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6일.

태양이 작렬하는 쿠바 산티아고의 해변에 160명의 젊은이가 파도를 뒤로 하고 뭍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들은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기 위해 상륙한 쿠바 게릴라들이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가 있었다. 피델은 상륙하기 몇 시간 전 그의 군대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몇 시간 후면 그대들은 승리를 거두거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혁명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중략) 1868년과 1895년에 독립운동을 도모한 이들처럼 여기서 아니면 '죽음'을 부르짖기로 하자."

그러나 그들은 생포되었고 2년 뒤 예수회 신부들과 그 외 혁명에 공감하는 사람들 노력으로 석방된다. 피델은 살아남은 11명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군대를 규합했다. 이번에는 81명. 그리고 1956년 11월 피델은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간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우리는 자유를 얻거나 순교자가 될 것이다."

당시 쿠바의 상황은 어땠는가?

쿠바는 독재자 바티스타 장군 통치 아래 있었다. 그 정권은 United Fruit Company(이하 UFC)로 대표되는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마피아와 결탁하여 운영하던 거대한 플랜테이션, 관광지, 카지노, 매매춘굴 사업을 비호했다. 피델은 이에 저항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이끌고 파업과 시위를 지도한 끝에 결국 무장 게릴라의 쿠바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쿠마혁명이 가져온 것들

혁명은 쿠바 민중들에게 복음이었다. 집세와 전기 요금은 줄었으며, 미국이 농장주들이 사용하던 하바나 저택들은 농촌에서 온 학생 8만 명의 숙소로 개조되었으며, 버리고 떠난 고급 자가용들은 이전 하인들에게 배분되었다. 택시운전사로 일할 수 있도록 말이다. 대토지를 몰수하였고 공공시설을 국유화하였다. 그리고 도박, 마약, 매매춘을 금지하였다. 오지에까지 무상교육과 무상 의료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작은 섬나라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에 이어 2번째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본토 코앞에 공산주의 국가가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피델은 1961년 새해 퍼레이드에서, 탱크를 비롯하여 소련제 무기를 선보였다. 그것은 소련과 냉전을 벌이던 미국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미국은 CIA 주도로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훈련시켜 쿠바를 침공한다. 피그만 상륙작전이 그것이다. 물론 그 뒤에는 UFC와 플로리다의 백만장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침공군에게 함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침공군은 쿠바군에 의해 불과 사흘 만에 100여 명 사상자를 내고 1,113명이 생포되는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피델은 몸값으로 5,300만 달러를 받은 뒤에야 사로잡은 그들을 풀어 줬다.

그러자 미국 정부, UFC, 마피아는 피델을 암살하려 들었다. CNN은 "카스트로는 생존 인사 중 가장 많은 암살 기도에 시달린 인물"이라며 총 638번 암살 기도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피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림픽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었으면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암살과 관련해 로맨틱한 일화도 있다.

쿠바 혁명 성공 초기 카스트로 전 의장과 사랑에 빠졌다가 이후 미 CIA에 포섭돼 첩보원이 됐던 마리타 로렌츠는 1993년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묵던 스위트룸에서 독약을 숨겨 두었던 세안 크림이 꺼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델은 호텔 방에서 '나를 죽이려 하는가? 그러면 죽여 보게'라며 갖고 있던 총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는 총을 쏘는 대신 카스트로의 품에 안겼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피델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소련을 끌어들여 플로리다로부터 9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핵미사일 기지를 세우려 했다. 미국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며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방공호를 하고 대피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제3차 대전, 그것도 핵전쟁이 발발할 일촉즉발의 위기였던 것이다.

이 사태는 미국과 소련의 필사적인 외교적 노력에 의해 일단락된다. 소련은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했고,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을 위협하던 터키에 만들어 놓은 ICBM, 즉,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를 철수시켰던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나큰 시련이 쿠바에 닥친다. 소련은 몰락한 것이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소련에 크게 의존해 오던 쿠바는 위기에 처했다.

과거 바티스타 장군 지지자들은 소련 철수에 환호했다. 플로리다 백만장자들과 CIA 피그스 만  침공 참전 병사들의 조직인 쿠바계미국인협회(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 CANF)는 쿠바의 반혁명 작전을 가동했다.

이 협회에는 미국 신보수주의자(네오콘)의 대모(代母)로, 미국 국익에 부합하다면 독재 정권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 진 커크패트릭, 그리고 (지금은 사망한) 로널드 레이건, 마이애미 백만장자 투기꾼 조지 부시의 아들 젭 부시가 있었다. 이 협회는 미국 부자들에게 쿠바의 토지와 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해준다며 돈을 내라고 했고 수많은 미국인이 앞다투어 신청을 했다.

