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이란 악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색 아닌 색이다. 모든 특성을 몰살시키고 모든 개성을 악마적인 어둠 속에 파묻어 버린다. 문제는 그렇게 묻힌 상태로 한동안 검정의 정서에 동화된 이들이 섬뜩할 정도의 안정감을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안정감이다. -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

검은 할례의 기원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여성의 순결을 물리적으로 확인받기 위해 여성 할례가 행해진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명백한 폭력이며 범죄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행위가 문화적, 또는 종교적 제의가 되어 망령처럼 아프리카의 샤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성 할례가 자행되는 비상식적인 현상의 이면에는 비록 그것이 원시적 미신에 의한 것일지라도 외면하기 어려운 종교적 강박의 한 형태가 있음이 발견된다. 오래전부터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쓴 폭력과 야만의 두 얼굴을 가진 악마는 여성을 관능과 미혹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관능을 인간을 유혹하고 성적 타락의 기폭제로 삼는 것처럼 매도해 왔다.

그렇게 매도된 여성이 타락한 마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일반의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숙의 한 증표인 순결을 유지해야 할 것을 직, 간접적으로 요구받게 되었다. 그 요구를 가능하게 만든 명분이 바로 종교적 강박이다.

종교는 그것이 샤먼의 민낯을 가진 하등 종교든, 꽤 세련된 도그마로 무장한 고등 종교든 상관없이 거룩의 상징을 여성의 순결과 동일시하는 데 놀랄 만큼 분명한 일치점을 보여 왔다. 그렇게 종교는 여성 순결에 대한 일종의 강박 심리를 종교적 성숙의 한 표지로 이용해 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분별한 샤먼의 만연이 토착화되면서 발생하게 된 여성 할례는 종교적 강박이 잉태해 낸 명백한 종교 범죄로 봐야 한다.

일반의 범죄와 종교 범죄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종교 범죄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정은 고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종교적 명분에 의거한 성전(聖戰)이라고까지 칭송하며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그들, 종교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타락한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라고 선전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다.

하지만 종교 범죄의 근본에는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저급하고 치졸한 치정, 미신, 왜곡된 오컬트 문화의 병폐를 눈감아 주는 면죄부 역할이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여전히 재산의 일부나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태도를 종교적 전통과 연결시켜 합리화하는 태도에서부터 여성 할례는 비록 법의 테두리에선 범죄행위로 규정되었으나 문화적 관습의 한 형태로는 엄존해 온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강박의 외피를 뒤집어쓴 할례 의식은 종교적 강박이 낳은 순결 준수의 의지, 성스러움의 의지에 대한 열망의 기형적 변종이다. 하지만 이 변종은 오래전, 구약성서 기록에도 인간의 한 본성으로 나타난 바 있다.

상황과 대상, 후유증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할례 의식과 관련한 구약성서 기록은 종교 범죄로서의 이 할례를 검은 할례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이 말살당하고 있음에도 획일화된 말살의 징후, 모든 가치를 삼켜 버리는 검은 종교를 향한 안정감을 희구하는 검은 할례 말이다.

종교범죄, 또는 명분의 한 징후, 할례

창세기 족장사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들의 범죄, 그 배후에는 자신들의 행위를 범죄라고 규정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이른바 강력한 종교적 명분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여자 형제를 더럽힌 이방 민족에 대한 전례 없는 종교적 혐오가 그것이다. (창세기 34장 참고)

