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진리' 창세기에 대한 의문

기독교는 위대하다. 진리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은혜로운 존재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혼을 불어넣어 주셨고, 우리에게 당신 대신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직무를 맡기셨다.

창세기에 쓰인 이런 묘사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듯 싶다. 그러나 창세기가 쓰인 당시를 생각해 보자. 당시 이스라엘 주변 메소포타미아 국가 창조 신화를 보면, 신들은 인간을 열등하게, 그것도 자신이 하기 싫은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다시 말해 노예로 만든 것이다. 이와 비교하더라도 창세기는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부터는 사제들의 '음모(?)'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의혹은 인간의 창조와 원죄에 관한 부분에서 가장 강력하다.

창세기를 쓴 사제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B.C. 950년경 솔로몬 시대 야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제들과 달리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인간처럼 묘사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마치 도공처럼 흙으로 빚으셨다든가, 인간을 창조하고 흐뭇해 하셨다던가, 아니면, 저녁에 뜰을 걸으신다든가 하는 표현처럼 말이다.

그럴 수 있다. 야훼스트 사제들과 종종 비교되는 엘로힘 사제들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직접 이야기하시지 않고 천사를 통해서만 이야기하시는 '어렵고 먼' 존재이며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라 하시는 두려운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처럼 의인화되고 친숙한, 나아가, 실수도 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야훼스트 버전의 장점일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친근함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간으로 묘사하다 보니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런데 이때의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아닌 '당시의 인간'이 투영되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훼스트 사제들이 '생각하는' 인간, 나아가, 야훼스트 사제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나의 의혹의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하던 당시의 사제들이었던 야훼스트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평무사하게 적으려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야훼스트 사제들 개개인의 인격과 도덕성, 직업윤리를 탓하고자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를 쓰는 과정에서 여러 구전, 문헌들을 선택하고 배제하고, 첨가하고 삭제하며, 나아가, 수정과 가필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식에 입각해 볼 때, 그러한 전 과정에는 편집자 이해와 편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록이란 것이, 편집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내용을 살펴보자.

사탄은 뱀으로 변장하여 이브에게 "하나님은 너희를 시기하고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너희는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고 영생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분별력이 생긴 아담은 자신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변명한다. "이브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말이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에게 잘못을 전가하기까지 한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열매를 따 주었기에 (중략) 당신이 만드신 이 뱀에게 속아서"라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짓말'이다.

이브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본다. 그런데 이 선악과 또한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이브는 그 유혹 또한 참지 못하고 마침내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그리고 이브는 아담을 거짓말로 유혹한다. 뱀처럼 말이다. 아담 또한 이브의 유혹에 넘어간다. 이브처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혹'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한다.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고 영생불멸하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거역'이다.

이것이 야훼스트들이 기술한 인간의 원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을 잘 봐야 한다. 야훼스트들이 무엇을 혼동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우리를 속이는지 말이다.

아담은 분명 '의심'하고, '변명'하고, '책임 전가'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분명 죄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거짓말' 이면에는 눈이 밝아져 분별력이 생기고 그 분별력으로 선악을 구분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유혹함'과 '유혹에 넘어감'은 분명 죄이다. 그러나 그 근원에는 '욕망'이 있고, '공감'이 있으며, 나아가, ‘사랑’이 있다.

'의무를 저버림', '방종', '무책임', '전지전능과 불멸 영생하는 신의 능력에 대한 도전'은 분명 죄이다. 그러나 그 근원에는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욕망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능력인 '자유의지'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성, 감성, 자유의지는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사탄이 씌운 저주이며 인간의 원죄인가?

그런 것도 같다.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보라. 서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생태계와 인간성을 파괴하고,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모습을 말이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의 끝은 알 수가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다. 게다가 인간은 자유를 위해 타인의 존엄성, 노동력, 심지어, 생명까지 파괴하며, 심지어, 신처럼 과학을 통해 영생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성, 감성, 자유의지의 남용이지 그것은 선용(善用)의 모습과 결과는 아니다. 이성, 감성, 자유의지는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세상을 설계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유를 누리면서도 무한자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다시 말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아는 그런 모습일 수 있다.

신의 선물인가, 사탄의 저주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성, 감성, 자유의지의 '남용'과 '선용'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런 가설을 세워 본다.

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 감성, 자유의지를 주셨다.
② 인간은 - 사탄에 의해서든 아니면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서든 - 그것들을 남용했다.
③ 인간의 원죄는 그것들의 남용에 있다.

이런 가설에 입각해, 나는 창세기를 쓴 야훼스트 사제들이 이성, 감성, 자유의지의 남용과 선용을 구분하지 않는 오류를 범해 신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과 인간의 잘못을 구분하지 못(아니 안)했고, 심지어 이성, 감성, 자유의지 그 자체를 그것들이 남용했을 때 발생하는 나쁜 결과의 원인으로 규정해 마치 이성, 감성, 자유의지 그 자체가 신이 주신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해 저주받게 된 결과, 원죄와 타락의 원인처럼 호도했다고 본다. 고의든 아니든 말이다.

