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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영성을 버린 교회의 도덕적 위기
[이제는 바꿔야 할 교회 윤리] ③참된 예수의 영성
  •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2.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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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영성과 ​​​​
​​하나님 신앙

광야의 예수가 받으셨던 시험은 우리 삶에 다가오는 유혹의 전조를 보여 준 사건이었다. 유혹자가 예수에게 다가와 던진 첫 시험은 허기진 육체의 요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유혹자는 허기진 삶은 "하나님 아들"의 삶이 아니라는 전제를 암시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주의 특권을 사용하면서 배부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인간이 가진 욕망 중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욕망은 먹는 일과 생명을 하나로 묶어 놓은 식욕이다. 식욕은 이렇듯 원초적 욕망이다. 인간에게는 성욕과 같은 육체적 욕망도 있다. 그러나 성욕을 충족하지 않는다 하여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식욕이 충족된 후에 다가오는 잉여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생존과 직결된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식욕이다. 식욕의 욕망을 제어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위하여 종교는 금욕 훈련의 기초로서 자발적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예수는 유혹자와 달리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하나님의 아들 됨"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됨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데 있다고 믿었다. 욕망 충족의 삶은 예수에게 있어서 "욕망 충족만의 죽음"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유혹자가 내건 시험을 일러 "빵만의 죽음"을 택하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욕망과의 타협은 종교의 도덕적 위기의 근원이다. 빵만의 삶은 육체적 소욕의 출발이다. 그것이 물욕, 권력욕, 성욕으로 이어지는 경쟁의 연쇄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며 시험했던 유혹자는 예수를 성전 마루로 데리고 가서 다시 그를 시험했다. 내려다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세워진 예수를 향하여 그 불안을 안전으로 바꾸라고 유혹했다. 유혹자는 예수가 성전 마루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이 안전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해명을 달았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불안을 버리라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확실한 세상에서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인생의 한계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라는 것을 일러 죽음에 이르는 실존의 병이라고 했다. 실존이 불안한 것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 곧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혹자는 그 불안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 위험한 성전 마루의 불안을 안전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안전은 불안과 비교하면 위협이 없지만, 자유가 박탈당하는 상태다. 안전을 찾아 선택한 것이 우리의 삶을 옥죄는 옥쇄가 되는 경험을 우리는 무수히 하게 된다. 돈과 권력이라는 안전장치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

유혹자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전 마루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안전을 요구하는 생존의 본능이 왜 유혹일까? 바로 나의 안전을 위하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서를 뒤집으며 하나님을 나의 안전의 도구로 삼으라는 요구인 까닭이다. 예수는 유혹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거절당한 유혹자는 또다시 예수를 온 천하가 다 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권세를 잡는 방법을 일러준다. 그 방법은 유혹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유혹자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삶을 선택하라는 유혹이다.

우리의 삶은 예수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늘 서게 된다. 그때 예수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주 너의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예수는 선명한 하나님 신앙의 길에 서서 유혹자의 유혹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수의 영성이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 신앙이 나의 안전의 도구, 나의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길과 다른
제국의 길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 반도를 중심으로 200개 이상의 도시국가들이 적자생존의 투쟁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도시국가는 인구 10만을 넘지 않는 소규모의 부족 공동체였다.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전쟁 포로로 잡혀 온 노예를 제외하고 비교적 평등했다. 귀족들도 나름대로 생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도시국가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무력 충돌은 생존을 보장해 주는 영웅적 전사들을 예찬하는 문화를 형성했다. 영웅들이란 자기편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사였고, 적을 향해서는 무자비한 학살자였다. 따라서 군사 문화적인 영웅주의는 로마제국의 기초가 되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게 했고, 이긴 자는 패배한 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패배자의 재산을 몰수해서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처와 자식들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노예로 삼았다. 승리를 얻은 강한 자는 막대한 재산과 쾌락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는 제국의 영속성을 위하여 제국 안 신민들의 풍요와 번영을 위하여 국경을 끝없이 확대해 나갔다. 로마제국은 주변국들을 착취하는 권력의 중심부와 무한한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하는 막강한 군사력, 그리고 다른 문화권을 복속시키는 문화적 타협의 정신이 있었기에 그 생명력이 강했다.