피델은 대처를 해야 했다. 그는 1992년 리우 UN 환경과개발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인간의 삶을 좀 더 합리적으로 하자. 정의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만들자. 모든 과학 지식을 환경오염이 아닌 좀 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동원하자. 생태계에 진 빚은 갚되, 사람들하고는 싸우지 말자."

그는 수입에 의존하던 농업을 유기농 위주 자급자족 시스템으로 바꿔 나갔다. 그는 국민투표 형식을 빌어 93% 지지를 얻어 낸 뒤, 전국의 과학자,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걸어 "지금부터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농사 기술을 발굴해라, 그것을 최신 과학기술과 접목시켜 농민들과 실험해 보고 농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라"고 주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식량자급률이 100프로에 육박한 것이다. 그는 쿠바 유기농사업업에 여성을 대거 참여시키기도 했다.

"쿠바 여성들이여, 당신들의 젖을 먹고 우리는 자라났다. 대지는 어머니의 땅과 같다. 여기서 난 농사로 우리는 먹고산다. 그런데 쿠바의 대지가 오염되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젖이 오염되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쿠바의 유기농업을 당신들이 책임져라."

그것은 하나의 철학, 세계관의 변화였다. 쿠바 유기농 사업은 자연과 인간의 '순환'을 통한 '지속 가능한 발전'이었다. 쿠바인들은 화학비료 대신 커피와 비슷한 '난'이라는 식물을 이용하여 해충을 없애 중국, 스리랑카, 인도, 이스라엘로 확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허브의 효능을 발견하여 당뇨, 피부, 안과 질환을 위한 생약 개발에 나섰다.

재밌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 또한 쿠바인들은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래서 농장에 물을 뿌리는 호스에 자석들을 붙였다. 일종의 기(氣)과학의 도입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물에 자장을 띠게 하면 80% 이상의 증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사기처럼 여겨지는 피라미드 효과, 즉 피라미드 안에 생명체를 두면 썩지 않는다느니 신비체험을 한다느니 하던 입증되지 않던 이론도 도입했다. 농장에 4m 정도 되는 피라미드 구조물을 만들고 그 안에서 식물을 재배했다. 이 또한 커다란 성과를 보았다. 쿠바는 미국이 가하는 압박에도 UN 도시위원회의 도움으로 새로운 버섯 재배 방법을 개발했다.

쿠바의 유기농 사업에서 눈여겨볼 게 있다. 그들이 자본주의는 물론, 공산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실제 쿠바는 90%에 달하던 국영 농장을 개인이나 조합에게 무상, 유상으로 임대해 직접 경영하게 했다. 그 결과, 2002년 말 국영 농장은 20%, 협동농장과 개인 농장 20%, 가족 농가들의 협동체가 60%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 활성화와 유통망 개선에도 힘썼다.

한창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이 유행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쿠바의 소유 구조가 국유화에서 협동조합화했다는 점은 쿠바가 실제로 공산주의 체제인가 하는 질문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쿠바에 대한 외부인들의 연구는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은 뒤로 미루어야겠지만 말이다.

쿠바, 하면 무상 의료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쿠바인 평균 수명은 남자 74.77세, 여자 79. 44세로 선진국 수준이다.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6.45명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라 한다.

이는 의료 제도에 문제가 많은 미국과 대비된다. 실제로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서는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병원에 간 한 노동자가 나온다. 의사는 그를 보고 당신은 보험에 들지 못한 상황이라 돈이 모자라 한 손가락만 봉합할 수밖에 없으니 어느 손가락을 봉합할지 선택하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저소득층이나 불안정 생활자가 의료보험 없이 살아간다. 그 비율은 전체 국민 16%에 이른다. 여기에 숱한 불법 체류자까지 합치면 무보험자 비율은 더 늘어난다. 오바마 집권 후 오바마 케어에 의해 미국 의료보험이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오바마 케어를 원점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앞으로 상황이 매우 걱정된다.

쿠바의 공공 의료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파격적이다. 피델 동생인 라울의 딸 마리엘라는 적극적인 노력을 벌인 결과, 성전환 희망자들에게 국가가 무료 시술을 지원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것은 남아메리카의 같은 좌파 정권 브라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쿠바는 심지어 레즈비언 부부를 위한 인공수정까지 지원한다.

