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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에 아부한 한국교회도 탄핵당했다
[기고] 박충구 교수가 본 촛불 민심, 그리고 부역자들
  •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6.12.13 10:11

6차에 걸친 촛불 집회는 마침내 사상 최대 인원인 232만 명의 평화로운 시위 행렬로 이어졌다. 마침내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탄핵을 통해 정지시켰다. 나는 탄핵 열풍 이면에는 박근혜 정권이 보여 준 통치 방식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 비판 의식이 깊이 작동했다고 본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나온 지난 3년여 동안 우리는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수사가 정권에 의하여 가로막히는 것을 보았고, 세월호 참사 사태를 겪으면서 자식 잃고 피눈물 흘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이 나라 권력에 의하여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이 정부의 정직성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쌍용자동차, 용산 참사, 그리고 강정과 밀양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이 나라 정권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희망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정권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정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나 한반도 사드 배치, 그리고 천문학적인 무기 구입 결정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자주와 평화에서 거리가 먼 정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남북의 갈등과 적대성의 증가는 마침내 남북 갈등의 충격 장치로 자리 잡고 있었던 개성공단을 일시에 폐쇄해 버리는 무모한 결정에 이르러 개성공단 입주 기업과 근로자들을 거리로 내몰게 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이 정권이 주는 행복을 느껴 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편협한 정권의 편 가르기

마침내 박근혜 정권의 속내가 드러나게 된 계기는 그간 우리가 의심해 왔던 박근혜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대한 확인 과정에서였다. 대통령 선거 과정의 불투명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주변을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었던 공안 검사들로 채우던 정권을 바라보던 국민들은 불안해했었다.

국민이 직접선거를 통해 위임해 준 헌법적 권한을 최순실이라는 측근에게 암암리에 맡겨 놓고 그의 판단과 행위와 사고를 통하여 국정을 수행해 왔다는 의혹이 증폭되면서, 그리고 용을 암시하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과 관련하여 그간 권력이 행사되어 오던 방식이 일반의 경악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고의 권력자가 재벌 총수들을 불러들여 독대하면서 자신이 관심 있는 재단을 위해 자진 헌납을 요구한 사실도 밝혀졌다. 재벌로부터 돈을 받으며 대가성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를 경영할 인물들을 비선을 통해 영입 임명하는가 하면 자기 집단의 의지에서 거리가 먼 이들을 권력 구조에서 축출 배제시키는 동시에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정권의 편견을 노골화했다. 영화, 연극, 연예계, 문학 등의 영역에서 근 만 명에 이르는 이들을 정권에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국가 예산 배정에서 철저히 배제시키는 불이익을 줬다.

이러한 권력의 부당한 오용과 남용을 정당화한 것은 이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좌파로 간주하는 행태였다. 이러한 편협한 공권력의 행사는 은밀하지만 매우 노골적으로, 우리 사회 안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침해하는 범법 행위를 결과함으로 무수한 사람의 생존권과 희망을 짓밟아 왔던 것이다. 일개 정권이 편협하고 자의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국민을 편 가르고 있었다.

회개의 대상은 항상 정권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은 '우리'였다. 2015년 회초리기도회 모습. 뉴스앤조이 이용필

한국교회의 정치적 아부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교하게,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노골화되고 있을 때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던가? 정권과 교회의 추잡한 연대는 교회가 정권을 향하여 추파를 던지는 행위로 점철된 시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나라에는 정직하고 진실한 목회자들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이런 이들은 한국교회를 대변할 기회가 없었다. 일부 부유한 교회의 목사들이 돈과 정치로 교권을 장악하고 권력 앞에서 한국교회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한결같이 입술에 기름을 바른 이들이었다. 김 아무개 목사는 한반도 평화 정책을 뒤엎은 박근혜를 일러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훌륭한 통치자"라고 추켜세우는가 하면,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은 5,000만 민족 중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했다. 이런 이들의 파렴치한 종교적 아부는 2014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극에 달했다. 김 아무개 목사는 이승만, 박정희의 업적을 치켜올리면서 박근혜를 일러 "고레스 같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목사들의 아부가 가득한 정치 망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박근혜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홍 아무개 목사는 박근혜를 일러 "영국의 대처 수상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고 주장했고, 소 아무개 목사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섞어 가며 박근혜를 "여성으로서 미와 덕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가지고 있는 분"이라 칭송했다.

