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악과 그 특수성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악의 모양이나 형태는 대개 혐오의 이미지와 함께한다. 특히 무분별한 이미지 소비 시대에 접어든 현대 사회에선 악의 개념이 오히려 점점 더 두드러진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악은 여러 가지 형태로 파고들고 있다. 가장 날카롭게 떠오른 악은 반사회적 범죄의 모양을 띠고 나타난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와 같은 묻지 마 범죄와 강력 범죄가 어떤 원한이나 동기부여 차원을 넘어서서 인과 없는 범죄행위로 발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범죄의 증가, 확대와 발맞춰서 진화한 악의 한 형태로서의 세련됨이 출현한다. 반사회적 범죄자들을 상업적 이미지에 활용하는, 이를테면 영화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가 다루는 방법은 세밀하고 세련되게 진화했다.

물론 미디어는 그러면서도 악을 단죄하는 방식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악의 탄생과 전개 과정이 그만큼 더 끔찍해지고 악랄해졌다는 반증을 입증하기 위해 악에 대한 강한 경각심을 함께 포진해 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악은 한층 악랄하고 치밀해졌지만, 그 악이 더 강하고 혐오스러운 척결 대상이란 합의 역시 견고해졌다. 악은 반사회, 비윤리의 대표성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척결해야 하는 악마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악의 평범성

그렇다면 악의 개념, 혹은 현상을 놓고 이를 대하는 기준에 있어 현대 사회와 구성원들이 보여 주는 합의의 보루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안정화다. 그런데 안정화 개념에 표피적으로 동원되는 치안, 보안에 대한 요청이 주류를 이루지 않는다. 구성원들의 위기의식 바탕에는 그들 자신을 포박한 조직, 체계, 바탕의 안정이 절대 항수로 작동된다.

눈에 보이는 실질적 보호에 대해서는 의외로 안정화에 기대지 않는다. 실질적 악의 공포에 대해서는 안정화의 잣대를 제시하기보다 직접적인 심판의 잣대를 앞세운다. 심판의 양상이 짐짓 불안과 불안정을 야기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반대로 조직과 체계의 안정화에 대해서는 더 한층 예민하게 집중한다. 이렇듯 안정화의 요구는 현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원적 인식 접근을 알게 모르게 교설한 것이다.

표층을 구성하는 세상은 복잡다단하고 세련되며 현란하다. 이미지와 스토리텔링, 현대 문화를 추동하는 키워드는 포스트모던이란 미명하에 개인주의적 개성 표출의 극한이다. 그러한 극한적 움직임을 포스트모던의 문화적 분위기는 다양화, 혹은 파격으로 소개하며 은근한 강점처럼 소개하는 데 광분한다.

하지만 세상의 내층은 평범성의 절대 항수를 제물 삼아 평범함을 하나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 기준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조율 과정에 집중한다. 안정화 기준에 있어서 참된 다양성은 망실된다. 또한 구성원들의 기준에서 거론한 평범함의 테마, 그 최소한의 기준 역시 오래전 전체주의 산물에 가까운 획일화의 담론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거론되는 평범성은 그 내층을 전체주의 획일화 흐름에 넘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혹한 악으로 기능한다. 여기에 오해되는 개념 하나만 바로잡으면 악의 실체는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 사회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악의 평범성은 표층의 세계에서 부각되는 반사회적, 비윤리적 문제의 세련됨을 보여 준 뒤, 그렇게 이미지화된 악의 비범함을 통한 윤리적 경각심의 배설 영역을 표층의 차원에 맡겨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은 표층을 아우른 사회에서 더 한층 이미지화되어 소비된다. 하지만 악은 표층 세계에서 생산되고 배격되는 저항과 수용의 운동을 반복함으로써 현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 산화되거나 명멸되는 무위의 소멸 과정으로 경화된다.

그 사이 구성원들의 중심인 내층의 세계는 평범해야 한다는, 전체주의를 닮아 버린 획일화의 도그마를 진리로 여기고 그 추구에 열광한다. 개인의 자아 발견은 오간 데 없고, 무엇보다 유사 하나님, 우상으로서의 신이 평범성의 뒤편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악의 평범성을 확대재생산한다. 여기에 교회는 평범해야 한다는, 혹은 안정해야 한다는 도그마의 이중대 역할과 그 사이에서 갈등한다.

교회의 펑범성, 그 본질

교회는 평범함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교회는 구원의 특별함과 예수 십자가 정신의 단호한 결기를 종교적 특성의 전위에 내세운다. 세상을 향한 변화, 내세를 향한 부단한 영적 의지의 촉구 등은 평범함의 개념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교회의 평범성은 또 다른 이름인 복음과 안식, 평안이란 개념으로 기능한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살기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 한다. 교회는 영혼과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가장 평범한 삶의 진리인 안식과 평안이란 개념을 제시하며, 예수 십자가 정신이 가진 양면성을 애써 통일적인 것으로 둔갑시킨다. 다시 말해 십자가 정신은 인간의 참 평안과 안식을 얻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그로 인해 맑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썩은 오물통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악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고난과 핍박을 감내해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 반드시 달고 단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참 평안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가 교회가 현대 사회가 이야기하는 악을 넘어서는 한 지평을 제시한 꽤 설득력 있는 구호다.