불행하게도 4세기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는 교회 성장을 위하여 유혹자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던 예수의 영성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어거스틴 이후 주류 교회가 스스로 로마제국의 성공한 종교로 변질하여 갔기 때문이다. 제국에 의하여 박해받던 기독교가 박해하는 제국의 기독교가 되었다. 이것을 에른스트 트뢸치는 "타협"이라고 보았다. 로마제국의 황제와 고관, 부유한 이들을 포함한 대중을 얻기 위하여, 교회 성장을 위하여, 4세기 이후의 교회는 예수의 단호한 가르침을 약화하고, 외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 이전의 교회와 이후의 교회는 예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워드 요더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는 슬며시 "예수의 말씀을 우리는 지킬 수 없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종의 타협적인 주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의 영성은 제거되고 로마의 가치들이 교회에 물들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로마와 타협한 죄인이므로 예수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행위를 따라 의로워진다는 소리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이제부터는 신앙 의인의 길만이 기독교의 진정한 구원의 가르침이다."

그 결과,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초대교회 기독교인과는 달리, 탐욕을 부리고, 부정한 권력을 누리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도 하고, 풍요와 사치와 향락도 모두 누리려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용서를 받아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탐욕에 빠진 교회

초대교회에는 정기적인 헌금이 없었다. 하나님 은혜에 감동한 이들이 소유에 집착하던 삶의 태도를 버리고 신앙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이들의 헌물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운영되었다. 어거스틴 시대 이후 제국의 지배자들과 부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헌물들도 상당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십일조나 각종 명칭을 단 헌금은 없었다. 성직자들이 제국의 권력자들의 삶에 버금가는 생활수준을 얻기 위하여 십일조를 거둘 것을 의논하기 시작한 시점은 567년 투르 공의회였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십일조를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교황 아드리안 I세 때인 787년이다.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 말까지만 해도 강제적인 헌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787년 이전 서방 교회는 헌금을 율법으로 만들어 요구하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비롯된 중세 교회가 만든 십일조 헌금은 세금과 거의 같은 차원에서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당시엔 이렇게 모은 헌금은 개교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헌금의 일부는 반드시 고아, 과부, 그리고 사회적으로 불리한 이방인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성서적 원칙이 있었다.

더구나 드려진 헌금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하늘의 축복을 약속하는 논리는 신약성서나 예수의 정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약속한 일이 없다. 그는 제자들에게 명료하게 청빈한 삶을 요구했다.

서구 사회에서 국가권력이 십일조를 거두는 일도 있었으나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하지만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이탈리아 등의 나라에서는 지금도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이들에 한해서 보통 국가에 내는 세금의 8%를 전후해 종교세를 내고 있다. 그 액수를 따져 보면 총수입의 1.5~3% 정도다.

이 경우 국가는 세금처럼 기여금을 모아 교회의 유지와 성직자들의 생활비를 충당한다. 개체 교회에서 신도들이 합의하여 헌금하는 경우가 있는 데, 이는 주로 가난한 이들이나 곤경을 겪은 이들을 긴급하게 도우려는 헌금이다.

미국에서도 세금의 형태로 십일조를 거두는 일은 1791년 미국 수정헌법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교회마다 전통이 다르지만, 신학적으로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 의무 조항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오늘날 십일조를 세금처럼 거두던 가톨릭교회도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가톨릭교회는 십일조가 아닌 자발적 의무금을 받고 있으며 그 기준은 자기 수입의 3% 정도로 하고 있다. 미국연합감리교회(UMC)도 교회 멤버십을 가진 사람은 1년 기여금을 자기 신앙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하고 납부한다.

그러나 수입의 10%를 반드시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집단도 있다. 일종의 자유교회로서 국가의 관리를 받는 교회가 아닌 종교 집단, 예를 들어 여호와의증인, 제7일안식일교회,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 나사렛교회, 몰몬교회, 침례교회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의 전통과 상관없이 십일조는 막론하고 교회마다 다르지만 각종 헌금이 수 개에서 수십 가지로 나누어 받고 있다. 십일조 외에도 일반 헌금, 특별 헌금, 절기 헌금으로 분류되어 그 안에서 세밀하게 나뉘는 헌금 종류가 무려 85가지나 된다. 간혹 하나님을 마술 방망이를 든 하나님(deus ex machina)으로 착각하게 하며, 헌금이 허황된 축복의 근거나 천박한 자본주의적 재투자의 의미로 예찬되거나 간증거리가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물신화 현상이다. 하루속히 이 그릇된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교단은 있어도 개교회주의를 선택한 한국교회의 경우 목회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따라 헌금의 종류가 달라지고, 드려진 헌금은 모두 목사가 지배할 수 있는 개교회의 것이 된다는 데 있다. 모든 교회가 교회의 성장과 헌금 액수는 정비례한다고 여기고 있어서 교회의 양적 성장은 곧 신도 수를 의미하고, 신도의 많고 적음은 그 교회의 수입의 많고 적음과 직결된다.