당시 지식인인 야훼스트 사제들이 살았던 때가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였을 수도 있다. 사실 철학과 사회과학에서도 (신의 축복으로서의) 이성, 감성, 자유의지 그 자체와 (루시퍼의 저주로서의) 그것들의 남용을 구분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이성의 경우를 보자.

막스 베버, 칼 마르크스, 프랑크푸르트학파(특히 하버마스와 악셀 호네트)가 이성 그 자체와 그것의 하위 범주이지만 자립화, 주객전도화되어 인간을 망쳐 버린 '도구적 이성'을 구분한 것은 20세기 넘어서이다. 아우슈비츠와 킬링 필드 등 처절한 경험을 하고 나서다.

'도구적 이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도구적 이성'이란 인간의 번영과 진선미, 신의 명령을 따르려는 (신의 축복으로서의) '이성'을 효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와 수단이었다. 그런데 대상을 분류하고 계산하고 논리적 관계를 따지며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는 데 주력하다 보니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원래 이성이 갖고 있던 목적, 본질, 내용는 잊어버리고, 수단으로서 이성, 도구로서 이성만 강조한다. 주객전도,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도구적 이성은 자립화되어 인간에게 '낯설고 외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인간은 그 아래에서 신음하게 된다. 나아가 인간은 이 거대한 힘에 굴복하여 이것을 숭배하게 된다. 우상화, 사탄화(satanization)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성도 마찬가지다. 감성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건전하고 건겅한 욕구의 결과다. 공감, 이성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인간 간의 사랑, 나아가, 신과의 사랑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이 탐욕에 굴복하면서 감성은 탐욕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 결과,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에 넘어가며 타락하게 된다. 오늘날 돈, 폭력, 섹스, 약물 문제를 보라. 인간은 신이 주신 선물인 감성을 타락시키게 되었고, 나아가, 탐욕의 숭배자가 되어 감성은 사탄화(satanization)되는 것이다.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에게 당신 대신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직무를 맡기셨다.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명명(命名)할 권리를 주셨다(이런 권한은 유대교와 기독교에만 있는 것으로, 같은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인 이슬람교에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의무의 파기, 방종, 무책임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넘어서 전지전능하고 영생불멸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려 한다. 오늘날 인간은 과학을 이용하여 늙지 않으려는 수술, 음식, 약을 개발한다(언론 보도를 보면 인간은 정력을 위해, 장수를 위해 태아로 만든 술, 약까지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물론, 의혹을 넘어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사제들의 음모?

나는 이런 의심이 든다. 이처럼 이성, 감성, 자유의지와 그것의 남용이 구분되어야 하는데도 구분되기 어려웠다면, 과연 야훼스트 사제들의 '오류'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냐고.

나는 좀 더 가혹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그들은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힘들고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무지렁이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다. 경제적 이해 관심이 다르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며, 신과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것은 태생적 문제, 배경의 문제였다.

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토론할 줄 알았으며, 많은 문헌들에 익숙했다. 그들은 노동은 하지 않고 사제복을 입고 경건하고 기도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종교적 설법을 담당하고, 나아가, 그들로부터 제물을 걷고, 십일조를 걷으며, 사원에서 사람을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아비투스(habitus)'가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해(interest)'가 달랐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 제사, 십일조 등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사제들은 왕과 이해를 같이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축 등의 노역, 세금, 전쟁에 나서게 해야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을, '경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을 대리한다는 권한과 그 권한에 자발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의'로 창세기를 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스트 사제들과 그들과 카르텔을 이루던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들이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약한 자들에게 공감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고 '신'이라고 내세워진 의심스러운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반면 이들이 두려워한 이스라엘 백성들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을 의심하고,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를 따지는 것. 다시 말해, 이성을 발휘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감성을 발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렁이 백성들이 연대하여 사제들과 지배 블록에 항거하는 것. 다시 말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것 아니었을까?

야훼스트와 헬조선 목사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헬조선의 기독교 사제들은 당시의 야훼스트들처럼 무지하지는 않는가?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아닐까?

그들은 박근혜의 죄에 대해 의심하고 따지자면 빨갱이고 사탄이라고 한다. 약자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사랑하자고 해도 빨갱이고 사탄이란다.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재벌로부터의 자유,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말해도, 고통스러운 삶 대신 의로운 죽음을 감수하려 해도, 빨갱이고 사탄이란다. 그러면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우리 모두 죄인이니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 그가 예수 믿게 하여 우리 모두 천국에 가자고 한다. 이것이 모두 예수님과 하나님 말씀이며, 자신은 진리의 대변자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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