하지만 교회와 평범성을 세상과 사회가 말하는 악의 내층과 표층에 대한 치밀한 충돌 구조로 이해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부조화의 공존을 긍정하지 않을 때, 교회는 평범성의 포로가 된다. 이때의 평범성은 안정화의 욕구로 추동된 획일성의 함정에 빠진 평범성이다. 그 평범성은 명백한 악이다.

현대 사회가 바라보는 이중 전략의 일종인 이미지화된 반사회적 범죄 모델로서의 악의 기원은 사실상 악마, 마귀, 사탄, 무간지옥, 염라대왕, 불의 신 등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상징에서 비롯된 원초적 두려움의 생산물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악은 특수성, 예외성, 개인화된 악으로 상징화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특수성을 가진 악은 그야말로 사회 구성원 누가 봐도 단죄와 격리가 필요한 공공의 적이다.

그런데, 악의 특수성은 악을 개별화시킨 병리 현상 정도로만 취급하기에 급급하다. 대증적 악에 대한 혐오가 증가할수록 그에 대한 원인과 문제 해결 역시 대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악의 혐오, 상징이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발원된 것이다. 종교적 상징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은폐와 폭로의 두 기능으로 자리매김하는 제법 강력한 능력을 행사해 왔다.

종교적 상징은 은폐의 욕구 측면에서 공동체 기준의 평등성과 획일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렇게 획일화된 개인의 주체적 심장이 거세된 빈자리에 '신', 혹은 '종교적 대상이나 교훈'을 슬그머니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은 평범한, 혹은 평범해지고자 하는 욕망의 그늘 안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이 부풀어 올라 전체를 갉아먹는 보이지 않는 괴물로 기생한다.

폭로의 기능으로서의 십자가

그런데 종교적 상징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은폐의 욕구에만 사로잡히지 않는 태생적 특질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폭로의 의지다. 폭로의 의지는 평범성에 대한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외층의 특수성 뒤에 숨어 버린 배후의 그늘에 주목한다. 특별히 교회의 케리그마, 그 중심을 차지한 십자가 사건의 무게감은 여하의 내층과 외층, 안팎에 포진되어 있는 악의 실체에 주목하는 폭로의 기능으로 작동된다.

종교적 상징에서 은폐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그렇게 은폐된 무덤과 같은 빈자리에 교조주의적 가르침으로 도색해 버린 인간 내층에 자리 잡은 획일화와 인간 무의식의 전체주의에로의 경도 가능성, 그 악의 평범성을 십자가 도상의 피흘림을 통해 적실히 보여 주는 것, 시공을 초월하여 폭로의 현장에 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의 이중 전략에 포섭된 평범한 악의 교회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예언자, 선지자의 외침이다. 

그런 맥락에서 폭로의 정신으로 기능하는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을 스스로 탈각시켜 공동체, 사회, 국가, 교회가 직면한 부조리의 한복판인 평범할 수 없는 악의 실체와 조우하게 한다. 진실과 마주하는 십자가 정신은 더 이상 상징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부서진 진실의 한 조각, 형체를 찾을 수 없는 진실의 파편이다.

이로 인해 현대 사회가 점점 더 교묘하게 파고드는 특수성의 영역으로 악의 상징을 전가시키는 모든 시도는 중지된다. 그리고 혐오의 대상으로서의 악의 저변을 잠식한 획일화와 전체주의 망령으로 기능하는 악의 평범성을 목도하게 한다. 교회, 십자가 정신, 예언자의 외침은 이러한 폭로의 첨단에 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폭로의 의미로서의 십자가는 결코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그걸 알아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도리어 침묵할 뿐이다. 폭로하는 십자가 정신의 답은 총체적 악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의 한복판에서 주어진다. 실존은 실체가 드러난 상황 속에서 현재까지 걸어온, 계속 가게 될지도 모를 평범한 악의 욕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역과 저항의 본능에 눈을 뜬다.

하지만 악의 특수성이 낳은 폐단에 대한 경계와 그 내층을 들여다보는 과정, 험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극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은폐의 미혹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 은폐의 미혹이 오늘날 현대 사회를 망각과 집단주의에 늪에 밀어 넣었듯 오늘날 교회 역시 악의 표층적 이미지 소비에만 열광하고 그 빈자리에 은폐와 획일화란 이름의 평범성만을 강요하는 구렁 속에 스스로 매몰되었다고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우려일까. 아니라고 본다.

거역과 저항의 의미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성서에서는 분명 축복, 복음이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진실이 마주한 십자가는 악의에 연루된 평범한 축복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복음, 교회, 십자가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아벨의 피 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부짖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 10절 참고)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