한때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를 하던 김 아무개 목사는 박근혜에게 "하야하라는 소리는 무책임한 소리"라며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하는 80% 국민을 매도했다. 서 아무개 목사 같은 이는 시위 전문 선동가로 변신하여 서울역 광장에서 박사모 회원들의 결집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역겹기 짝이 없다. 무엇이 이들을 이런 행태에 빠지게 한 것일까?

이들의 행동 양식을 생산하는 사회윤리 의식은 자신이 교회 안에서 행사하는 전근대적인 권력 행사 방법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들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전근대적인 권력 세습, 공과 사가 구별되지 않는 공식·비공식적인 회계 처리 방식, 담임목사의 절대적인 인사권 행사,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는 오래전 제거된 전근대적인 낡은 신분적 질서로 신앙 공동체를 위계화 짓는 등 구시대 유산에 천작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평생 사유화하고, 기름진 것으로 배불리는 데에 습성화되어 권력과 금력의 노예가 된 이들이 대부분이다. 대형 교회 목사라는 자들은 거반이 자기 교회를 자식들에게 세습해 주거나 신자들의 헌금으로 자기 자식들을 배불린 이들이다. 이들의 변명을 보면 가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니 자식에게 물려줘도 세습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대한민국은 국민의 것이니 대통령 권한을 최순실에게 맡겨도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아기적인 논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교회와 정치의 부도덕한 연대

교회와 정치의 부도덕한 연대는 사실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교리의 형성 과정에서도 중요한 교리를 확정 짓고 이단을 규정할 때 교회 지도자들은 권력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했던 흔적이 많다. 서구에서는 계몽주의 이후 사회가 합리화되면서 제정일치적 사고에서 벗어나면서 종교의 영역의 권위에서 입법, 사법적 권한을 빼앗았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 정치적 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대신 정치로부터 독립성을 부여받고, 그 독립성을 주장하며 교회 안에서는 온갖 부정한 권력과 특권을 독차지해 왔다. 이들은 왕조 중심적 권력 이해를 담고 있는 이야기를 성서에서 찾아 내 정치권력을 향한 복종의 윤리를 가르쳐 왔다.

그 결과, 교회는 오랫동안 사회윤리학적으로 가장 전근대적인 집단의 하나로 머물게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현실적으로 강력한 권력과 친화성을 가지는 방법은 매우 쉽다. 권력자의 특권을 옹호해 주면 그 반대급부로 성직자의 권력과 권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온갖 부정과 비리가 만연해도 정치권력이 모른 척해 온 이유다.

결국 이러한 전근대적인 정치 신학적 유산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리와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고,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상실하게 만드는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회의 비리와 적폐를 비판하는 것을 사탄의 역사라고 매도하지만, 나는 정작 사탄의 역사를 말하려면 교회의 전근대적인 정치 윤리의 사탄성을 먼저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정치의 부도덕한 연대는 "보수의 연대"에서 첨예하게 강화된다. 근대 이후 사회의 다원성을 긍정하는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 인권 이해는 19세기 이전에 팽배하던 가부장적 편견과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 그리고 운명론적인 생명 이해가 아닌 변혁론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보수적인 종교 집단은 가부장주의의 폐해와 성차별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가정의 위기"를 불러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인권 사상을 "퇴폐와 비도덕"으로 몰아세우며, 나아가 사회의 근본적 혁신과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를 "좌파 이데올로기"라며 매도하고 거부하는 데에서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근본주의적인 기독교가 뜻을 같이 한다.