여기서 생사를 건 교회 성장을 향한 노력이 추동되기도 한다. 신자가 적은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고, 신자가 많은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자가 부유하고 많아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되고, 부유한 교회의 목사는 부유한 목사가 되지만, 신자의 헌금이 미약한 교회의 목사는 가난한 목사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가장 비신학적인 주장이 철칙처럼 강조된다. 말라기서를 인용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시험하라"고 외치는 부흥사들의 메시지다.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내 축복의 수단으로 여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드려진 헌금이 축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신학은 없다. 그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투전판에서나 있을 법한 "돈 놓고 돈 먹기" 논리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를 신학적이거나 성서적 정당성을 묻지 않고 당연한 듯 헌금을 받아들이려는 목사들로 넘쳐난다. 부유한 교회는 거두어들인 막대한 헌금을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와 별로 나누지도 않는다.

특별한 예가 되겠지만, 어느 교회는 수천 억 원짜리 화려한 교회를 저희들이 짓고서 "주님이 하셨다"며 자랑하고, 어느 교회는 천 억에 가까운 비자금을 신자 몰래 모아 두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부유한 교회의 목사는 은퇴하며 자신이 평생 모범을 보이며 교회에 바쳤던 헌금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교회로부터 받아 낸다.

가난한 교회에서는 언감생심이지만, 가난한 교회의 목사들 역시 그러한 부유한 교회를 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탐욕에 빠진 부유한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미화된 탐욕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예수의 영성과는 너무나 먼 탐욕에 빠진 교회의 한 모습이다.

예수의 영성을 버린 교회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는 이미 앞서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가 겪었던 광야의 시험에서 상징화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부귀와 권세를 주겠다며 "내게 엎드려 절하라"는 유혹자의 요구 앞에서 탐욕에 빠진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두어들인 돈을 탐욕스럽게 나누고, 재투자하고, 부동산을 사들이고, 문어발처럼 확장하기를 경쟁적으로 하는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예수가 더는 자신들 삶의 모델이라고 보지 않는 전통을 이어받은 개신교에서는 이제 예수가 경고했던 육체의 욕망, 안전의 욕망, 권력의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명예와 권력은 모두 걸머쥐려는 욕망으로 넘쳐난다.

그 이름도 순수한 복음(pure Gospel)이라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큰 대형 교회를 이루어 낸 목사는 은퇴하면서 200억 원의 퇴직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세간의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에 그가 관리할 수 있는 선교비도 수백 억에 이른다는 보도도 나왔고, 교회 헌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 백 억대의 헌금을 끌어내 수백 억대의 교회를 짓고 자기 아들을 담임으로 세웠다. 전국에서 은퇴를 앞둔 목사들은 이들을 모범 삼아 은퇴 후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묘안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다.

목사로서 한 정당의 관리인이 된 어느 목사는 유대 땅 변두리에서 태어난 예수를 따르겠다며 세운 교회를 "갈릴리"교회라고 이름 짓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장 부패한 대통령으로 규정될 처지에 놓인 이를 옹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5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은퇴하면서 국가공무원에 준해 퇴직금도 받고, 매월 자신이 받던 급여의 70%를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그 교회에서 받는다. 교회가 연금처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가 마련한 사택에서 부부가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권리도 받았다. 교회법에는 없는 안전한 노후의 조건이다.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더불어 살겠다며 젊은 날 의적 집단을 연상하게 하는 "활빈교회"를 세웠던 어느 목사는 명성과 신뢰를 얻어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모았다. 그는 교회가 커지자 신자들의 헌금인 교회 돈 20억대 유용 의혹으로 시끄럽더니 은퇴하면서 20억 원 상당의 돈과 주택을 교회로부터 받아 냈다. 젊은 날 가난한 노동자와 더불어 살겠던 이, 가난한 빈민과 더불어 살겠다던 이들이 이 정도다.

