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8월 3일 오전 박충구 교수(감신대 은퇴)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영적 전사들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기독교 초기 영적 전사를 자처하던 이들은 교회의 현실주의적 타협에 자신의 영혼이 파멸될 것을 두려워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수도원주의 운동의 효시가 된 수도 생활, 그리고 신성한 것이 아닌 모든 관계를 차단하는 신비주의에로의 침잠이다.

콘스탄틴 대타협 이후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수단으로 선택했을 때, 즉 권력과의 타협, 물질적 풍요와의 타협, 그리고 세속 욕망과의 타협이 일어났을 때 이들은 분연히 "No!"를 선언하고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일종의 반문화적인, 문화와의 타협, 즉 세속적 문화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 있었다.

이들은 권력과 물질과 욕망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여 이 모든 욕망에 대한 냉철한 포기 의사를 초기에는 지고지순한 수도 생활에서 스스로 확인받으려 했고, 후기에는 엄격한 수도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계율에 욕망을 매어 두어야 했다. 수도원주의자들이 자율과 타율의 이중적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신비주의자들은 자율의 보호 장치가 작동해야 했다.

우리가 기독교적 삶의 연원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성경과 예수만이 아니라 그 성경과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수천 년 동안 무수하게 많은 이들이 고행과 금욕, 침묵과 복종의 길을 걸어간 그 흔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중세 가톨릭교회를 빛낸 중추적 인물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형성된 인물들이다.

기독교 역사 안에 면면히 흘러온 수행의 길은 기독교 안에서 야기하는 죄와 악의 역사보다 더 깊고 심원했다. 하여 기독교 역사는 선함의 역사가 아니라, 선과 악이 교차하며 선이 악을 이겨 내는 역사로서 긍정될 수 있었다. 수도원적 수행의 길을 걷는 이들은 육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없이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 모든 성적인 관계를 차단했다. 그리고 무소유와 절대복종의 서원을 평생 지켰다.

하지만 신비주의 전통에서 볼 때 신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무사 무욕의 실천을 거치면서 신성에 접한 이들은 신성의 내재의 환희를 경험하면서 스스로가 인간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다. 신성을 경험하면서 일어나는 고양(高揚)은 자신이 나약하고 사멸할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관주의적 신앙의 위험은 이렇듯 우리를 언제나 영적 유혹 앞에 서게 한다.

2.
'라이즈업' 영성 운동을 주도하던 한 목사가 과거 한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수년간 가졌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비하하는 메시지가 도처에 번지고 있다. 그가 사탄의 세력에 점유된 현실로 읽었던 무수한 주제들은 그 자신의 삶도 점유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패턴이 어떻게 순진한 이디엇들을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죄와 악을 타자화하고, 사탄을 빙자하는지에 대해서 이따금 글을 올렸다.

이들이 낙태, 혼전 순결, 동성애, 창조론, 반공주의 등등의 패키지를 들고 나오면 신자들은 그들이 매우 의로워 보여 정의와 영적 투사로 인식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스스로 전사가 되어 똑같은 근본주의적 편견을 확대재생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주제들이 담고 있는 그 윤리적 함의를 깊이 이해할 능력이 이미 거세되어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가 (가부장적 성문화의 피해자) 낙태한 여성이 되고, (30이 넘도록 결혼할 수 없는 세상에서)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한 자, (범람하는 포르노그래피를 보며 자기 혐오적 자위를 하며) 동성애와 유사한 성행위를 하고, (진화론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창조론에 의문을 품으며, (민족 분단을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반공주의의 반평화적 속성을 스스로 안에서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정직하지 못한 위선을 떠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건강하지 못한 자기 증오, 자기 부정을 정결한 신앙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근본주의자들이 위선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은 수도원주의자들과 같이 자율과 타율을 묶어 부단히 일어나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방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자들처럼 신성에 접근하기 위하여 대중과 탐욕의 유혹을 떨쳐 내는 무사 무욕의 묵상과 명상의 실천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은 사탄이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악은 사탄이 유혹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죄악으로 향한 성향을 – 욕망을 그대의 의지로서 수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욕망을 우리 사회가 매우 유물론적으로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배후를 상징하여 종교적으로 사탄이라 하는 것은 오래된 신화적 표현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확대재생산하여 종교적 실재로 과장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요란한 음악에 취해 열광주의적 동의를 유발시키는 대중 중독을 이용하는 이들에게서 영성의 순결하고 맑은 샘을 찾겠다는 것은 이미 비신학적이고, 넌센스며, 비기독교적이다. 내가 대형 교회 목사들의 순수 코스프레를 비판하는 맥락도 이에서 멀지 않다. 그들의 위선은 건강하지 못한 자기 증오, 자기 부정행위라는 순수로 가리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3.
미성년자인 여고생을 집요하게 농락하면서 그가 보여 주었던 바,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사 코스프레를 열광적으로 따라하던 사람들 이제 그런 종교적 사업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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