특히 6·25 전쟁을 겪은 한국교회는 좌파적 정의 요구의 정당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평화의 윤리 대신 좌파적 정의까지 통째로 싸잡아 버리는 좌파 혐오주의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증오의 윤리를 재생산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여기서 친북, 좌파, 용공, 빨갱이라는 표현은 비이성적인 매도의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판단 범주를 벗어나면 심지어 용공적 이단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런 편견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의 길에서 장애를 조장할 암적 존재로 기능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2016년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대통령을 참석자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종교의 습성과 정치적 표현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트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여성 혐오적 발언을 그리도 노골적으로 하고, 인종차별적 발언과 정책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던 트럼프를 왜 미국 개신교인들이 지지했을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에 형성된 종교적 습성을 성서적인 것이라 여기는 습성에 깊이 물든 지도력을 가진 미국 교회조차 새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공신 세력은 단연 스스로 거듭났다고(born again Christian) 자부하는 개신교도들이었다.

미국 개신교인들은 2004년 대선 당시 공화당 부시에게 59%의 표를 주었고, 이번에도 58%를 주었다. 그 중에서 특히 백인 기독교인들은 2004년에는 부시를 78% 지지했고, 이번에는 트럼프에게 81%의 지지를 보냈다. 노골적인 성차별 집단, 노골적인 인종차별 집단의 성격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소위 거듭난 복음주의 기독교인(Born again Christian)인 셈이다. 2008년 대선에서 이들은 74%가 매케인을 지지했고, 오바마에게는 24%의 표만 주었다. 이들의 정치적 편견, 성차별적 편견, 백인 우월주의와 같은 인종적 편견을 그대로 남겨두면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다 허무맹랑한 것인 셈이다.

미국 교회 습속을 이어받은 한국교회

강남 어느 대형 교회 목사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설교문을 매번 참조한다. 스스로 인문학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독서를 하지 않는다면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으로 포장한 그 속에 담겨 있는 성차별적 편견,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자연과학에 대한 편견, 사회변혁에 대한 편견을 스스로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의 대형 교회 목사들은 상당한 정도로 친미 사대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산업혁명, 18세기 정치혁명을 겪으며 사회, 경제 및 정치적 대변혁 속에서 살아남은 종교의 유산을 상속하고 있는 서구 교회는 일면 그들의 조상들이 성서를 해석하며 옹호해 오던 전근대적 가치와 관념들을, 진보적인 교회는 적극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는 소극적으로나마 청산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회변혁적 저항과 비판의 무풍지대에 가깝다. 김 아무개 목사의 사회윤리 의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로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를 옹호하고 칭송하면서도 신자를 끌어모으는 데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이 양산한 수만, 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적이고, 소수자 억압적이며, 정당한 사회변혁의 요구를 좌파의 요구로 알아듣는 반개혁 세력의 인자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이들이 목회하는 교회의 신자들이 해병대전우회와 같은 정치집단들과 손을 잡고 변혁 세력을 좌파로 모는 집회에 참여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다. 사상적 반성과 참회가 없다면 이들은 뼛속까지 친미주의, 차별주의, 그리고 반개혁주의, 반민주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목사들이 박근혜를 칭송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도 "아멘, 아멘"을 연호하는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은 한국교회의 탄핵

박근혜를 하나님이 보내신 고레스라고 설교한 목사와 그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환호했던 신자들은 박근혜의 탄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박근혜의 사고와 행태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순간에도 품위 있게 머리치장을 하고, 대통령의 행차에 있어서 빈틈없는 절차가 있어야 했다. 아마도 그녀의 평소의 습성을 따라 공주 같이 다소 게으르고, 치장하며, 방해받지 않는 여왕다운 일상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부유한 교회 목사들은 "그런 게 무엇이 문제냐?"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촛불 시위에 시달리는 박근혜를 보고 "5,000만 명 중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분이라고 여기는 목사도 있었던 이유다.

