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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죽음의 그림자
[이제는 바꿔야 할 교회 윤리] ①저항과 비판이라는 생명력
  •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1.0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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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교회 개혁의 과제를 생각해 보는 격주 연재 칼럼을 마련했다. 1월부터는 박충구 교수가 필진으로 참여한다. 박충구 교수는 감신대 교수(기독교윤리학)로 25년 동안 재직했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기독교윤리사>(대한기독교서회) 3부작, <종교의 두 얼굴>(홍성사) 등 다수가 있다. - 편집자 주
권위가 작동하는 두 방식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청소부와 친구처럼 서로 손바닥을 부딪치며 하이파이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박근혜 정권의 장관이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 앞에서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긴장하며 서 있는 모습에 익숙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 제1의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의 권위와 나라가 분단된 나라의 대통령의 권위 행태는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한편이 평등주의적이며 합리적인, 탈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다면 다른 편은 불평등한, 비합리적인 권위주의의 성격이 짙어 보였다.

권력을 가진 이는 중대한 일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권한을 행사하는 힘이 권위라면, 특정한 집단이 내리는 중요한 결정과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집단이 지닌 권위에 대한 이해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권력 행사에 있어서 합리적 권위가 존중되는 민주적 방식과 비합리적 권위가 행사되는 전근대적 방식은 매우 다르다.

민주적 방식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 문화가 수용될 수 있음으로, 토론을 허용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방식보다 더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전근대적 권위주의적 방식에서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 대신 굴종과 아부의 문화가 형성되기 쉽다. 따라서 권위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민주 사회와 달리 비판과 저항을 통한 변화와 개혁의 지평이 폐쇄된다.

전근대적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 넘어오면서 진보된 사회는 신분과 권력 세습의 특권을 폐지했다. 권력을 가진 이가 다른 이의 사상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자의적으로 재단했기 때문이다. 민주 사회는, 권력자의 독단보다는 토론을 통하여 다수의 지혜를 모으는 합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러나 전근대적 습성에 젖어 신분적 특권을 지속시키려는 이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민주 사회의 걸림돌로 기능하고 있다. 기회주의적으로 근대적인 권력 세습, 재산 세습, 그리고 심지어 교회 세습을 도모하며 이를 당연시하는 이들이다.

권위주의가 불러온 폐단

전근대의 유산인 세습 문화가 지속되고 있는 까닭은 공적인 권력과 권위를 쉽게 사유화하는 전근대적 습성 때문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여 권력을 쉽게 사유화할 수 있는 사회는 권력 세습을 허용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재산을 세습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는 교회는 세습된다. 공적 세계의 사유화는 권위의 사유화라 할 수 있는 권위주의와 밀접히 관련된다.

전근대 세계에서는 권력과 권위가 혈연을 통하여 무비판적으로 세습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 사회에서의 권력의 사유화나 세습은 마땅히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민주 사회에서는 권력이란 그 본질이 공적인 것이며, 국민이 공직자에게 제한적으로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도 사유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교회(公敎會)로서의 성격이 원래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을 버젓이 사유화하는 병폐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위기 역시 이런 병폐가 초래한 결과다.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이 민주적 원칙을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했고, 국가의 중대사를 헌법 정신이 아닌 자의를 앞세워 권위주의적으로 결정해 왔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의 기본인 헌법 정신을 버리고 자의를 유통시키는 권위주의 정권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중차대한 국가적 사안에 대하여 대통령의 주장에 합리적 비판이나 이의를 제기할 경우 그에게 밉보여 즉각 관직에서 퇴출당하는 사례를 번번이 경험한 각료나 비서관들은 아마도 대통령의 권위나 심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관료로서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정권에서 어찌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위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책임 있는 토론이 가능했겠는가?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 집단 속에서도 권위에 대한 전근대적인 이해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민주 사회는 신분제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등주의를 전제한다. 따라서 특권의 세습은 민주 사회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권력의 세습, 재벌의 세습, 심지어 교회 세습까지 정당화하거나 당연시하는 전근대적 풍조가 넘쳐 나고 있다.

나는 이런 풍조의 산실이 바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행태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는 공공의 영역이 손쉽게 사유화되고, 심지어 세습까지 이루어진다. 이런 세상에서는 합리적 비판과 토론의 검증 문화가 차단되고 권력자의 특권을 강화해 주는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질서가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권력자의 자의적(恣意的) 욕망이 필연적으로 법질서를 유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가 상당 부분 근대화되고, 민주화되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가지는 관계망의 실상에서는 전근대적인 가치 구조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교육법과 대학 규정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암암리에 유통되었으니 다른 대학들은 어떠하겠는가?