물론 은퇴하면서 얻어 낼 것이 없는 목사가 훨씬 더 많고, 청렴한 목사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부패하고 타락한 목사들의 행태가 교회에서도 걸러지지 않고, 교단에서도 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동업자 목사들끼리는 은퇴비 받아 내는 노하우를 서로 전해 주거나, 서로 모른 척해 주며 지나간다.

이 풍조가 해외의 이민 교회까지 퍼져 뉴저지의 영성가로 알려진 어느 목사는 은퇴하면서 교회에 300만 불을 요구하여 교회를 큰 분란에 빠뜨렸다. 문제는 이런 목사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런 이들의 영성 지도를 받은 신도들이 우리 사회를 극도로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영성을 버린 이들이 욕망 충족과 자신만의 안전과 지배 권력의 획득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친 까닭이다. 이들의 교인들은 "교회에서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지 죄인들을 행위로 의롭게 하려는 윤리를 가르치거나 정의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배운다. 이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예수의 정신에서도, 종교 개혁 사상의 빛에서도 틀린 것이다. 예수의 정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돈과 욕망과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수명이 50세도 채 안 되던 19세기 초의 정황과는 달리 한국인의 현재 평균 수명은 83세에 이르고 있다. 건강한 이는 은퇴 후 20년에서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생 예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는 유대교적인 그릇된 헌금관을 신도들에게 가르치며 스스로 희생적인 헌금의 율법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목회자의 의무는 비신학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의 희생적인 헌금에 감동하여 신자들이 의무적인 헌금을 반강제로, 축복에 대한 미신적인 신앙으로 헌금하는 것도 신학적인 정당성이 결여된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 놓고 은퇴하면서 자신의 공로를 셈하며 한몫을 챙기는 목회자가 어찌 예수의 제자인가? "주 너희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예수의 단호한 음성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들려와야 한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과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보다 맘몬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목사들은 은퇴하면서 하나님보다는 맘몬을 선택하고 있다. 이 길이 어찌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청빈을 당부했던 예수의 길인가?

만에 하나 은퇴하면서 교회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목사의 은퇴 후의 삶은 결국 주변과 자식들의 근심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성서에 따른 의미에서 헌금은 십일조가 아니라 즐겁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형편대로 드리는 것"이다. 성서적 의미에서 본다면 자발적으로 드려진 헌금은 하나님의 교회를 관리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 병든 이, 나그네 된 자를 돌보고, 목사들의 생활비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

독일 교회나 미국 교회의 목사들은 헌금의 의무가 없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원칙적으로 목사는 신도들의 기여금으로 최소의 생활비를 받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받은 돈 일부를 가지고 헌금의 모범을 보일 의무가 없다. 그보다는 노후의 소득 없는 긴 삶의 여정을 준비할 수 있는 합리적 지혜도 필요하다.

바람직하다면 목사의 노후는 교단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제는 목사가 과도한 헌금의 모범을 보이며 신자들의 헌금 의무를 조장하는 거짓 헌금의 태도를 버리고 차라리 자신의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탐욕은 탐욕을 낳는다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부유한 자들의 교회가 될 때, 아니 부유한 교회를 선망하는 교회가 될 때 그 교회의 영성은 물신주의에 빠진 타락한 영성에 사로잡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를 가진 이들은 교환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즉 소유와 권력은 한통속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물신주의에 사로잡히면 소유를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를 선망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 인식하는 인식론적 오류가 일어난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거리가 먼 사람으로 인식된다. 동시에 참된 예수의 제자도(弟子道), 하나님 신앙의 정결함과 성결의 덕,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실천보다 소유와 권력의 많고 큼에 따라서 가치를 판단하는 속된 평가 기준이 유통되는 것이다.

교회가 빠진 물신적 탐욕은 결국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중세 교회는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미신적 가르침에서 야기하는 하나님의 심판, 사후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심약한 신자들의 복종이 있었기에 교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일면 이러한 비성서적인 권력 종교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비록 온전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교회가 세속 권력을 이용하고,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을 이용하는 행태를 비판할 수 있는 신앙의 원칙을 성서에서 재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유혹자의 유혹을 간파하고 그것을 이겨 낼 수 있는 예수의 영성을 버린 이들에 의하여 오늘 이 시대에서도 실패하고 있다. 어거스틴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로마제국과의 타협 이후 교회 안에서 예수의 영성을 버린 이들은 비성서적인 온갖 헌금을 수납하여 스스로를 살찌웠고, 신자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교회를 온통 화려한 것으로 채워 넣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교회의 나라를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오류를 오류로 인식할 수 없는 신자들은 그들이 세운 교회의 나라의 화려함에 스스로 감격하며 손뼉을 치곤했다.