교회라는 자기 왕국에서 군왕처럼 살아가는 목사의 눈에는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왕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거리에 촛불을 들고나온 국민들은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우리는 여왕을 모시는 신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법치주의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고, 그 법치는 여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 위에 세워진다. 법위에 군림하듯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박근혜의 탄핵의 의미를 연장해 본다면 민주와 법치와 대의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박근혜를 지지했던 목사들, 그리고 그들의 신자들도 모두 박근혜와 더불어 탄핵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

기억의 정치, 국민은 진화한다

이 나라의 주권자인 우리 국민들은 국민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를 정치꾼들이 독식해 온 역사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독립군의 뺨을 후려쳤던 친일 세력을 옹호한 이승만 정권이 독점했고, 4·19 민주화의 열망의 열매는 탱크와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독재 정권이 찬탈해 갔다. 1987년 6월 항쟁이 노태우 정권으로,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 정치꾼들의 파벌 싸움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 기억 때문에 박근혜의 탄핵이 국회에서 결의되었음에도, 광화문에서는 여전히 촛불이 켜지고 있는 것이다. 촛불의 요구는 박근혜를 몰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너머, 더 정의로운 정권이 세워지는 데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기억의 정치는 진화한다. 하지만 망각의 정치는 진화할 수 없다. 후진적 정치와 종교의 비열한 연대는 민중의 기억을 지우려 든다. 싸구려 복음으로 신자들을 골방에 가두고, 허다한 반성문을 반복적으로 쓰게 만들거나, 낭만적인 쉬운 용서를 덕목처럼 가르치려 든다. 그와 동시에 교회 안의 적폐나 우리 사회의 부정을 방임하거나 지속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후진성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자유 시민이 아니라 그들의 신민으로 키우려 든다. 한국교회는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기억의 정치를 버리라는 망각의 정치를 더 이상 설교해서는 안 된다. 종교를 위한 교회, 교회를 위한 교회의 길은 버려야 한다. 본회퍼가 주장했던 바 "타자를 위한 교회"야말로 참되고 진실한 교회의 본질이다.

이미 항간에는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이 파다하게 일고 있지만, 향후 한국 사회 일반의 요구는 더욱 거세져서 박근혜의 탄핵을 넘어 박근혜와 유사한 행동 양식을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의 권력 구조와 그 습성을 더욱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혁명기에 소수의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권력과 유착되었던 대다수의 안일한 종교 지도자들은 구제도를 옹호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당시 민중의 혁명은 부패한 정치권력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것이라 옹호해 주며 온갖 특권을 향유해 오던 성직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를 거부한 사회악의 대명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제1의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시대정신을 외면한 사악한 성직자들이야말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는 괴수 중의 괴수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적 사건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건은 이내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곤 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역사적 사건은 희망에 충동을 받아 새로운 역사적 비약을 향해 돌출한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어 나가려면 온갖 독재적 발상, 특권의 옹호, 차별과 배타의 습성, 그리고 가진 자의 독점과 신분적 특권은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구가 담긴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어찌 정치적 요구로만 이해할 것인가?

이 요구는 종교, 대학, 기업, 문화, 예술계를 포함하여 우리 일상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요구를 외면하면 할수록 한국교회는 시대에 뒤떨어져 언젠가는 우리가 관광하던 서구 교회의 종교 유적처럼 일반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의 교회들은 오랜 유적으로서의 역사라도 간직하고 있지만 한국의 교회들은 그나마 가치도 없을 것이니 성서의 말씀대로 맛 잃은 소금처럼 버리어져 뭇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진화하고 있다. 한때는 이승만, 박정희를 향하여 향수를 느끼던 국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소수의 특권을 지지해 주는 전근대적인 질서인지, 무엇이 합리적이며 보편타당한 것인지, 무엇이 정의롭고 진실한 것인지, 무엇이 자식들의 미래를 보다 인간답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국민이 되었다. 사회 정의, 평등, 평화에 대하여 이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독단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루어 낼 줄 아는 국민으로 성숙한 것이다.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개인의 요구를 담아 낼 집단 지성의 힘도 행사할 줄 아는 국민이라는 것을 이번 2016년 광화문 시위에서 평화적으로 입증하였다. 진화한 국민의 요구가 정치적으로만 행사될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각 구조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의 진화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종교라는 담을 친다 하여도 이제부터는 투명성과 정의로움, 그리고 평등과 평화, 자유의 가치를 훼손하는 종교 집단은 흥할 수 없을 것이다.