생명력 파괴하는 권위주의

정치권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언론의 감시와 비판에서 벗어나 있는 종교계는 어떠할까? 오늘날 권위주의적인 목사들이 지배하는 목회 현장에서 그들의 천박한 비리를 찾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렇듯 공적 권위를 부여받은 이가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의에 따라 특권을 유통시키는 비리는 청와대만이 아니라 대학 사회에서도, 종교 공동체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권위주의의 폐해는 악성 박테리아처럼 국가 사회나 대학 사회, 그리고 종교 공동체를 부패시킨다. 무엇보다도 권위주의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자에게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비판 지대를 형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각료들과 대면하여 토론할 능력이 없는 대통령도 그의 권위에 맹종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얼마든지 옹립될 수 있었던 이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설은 권위주의 사회의 허상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지만 무능한 자에게 권위를 옷 입혀 주고 그의 자의에 의하여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되는 집단의 운명은 오래잖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어 몰락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것을 위한 저항과 비판을 거부하며 토론 능력을 결여한 집단이 어찌 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최순실에 휘둘린 박근혜 정권의 배후에서 저질러진 무수한 비리로 인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최순실의 수하에서 묵종하던 관료들과 대학 총장, 그리고 교수들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이 나라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위를 박탈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런 국가적 수치를 초래케 한 것은 바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태 때문이다. 그간 박근혜 정부 안에서는 비판과 저항의 검증 과정을 거부하고 합리적 토론 절차를 생략한 상명하달의 수직적 명령 체계와 이에 대하여 맹종하는 체제만 작동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런 체제는 사실 대통령이 누구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통령 자리에 최순실이 들어앉아 지배 조종해도 그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는 수년간 무비판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근혜 정권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권위주의적 목사의 자리를 그의 자식이 세습해 주어도 아무런 이상 없이 굴러가는 교회의 현실과 겹쳐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와 아비의 후광을 입고 교회를 세습한 자식은 정말 닮은꼴이지 않은가? 권위주의적 목사의 지배와 그에 맹종하는 무리들로 이루어진 교회와 권위주의적 대통령과 그에게 맹종하는 관료들로 이루어진 정권은 정말 닮은꼴이다. 박근혜의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의 손발이 되어 무비판적인 맹종과 칭송의 송가를 불렀던 주요 인물들이(황교안, 서창원, 이정현 등)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사회악의 근원이다. 권위주의는 필경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형성되어야 할 평등한 관계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억압적 행태를 결과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 작성 사건이다.

문학과 예술적 상상력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비판과 저항의 정신에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문학과 예술의 생명력을 이해하고 소화해 낼만한 철학조차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그 생명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국가의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의 문학과 예술혼을 고사(枯死)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듯 권위주의 정권은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죽임의 문화의 수족이 된 이들이 바로 전근대적 질서 속에서 상명하복에 명을 걸고 살아온 군 출신과 정치 검사들이었다. 이들은 서열적 질서 속에서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 그리고 합리적 토론의 여백을 이해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에 나타난
기독교의 죽음

지난 늦가을부터 전국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군왕적 대통령에 의한 권위의 오남용에서 빚어진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담고 있다. 부패한 현실을 거부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우리의 희망 속에 타오르는 촛불에는 그릇된 것을 거부하는 힘, 곧 생명력이 담겨 있다.

일부 정치가들은 대통령제 자체가 군왕적 대통령을 낳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인과관계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권력의 의무와 한계를 명시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결여된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주어진 권력과 권위를 무책임하게 남용하거나 오용해도 이에 비판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문화가 문제의 중심이다. 이런 그릇된 체제를 유지시켜 온 것이 바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문화이며, 기독교는 일면 이런 권위주의 문화라는 악성 박테리아를 키워 온 숙주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보다 나은 정치를, 보다 나은 종교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우리 사회 정치 영역이나 교육 영역, 그리고 종교 영역에서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상당한 지위가 부여되어 특정한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 중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민주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교회의 자락을 조금만 들추어 보면, 국가 사회나 대학 사회보다 더 깊이 곪아 있는 권위주의적 습성과 불투명한 행태들이 교회에 만연하다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종교는 관료적 권위를 행사하는 국가 사회나 진리 탐구의 자리로 간주되는 대학과는 달리 특정한 영적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권위는 강제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에 비하여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진리 탐구의 합리성에 기반한 대학 사회의 권위를 초월하는 영성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 국가 사회의 권위가 법치에 예속되고, 대학 사회의 권위는 합리적 지성에 예속되어야 한다면, 종교 집단의 권위는 양심과 영성의 깊이에 의존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언어를 빌린다면, 정치와 대학은 속(俗)의 아름다움으로서 정의와 진리를 위해 봉사하고, 종교는 영성적 아름다움으로서 사랑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종교가 성성(聖性)을 견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종교가 참된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성은 결코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옷 입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은 속성(俗性)과 구별되는 성성(聖性)에 있다. 그런데 만일 종교가 그릇된 욕망을 향한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을 상실하여 성(聖)과 속(俗)이 전혀 차이가 없다면, 아니 성과 속이 뒤바뀌어 전도(顚倒)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속된 종교, 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권위주의를 옷 입고 있는 종교는 생명력을 상실한 죽음의 종교, 예수가 말했던 회칠한 무덤 같은 종교다. 내가 박근혜 정권의 위기에서 한국 기독교의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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