월까지 전국적으로 1,500여 회 시위가 일어났다. 주동 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 중 개신교가 주도한 곳이 78개, 천도교가 66개, 개신교와 천도교 합작이 42개 지역이었다. 만세 시위 60%를 양 교단이 주도했다는 것은 교단 지도자들의 옥중 고문의 비명 소리가 있었기에 강력한 추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역사를 보자. 존경받는 민주 인사가 옥중에 있는 것만으로도 민주 양심 세력은 결속하고 투쟁의 강도를 강고히 할 수 있었다.

대부분 변절자라고?

설민석 선생은 "1920년대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게 됩니다"라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3명이 등재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민족 대표가 일제에 비타협적이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면서 순국한다. 설민석은 도대체 무슨 자료에 근거해서 이런 허위사실을 확정적으로 주장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고령 정암 이종훈 열사의 손녀 이정순 여사가 우리 교회 권사로 있다. 그 집안 이야기 중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이 3대를 이어 독립투쟁을 한 애국지사의 가문이라는 것이다. 정암 선생은 30대 청년 시절 동학농민전쟁의 최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사였지만 일제의 고문으로 망가진 몸이 되었다. 석방 후에도 결기를 굽히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고려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투쟁한다. 말년에는 만주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지원하다가 타계한다. 아들은 일찍이 의병 투쟁 중 용문산에서 전사했다. 보성전문학교 학생인 손자 이태훈은 방정환과 함께 3·1혁명 당시 민족 대표들의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배포했다.

민족 대표 중 가장 늦게까지 옥중에 있었던 이승훈은 출옥 후 오산학교에서 후학 양성과 언론사를 통한 민족 해방 투쟁을 계속했다. 신석구 목사는 전승 기념 예배 거부로 체포돼 구금 중 해방을 맞이했다. 신홍식 목사 등 수 명의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권동진은 광주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김병조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홍병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이런 민족 해방 투쟁의 열사들을, 설민석이 알 듯 모를 듯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비하할 때는 정말 불편했다.

마담 주옥경이라고?

설민석 선생은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랑 사귀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마담이 DC(할인)해 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는데"라는 망언을 한다. 이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다. 당시 기생은 3등급으로 나뉘는데, 일패 기생은 음악과 서화의 재능을 가진 여성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연예인급이다. 다음 이패와 삼패 기생은 접대부였다. 주옥경은 일패 기생으로 거사 6년 전 이미 손병희의 부인이 된다. 민족 대표들 간의 연락과 안내를 맡은 독립선언의 숨은 여전사였다. 천도교 여성 초대 회장이었다. 또한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도 큰 공헌을 한 분이다.

민족 지도자의 개인사를 근거 없이 말하는 행위도 무례하지만 거짓으로 비아냥거리는 강연 행태는 더욱 나쁘다. 설민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도 사과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노력했다. 역사라는 학문은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는 등의 말로 변명했다. 손병희 선생의 유족들이 설민석 사무실까지 찾아가서 항의한 핵심은 주옥경 여사에 대한 것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답변이 없었다. 이 문제는 위의 어떤 잘못보다 위중한 것으로 후손들에게 정중히 용서를 빌어야 한다.

역사에 대한 예의

설민석은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교육대학원에서 역사 교육학(석사)을 전공했다. 사실 우리나라 대학원의 역사 수업 현장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지난한 토론을 필요로 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3·1혁명의 투쟁 주체와 방법에 대한 문제다. 내가 공부한 대학원에서도 결론 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끝장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교수의 일방적 주장이 해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의 사태는 사실 한국 역사학계의 어느 한 쪽 주장을 대변한 것이다. 설민석 선생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계가 1980년대 이후 3·1혁명의 중심 세력을 '대중'을 전제로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족 대표가 자진해서 경찰에 신고하고 체포당한 것을 비겁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비판했던 연구 경향이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연히 비폭력 투쟁이 더 강한 힘이라는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의 무장투쟁과 비무장 인민의 싸움을 구분 짓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3·1혁명을 폭력 없는 평화시위로 했던 것은, 잔악한 일본 경찰에게 폭력 유발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민족 대표자들의 고뇌에 찬 결정이었다. 민족 대표자들과 학생이나 대중들 각각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대중의 투쟁을 부각시키고자 민족 대표자들의 희생을 폄훼하는 것이 바로 역사 왜곡이다.

특히 성경의 가르침으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는 우리에게는 간단명료한 문제다. 3·1혁명은 세례요한이 정답이다. 헤롯왕의 사생활을 시비하다가 감옥에 가고 목이 달아난 사건 말이다. 정의로운 일에 대해 말하고 행동한 후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유감없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피의 희생이 힘이고 답이다.

3·1혁명은 비폭력으로 세계사에 신기원을 수립하여 다음 해에 일어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영향을 줬다. 이것을 모방해서 흑인 인권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 무저항으로 승리한다. 비폭력 해방 투쟁의 세계 역사에서도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거사다. 그래서 당시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결정은 옳았다. 오늘 우리는 천도교와 개신교의 위대한 선조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예의다.

박원홍 / 서문교회 담임목사, 꿈의숲기독교혁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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