이런 오류는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탐욕에 사로잡힌 교회의 실상이 이러한 오류의 사실 증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오류가 교회의 타락을 넘어 우리 사회 공공성의 영역까지 부패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 사회에서 과도한 헌금을 받아 내던 교회들의 탐욕은 헌법에 의하여 금지되었고, 북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축적하고 있었던 막대한 부는 대부분 국가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주로 성직자들의 임의성에 따라 움직여지는 자유교회에서는 과도한 헌금을 신앙적 표현으로 실천하는 사례들이 계속 지속하여 왔다.

이런 교회들은 폐쇄적이어서 사회적 성숙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윤리학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들과는 달리 탐욕을 버린 북구의 교회들은 온 세상을 지배해 오던 종교의 승리주의적인 신앙을 상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성서를 새롭게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 사상과 기본 가치에 대한 승인에서 교회의 실천 과제를 찾기 시작했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교회들은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민주 사회의 기본 가치인 정의, 평등, 평화, 자유, 연대, 생명 가치를 지켜 낼 능력으로 재해석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욕을 비판할 능력도 없고, 나아가 탐욕에 사로잡힌 교회는 민주주의나 기본 가치를 지켜 낼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가치들은 소유와 권력에 대하여 탐욕을 부린 이들을 오히려 비판하고 교정하는 해방적 가치들로 기능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욕에 사로잡힌 교회는 운명적으로 반민주적인 전근대성을 옹호하고, 정의보다는 불평등한 질서를, 평화보다는 갈등을, 자유와 연대보다는 차별을, 생명보다는 반생명적 가치를 옹호하는 어리석음을 신앙으로 오인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한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부패의 증거는 허다하다. 한국교회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민주주의보다는 독재를 옹호해 왔고, 가난한 노동자들보다는 부유한 자들을 더 사랑했으며, 평등주의적 사고보다는 여성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을 신앙의 행위인 양 당연시한다. 심지어 한국전쟁을 비극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호전적인 군사주의적인 승리주의를 신앙처럼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행태가 어떻게 예수의 평화의 영성과 관계가 되는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예수의 영성과는 거리가 먼, 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가치를 승인한 전통에서 나온 색 바랜 십자군 정신이나 정당 전쟁 이론을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묻는 질문
예수, 누구신가?

며칠 전 사회학을 전공한 크리스천 교수를 만나 함께 점심을 나누며 요즈음 젊은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전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개독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사회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요즈음 일부 신학자들도, 많은 젊은 목회자들도 자조적으로 기독교가 얼마만큼은 "개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제 막 신앙을 가지려는 신자들 앞에서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런 평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통계가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한 한국교회 신뢰도는 2008년(18.4%), 2009년(19.1%), 2010년(17.6%)에 이어 3년 만에 진행한 2013년의 결과는 19.4%다. 한국 사회 성인 중 20%도 안 되는 이들이 교회를 신뢰하고 있다고 답했다. 심지어 교회에 나가는 개신교인도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본인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힌 응답자 중 47.5%만이 "교회를 신뢰한다"고 답해 신뢰도는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이는 2010년(59%)보다 더욱 낮아진 것으로 교회 내부적으로도 점차 신뢰를 잃고 있는 셈이다. 비종교인 중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겨우 8.4%에 불과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 교회에는 너무나 많은 부패와 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 참된 신앙의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짧은 우리는 서양 세계에서 전개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질문하던 그 다양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가 해석해 준 예수를 따라가다 보니 성서의 예수는 놓치고 물질에 탐욕스러운 종교, 호전적인 종교, 욕망 충족의 종교, 배타적인 종교, 반과학적인 종교, 복 받는 종교, 비지성적인 종교 등등의 호칭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사회적 신뢰까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남아프리카 신학자 알렌 보잭(Allen A. Boesak)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버리어 내팽개쳐진 진리는 새롭게 솟구친다!" 비록 버려졌다 할지라도, 진리는 진리이므로 다시 생명력 있게 날아오르며 솟구친다는 것이다. 늦기 전에 우리는 "예수의 영성"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는 누구신지" 다시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참된 예수를 따라왔다면, 참된 예수의 영성을 배웠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버린 예수의 영성을 다시 회복한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다시 진리의 등불을 밝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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