이 경우 할례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과 철저히 오염된 땅의 백성을 구별시켜 주는 강력한 종교적 명분 중 하나로 기능한다. 할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피가 야훼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선민의 피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그런 종류의 확신은 필연적으로 할례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정서적 우월감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디나의 이른바 할례받지 못한 남성과의 결혼 제의의 본격화는 야곱의 아들들로 하여금 심한 반발과 모순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방 민족과 말 섞는 것조차 순결하지 못한 행위일진대 하물며 이방 남성과의 결혼이라니. 이를 받아들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이른바 이방 남성의 눈에 들어온 한 여자인 디나, 그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낙인찍는 무의식적 혐오를 감추기 위해 그녀가 이방인들의 야만과 폭력의 희생양이라고 규정지은 디나의 남자 형제들, 그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단죄와 모순의 실타래는 어쩌면 비극의 와중에 진정으로 위로받아야 할 디나의 인권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성성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여성에게 부여하지 않는, 또한 남성성의 야만은 그것을 야만으로 인정하지 않고 종교적 성숙과 결단이라고 믿은 뒤, 결단의 도구로서 이방 남자들에게 구별된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요구하게 만든다. 이때 할례의 요구는 종교적 혐오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남성성의 비틀린 퍼포먼스, 그 절정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은 철저히 타자화(他者化)되고 남성성만이 종교적 주체가 되어 역동하고 발광한다. 이 경우 할례는 여성성을 철저히 억압하려는 인간 내면에 사로잡힌 종교적 명분으로서의 남성중심주의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종교적 명분을 수단 삼아 야곱의 아들들은 이후 무자비한 살육 행위를 정당화한다. 살인의 계명이 엄중한 금기란 자각 따위는 오간 데 없고, 할례라는 종교적 명분과 남성중심주의의 퍼포먼스를 벌인 뒤, 그들이 멋대로 세운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는 기준 하나로 심판의 칼을 실제 사람을 죽이는, 그것도 집단 학살 퍼포먼스의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물론 창세기 족장사는 이를 구성한 전통의 구약신학 메시지를 배제해서는 곤란하다. 필자 역시 신학적 담론의 근본적 메시지를 간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른바 디나 사건의 배후에는 종교적 명분을 남성성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또한 이 경우 여성과 여성성이 순결의 징후와 지속을 점검케 해주는 일종의 증거 역할로 타자화되었다는 사실 역시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여성성이 종교적 타락과 순수의 지속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버리고 그 자체로는 최소한의 결단과 선택을 가질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박탈된 사실 말이다.

검은 할례를 원하는가

앞서 말한 여성 할례의 야만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 몇몇 지역에서 자행되는 소수 국가의 예외적 토픽일 수 있다. 또한 구약성서에 나타난 디나 사건과 관련한 비극 역시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야곱 가문의 영적 비극을 그린 교훈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두 할례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와 이 할례가 무슨 상관이냐며 어이없어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원하는 종교적 명분의 한 징후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된 두 할례가 오버랩된다는 불안감을 지우는 것 또한 어려워진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자신들의 종교적 야만을 합리화하기 위해 검은 할례를 도입해 버린 오늘 한국교회에서 나타난 종교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검은 할례는 종교적 의식의 획일화를 주도한다. 획일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렇듯 종교적 강박과 명분의 한 도구로서 대상의 순결이 요청된다. 그 순결은 아프리카의 몇몇 부족처럼 실제로 여성의 성기를 할례하는 원초적 야만으로 극화된다.

하지만 순결의 의식은 어느새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우리 안에 멋대로 순결의 기준을 세워 놓았다. 이 상태에서 순결하지 못한 대상을 정죄하고 규탄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데 순결, 그리고 순결을 유발한 할례의 폭력성, 그 폭력성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뒤엉킨 존재 안에 내재된 남성성과 여성성은 스스로를 심판자로 만들거나 악의 뿌리로 대상화시켜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단죄하는 행위와 동일시하고 있다. 순결해야 하는 것도 남성성의 할례, 그 당사자인 교회며, 순결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거나 스스로 굴레를 씌우는 것 역시 여성성의 할례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대상으로서의 교회다.

교회는 이렇듯 가해와 피해의 굴레, 단죄 내림과 단죄 받음의 연결 고리를 제법 감동적인 종교적 의식으로 고양시킨 뒤 죄를 생산하거나 죄를 청산하는 이른바 분식 회계의 영성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켰다. 이렇듯 야만의 얼굴을 가진 종교적 명분은 종교 산업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자산가치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유지, 존속하게 해 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순결이 무엇인가. 그가 요구했던 할례의 정신, 그 근본은 무엇인가. 창세기 족장사에 등장했던 피해와 고통의 실제 당사자인 디나의 외침과 호소가 좀처럼 들리지 않게끔 순결, 종교적 명분, 할례 의식을 악용한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구조적으로 인간을 압박해 들어오는, 그래서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도록 숨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획일화의 망령이 진정한 종교적 모독이 아니었을까.

참된 순결이란 할례로 대표되는 종교적 퍼포먼스, 그 너머에서 인간을 향해 소리치는 인간의 본래적 무구성에 대한 탄원과 호소,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진실로서의 할례가 무너져 내린 뒤에 찾아온 할례는 획일화된 망령이 지배한 검은 할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아니, 물어야 한다. 정말 우리는, 오늘의 교회는 검은 할례를 원하는가. '나'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비극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남은 건 파편화된 신, 그 비루한 종교적 최소감각 만으로 유지되는 우상으로서의 신이 요구하는 폭력과 야만뿐인 검은 할례에 참여하길 원하는가. 그것만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탱해 주는 필연적 사용가치인가. 정말 그런 것인가.

필자는 이에 대해 썩 영민한 답을 하진 못해도 이것 하나만은 똑똑히 말할 수 있다. 서럽다고, 너무 서러워 견딜 수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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