쿠바의 이런 정책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쿠바는 같은 좌파 정권인 형제국 베네수엘라에게 의료인은 물론 교육자, 스포츠인, 과학자, 기술자, 전문가를 지원했다.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값싸게 공급받기로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는 시장 거래라기보다는 상호 호혜적인 연대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세계, 그리고 UFC와 다국적 자본, 쿠바 마피아는 피델을 악당으로 묘사한다. 기독교계도 다르지 않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이후 피델은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하며 가톨릭교회 등 종교 단체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고,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수백 명을 쫓아냈다. 기독교도 눈에는 그가 사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도 친구는 많다.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는 자신도 불평등과 억압에 저항하는 피델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는 쿠바혁명을 벤치마킹해 인종차별에 저항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으며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무하마드 알리도 피델의 친구다. 그는 1996년 국제적십자단을 이끌고 의료 물품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에 갔을 때, 피델은 알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여기를 때려 보라"며 농담을 했고 실제로 서로 잽을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출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도 그의 친구다. 마라도나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재활 치료지로 쿠바를 선택했다. 그는 피델을 '두 번째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의 다리에 피델의 얼굴 문신을 하고 다닐 정도로 피델에게 의지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크리스천도 있다. 1984년 피델을 만나 쿠바에 억류된 미국인 22명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는 협상을 성공시킨 미국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는 피델을 추켜세웠다. 그는 피델에 대해 "내가 만난 정치인 중에 가장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며, 아바나대학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는 '피델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사실 피델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예수회가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에서 12년을 수학했다. 그래서인지 1990년대부터는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 등을 직접 만났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프란치스코 교황은 피델의 사망에 대해 "슬픈 소식"이라 표현했다. 교황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내 슬픔을 전한다"고 밝혔으며 "그의 영면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델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독재자였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밝히고 싶다. 그는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는 선임의 형식이었지만, 사실상 대물림이었다.

쿠바가 아직도 공산주의 문제를 오롯이 안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쿠바의 노동자, 농민, 그리고, 인민들의 자유 문제, 공산당원과 관료들의 착취, 부패, 무능, 비효율이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피델 사망 이후 쿠바의 인민들이 피델의 문제, 혹은 한계를 넘어 좀 더 나은 쿠바를 만들어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쿠바인들이 폐쇄 사회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의 일원이 되는 것,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 기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쿠바인들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환경은 녹록지 않다. 현재 쿠바의 자급자족 체제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이제 그들은 개방에 나서고 있다. 외자를 도입하고, 외국에 시장을 열며, 특히 관광산업을 촉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쿠바는 스페인, 브라질 자본가들과 합작사를 만들고 있으며, 관광산업의 성장은 페소 경제와 별도로 달러 경제를 성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쿠바에 가면 쿠바인들은 식탁과 택시를 대기시키며 외국인들의 지갑에서 달러를 노리고 있다. 쿠바 최고의 바닷가, 최상의 음식, 귀한 소비재는 오직 달러를 써야만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서 쿠바의 내국인들은 법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달러를 벌어들인 일부 쿠바인들은 페소로 장을 보는 대다수 쿠바인들을 천대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쿠바에 계급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긴축정책을 펼치자 많은 쿠바인들이 소비재를 구하기 위해 암시장과 선이 닿는 사람을 찾아 나서고 있다.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관광산업이 성장하면서 관료의 부패, 도박, 매춘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쿠바인들로 하여금 개방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주는 동시에 혁명 전 과거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우울함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다. 쿠바의 운명은 결국 쿠바인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사실 큰 부분은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

미국 차기 대통령 트럼프는 피델의 죽음에 대해 "그는 거의 60년 동안 쿠바 국민을 억압한 잔혹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트럼프는 피델이 "총살대, 도둑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고통, 궁핍, 기본적인 인권의 부정"을 남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전체주의국가로 남아 있는 쿠바가 카스트로의 사망으로 오랫동안 계속된 공포로부터 벗어나, 훌륭한 쿠바 국민이 마땅히 누릴 만한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미래로 향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트럼프의 이 말이 쿠바인에 대한 걱정도 아니고, 희망의 메시지는 더더욱 아닌 것처럼 들린다. 대신 라틴아메리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것처럼 느낀다.

현재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등 좌파 정권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 여기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권을 몰아내려는 백악관, 석유를 둘러싼 세계시장에서 라이벌을 없애려는 미국 내 셰일가스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펜타콘, CIA, 월스트리트,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을 획책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며칠 전 트럼프는 푸틴 회동 후 몇 시간 뒤 러시아 폭격기가 시리아를 폭격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운영하는 병원들이 집중 폭격 대상이 되었으며 아이들은 희생되었다. 그 폭격 대상은 쿠바의 아바나, 그리고 평양이 될 수도 있다. 시민들 간의 국제적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결정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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