새 시대에 대처할 교회의 과제

오늘날 프랑스의 개신교 인구는 3% 미만이다. 더 나은 사회로의 진화를 요구하던 18세기 프랑스인들 앞에서 구제도의 특권을 누리는 데 급급하여 구제도를 옹호하면서 자유, 평등, 연대의 지평을 외면하던 종교는 서서히 그 위력을 잃어 갔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개신교 선교가 거의 불가능했다.

20세기 초까지 전근대적 사회의 틀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사회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전근대 왕조사회의 정신적 구조와 부단히 싸워 왔다. 교회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수의 독재와 전횡, 특권과 반칙, 권력과 탐욕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늘날 민주화를 요구하고, 특권과 반칙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점차 권위주의 정권에서 탈피하여보다 민주화된 정권을 지향하는 정치 질서의 재편도 불가피할 것이다.

교회는 철저히 공적 영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저히 사적 영역도 아니다. 그러하기에 보편적인 규범을 적용하기 어려운 임의 지역이 되고 말았다. 이런 특징으로 인하여 객관적 평가와 비판에서 제외된 불투명한 성직자의 권위와 권력이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는 지대가 형성되어 온 셈이다.

전근대적인 신분적 질서, 여성 혐오적 공동체, 은근한 주종 관계를 형성하는 차별적 제도 - 장로, 권사, 집사는 폐지되어야 한다. 율법처럼 여겨지는 헌금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공정하고 투명성 있는 관리 체계도 합리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권력과 금력의 상관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교단 정치의 구조도 개혁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근대적 주종, 혹은 주군-신민 관계처럼 여겨지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도 주체성을 가진 양자의 평등주의적 관계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폐쇄된 영역에서 성직자의 전횡을 불러오는 개체교회의 게토화 역시 반드시 극복되어야 공교회로서의 사역에 충실할 수 있다. 따라서 성직자의 편협한 신학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교육과정과 에큐메니즘의 활성화 역시 새로운 시대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사악함은 회개가 없다. 나는 한국교회를 대변할 지위와 특권을 가진 이들이 그동안 온갖 사리사욕을 채우며 하나님의 교회까지 '하나님의 것'이라는 허울 좋은 명패만 남겨 두고 온갖 것을 개인이나 집단이 사유화하던 범죄에서 돌이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짓 예언을 일삼으며 권력에 아부하며 하나냐의 길을 걷던 자들도 이제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부자 간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며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여기던 신성모독적인 행태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담겨 있는 온갖 비윤리적 행태를 규범 삼아 물질을 탐하고, 외설을 일삼으며, 죄 된 본성에 스스로를 담구는 패륜적 행태도 벗어 버려야 한다.

온갖 차별, 특권, 기존의 것들을 향하여 분노하셨던 예수의 길에서 먼 길을 복음주의라고 가르치는 엉터리 신학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력과 권력을 함께 움켜쥘 수 있는 대형 교회 목사들은 하루속히 오만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조그만 일말의 영성이라도 있다면 사악한 길에서 돌아서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성직자들이 사악함에 빠진 이 시대에서 참회와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거듭 경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신앙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내 비윤리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신성을 증거하는 역린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한국교회가 미구에 살고 죽는 일이 될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 사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의하여 자유로워진 정신에서 야기하는 예언적 영성을 가로막는 죄에서 스스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요구되는 시제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박충구 / 전 감신대 교수,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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