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이름부터 제대로 부르자

3·1 운동의 처음 이름은 '3·1 대혁명'이었다. 일제는 폭동, 난동이라 불렀다. 운동이라고 하면 자칫 '국채보상운동'이나 '문맹 퇴치 운동' 수준으로 오해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3·1 혁명'이라고 불렀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서는 '삼일 대혁명'이라고 했다. 중국 상해의 <민국일보>도 '조선 혁명 운동'이라고 했다.

선조들의 영광스러운 투쟁의 역사가 갑자기 평가절하되고 격하된 것은 친일 국회의원들(이승만도 동의) 때문이다. 해방 후 1948년 국회에서 '3·1 운동'으로 결정했다. 한심한 결의를 한 것이다. 반가운 일은 2015년에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뀐 것처럼 '3·1 운동'을 '3·1 혁명'으로 바꾸자는 의식 있는 국회의원들과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 위상을 바르게 평가하는 타당한 주장이다. '광주 사태'라 하지 않고 '5·18 광주 민중 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3·1 혁명은 세계를 놀라게 한 피의 투쟁이고 민족 독립을 열망하는 백성의 통곡이었다. 간혹 영어로 'March First Movement'라 번역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난다. 신속히 제 이름을 찾아 줘야 한다. '을사 보호 조약'은 이미 '을사늑약'이라 부르고 있다.

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선언 후 자수했는가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자수한 것에 대해 일부 역사학계는 비판한다. 탑골공원에서 민중 시위를 주도하면서 투쟁의 선봉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비겁하고 유약한 리더십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7,500명이 살해된 결과에 대해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한데, 이를 논의한 학술 모임은 아직 없었다.

3·1 혁명 중 가장 처참한 현장이 제암리교회당 방화 학살 사건이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동정할 이유는 털끝만큼도 없지만 주재소가 불타고 순사 2명이 살해되는 참사가 있은 후 방화, 발포, 추격 사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진지한 분석과 토론이 필요하다.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무저항 투쟁과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 등과의 비교 연구도 일천하다.

당시 민족 대표들은 비무장 불복종 투쟁을 해야 열강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무저항 투쟁이 백성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고뇌가 있었다. 군중심리를 자극할 경우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이 유발될 것을 알았다. 개신교 대표들은 무저항 비폭력이 성경의 기본 가르침이라고 주문했다.

개신교에서는 전국 교회를 뛰어다니면서 일일이 도장을 받아 대표를 선임했다. 그들은 이미 민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는 자기 고백서에 날인한 셈이었다. 일종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나 다름없는 자기희생이었다. 이런 숭고한 참여 정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학문의 정도가 아니다.

천도교와 개신교의
아름다운 연대

동학은 1905년 천도교로 개명했다. 본래 동학은 개벽 사상을 모토로 이상적인 새로운 사회를 열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회변혁 운동을 추진했다. 1910년대에는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18년 12월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독립운동하기로 의기투합하고 당시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 건의했다. 손병희는 이를 수락하고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 특별 기도회를 선포했다.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 교인들을 결속하고 단속하기 위함이었다.

천도교는 전국적으로 기도회까지 열면서 결속을 다졌지만 부정적 여론이 일어나자 외연을 확대해 다른 교파와 연대하기로 했다. 2월 11일에 천도교에서 이승훈을 통해 개신교의 동참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즉시로 길선주, 함태영과 뜻을 같이하고 동지들을 모았다. 2월 24일에 양 교단 대표가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했다. 민족 대표는 천도교와 개신교에서 각각 15명씩 선임해 서명하기로 했다.

개신교가 전국을 다니며 도장을 받는 중에 한 사람이 더 늘어서 불가불 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이 됐다. 하여 개신교가 서명 인원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일은 아니다. 다만 3·1 혁명의 기소자 1만 9,500여 명 중 천도교인이 약 2,300명, 개신교인이 3,300여 명인 것에는 또 다른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가 천도교에 진 빚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인쇄는 천도교가 맡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이를 제출하는 일은 개신교가 맡았다. 전국적 배부는 합동으로 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인쇄했다. 2만여 장을 거사 3일 전 인쇄를 완료했다. 인쇄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고등계 형사인 신승희가 우연히 인쇄소 앞을 지나다가 인쇄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거국적인 혁명이 무산될 위기에 손병희가 직접 나서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주고 위기를 모면했다. 천도교의 경제적인 헌신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개신교 지도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해 천도교는 재정을 지원했다. 손병희가 거금 5,000원을 이승훈에게 차용해 줬다. 그 자금으로 지방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갈 수 있었으며,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 독립 자금은 아직까지 빚으로 남아 있다.

선교사들의
3·1 혁명

선교사들은 시위 이전에는 정치적 중립이었다. 시위 초기에는 거의 방관하거나 반대했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성도들 신변에 문제가 생기게 되자 돕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3·1 혁명 이후에는 원활한 선교 사업을 명분으로 우호적, 타협적 내지 친일적 관계로 전환했다. 심지어 백인 우월 의식의 행태로 인종차별적 편견까지 노정했다. 결국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박원홍 / 서문교회 담임목사, 꿈의숲기독교혁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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