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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과 예수, 그리고 교회
교회는 광장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 주원규 (bay3135@empal.com)
  • 승인 2016.06.2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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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본질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 최인훈 <광장>, 1961판 서문 중 일부

일찍이 남북 이데올르기, 그 비극적일 만큼 첨예한 대립과 갈등, 뒤엉킴의 핵을 묘파하던 작가 최인훈은 자신의 소설 <광장>의 서문에서 광장의 필연성을 밝힌 바 있다. 인간은 광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에 대해서는 크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오늘의 세상은 광장의 가능성으로 팽배해져 있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이 가볍게 차용해 버린 자본주의의 우아함은 승자 독식 구조의 패악 속에서 광장의 가능성을 시장의 일상으로 대치해 버렸다. 최인훈이 갈구하던 1960년대 초반의 광장은 2010년대에 접어든 지금은 가능성도, 무엇도 아닌 유물화된 폐허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의 패러다임이 천지 개벽에 준할 정도로 급변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을 향한 지향은 변하지 않는다. 광장의 본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그렇다.

작가 최인훈의 모든 논조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광장의 본질에 대한 그의 묘파는 비교적 정교하다. 광장은 피할 수 없는 구조의 한복판이며, 동시에 한없이 뒤엉킨 미궁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동시에 인간은 밀실을 갈구하며, 자신 안의 세계, 이른바 내부 세계에 대한 열망에 투신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밀실은 광장의 한복판이나 혹은 주변, 여하튼 광장의 열린 가능성과 뒤섞여 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광장이 가능성이 될 수 없도록 조장하는 흐름이 있다. 자본과 시장이란 보이지 않는 흐름이 그렇다. 자본을 삼켜 버린 시장, 그 반대로 시장을 자본의 기호로 잠식해 버린 뒤의 시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인간의 존엄은 죄다 거세해 버리고 산업화 벨트 위에 적재해 놓은 뒤 적당한 상품 가치에 따라 등급 매겨 재고 처분해 버리면 그만이다.

이렇듯 자본과 시장의 괴물이 점령해 버린 광장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닌 무류(無類)의 폐허로 잔류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오늘의 인간은 여전히 광장의 가능성을 갈구한다. 그 갈구의 정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은 더딘 망설임과 끊임없는 중얼거림으로 배회하며 광장의 본질, 그 충동의 감각을 연속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2천 년 전의 예수는 광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광장의 본질이 열린 공간으로서의 가능성, 생을 향한 분명한 충동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전제가 허락된다면 그때 예수가 남긴 어록과 행적이 담긴 복음서가 밝힌 광장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광장의 본질이 쏟아 내는 본격적인 흐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장. 흥분과 경계 해제, 우연과 사건의 들끓음

광장은 정확한 인과를 규명하기 힘든 파토스로 넘쳐난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행동 양상이 검열 없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그렇다. 광장은 익명성과 우연으로 들끓는다. 하지만 광장의 일원인 인간은 밀실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자아의 좌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거나 지켜 나간다. 그렇기에 광장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서는 열정이거나 흥분이다.

흥분의 감흥은 각자의 개개인을 둘러싼 공동체 전반에서 출몰하는 사건의 들끓음을 타자화시키지 않는다. '나'와 '타자', '내가 둘러싼 세상'과 '나와 상관없다고 간주해 오던 세상'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장벽과 장벽 간 붕괴가 이뤄지는 속도를 광장에서 지켜보는 건 실로 경이롭다. 이러한 내적 붕괴를 통해 광장의 파토스는 가속화된다. 그렇게 가속화된 파토스가 광장에 모인 '나'를 파편화된 '개인'에서 공동체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참 '나'의 회복 가능성으로 이끄는 힘으로 기능한다.

광장. 저항과 공분, 축제의 절정

광장의 경험은 인수분해된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저항과 공분의 공통분모를 유도한다. 저항의 주체가 구체화되는 게 아니라 저항해야 할 대상이 구체화되는 것인데, 한계를 넘어서는 움직임 속에서 발각되는 저항의 대상은 자본과 시장이다. 이러한 저항과 공분은 광장에서 우연과 수많은 변수들의 융합을 일으킨다. 일종의 난장을 출범시키는 것이다.

이때의 난장이 오합지졸의 무의미한 소란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그건 아직 광장의 민낯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난장은 저항과 공분의 정서를 축제의 여진으로 상승시키는 불가해한 신비를 허락한다. 불가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자본과 시장의 검열 구조에서 벗어난 축제는 자본의 눈에서 볼 땐 효율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무규칙, 무가치, 무종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광장. 거시와 미시적 민의가 한 곳으로 모이는 용광로

광장은 끓는 용광로다. 광장은 사회적 구조가 파생해 놓은 계급의 문턱이 낮은 것 자체가 아니라 아예 문턱 자체를 해체하는 가능성으로 상존한다. 광장은 문턱이 아닌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 잠재력은 무한대의 열림과 증폭의 의지로 해독되기에 충분하다.

광장에 선 개인들은 소소한 개인사를 성토하거나 제도와 사회구조의 모순 같은 거시적 문제의식도 무리 없이 쏟아 낸다.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잠시 유보한다면 이 경우 개인의 문제의식이 표출되는 양상을 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장은 파편화된 객체들의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민의의 통합을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마당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광장. 평화와 고요의 보루

외연으로 나타난 광장의 모습은 대개가 혼란과 흥분으로 해독된다. 혼란을 우려하는 관점은 광장을 한층 더 불길한 위험 인자로 취급한다. 광장을 보호막 없는 불안의 지속으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은 광장의 한 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반화의 오류다.

광장은 저항과 축제적 흥분의 두서없는 뒤얽힘과 난장의 멜팅 포트(melting pot)를 스스로 지속한다. 그렇게 지속될 수 있는 지류에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흐름은 역설적이게도 평화와 고요다.

평화는 자본과 시장의 아귀다툼 속에서 신음하는 현대사회의 소외를 위무하는 바탕 질서의 보루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요는 난장의 멜팅 포트가 지속되는 외연적 소란 속에서 바탕 질서인 평화가 갈구하는 정일(靜逸)한 심연을 기꺼이 열어 놓는다. 광장의 영성은 그 궁극의 가능성으로 평화와 고요의 신호를 내어놓는 것이다.

광장과 예수, 그리고 교회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는 자신의 삶을 길 위에서 시작해 길 위에서 마무리했다.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했다는 복음서의 탄식이 가져오는 파편적 흔적만 미루어 보더라도 그렇다. 그렇기에 예수는 인간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이고 아우성칠 수밖에 없는 광장에서 자신의 외침과 소리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광장을 대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예수는 광장을 매우 쉽게 이념과 종교,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 갈등으로 구분 지으려는 시장의 패거리주의에 정면으로 맞섰다. 예수는 기득권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헤게모니, 그 비열한 관계망으로 오염된 판을 기축에서부터 뒤흔들어 광장을 오염시키는 시장과 자본의 다층적 억압으로부터 민감한 거리 두기를 추구했다. 예수는 시끌벅적한 난장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도리 없는 혼란과 무질서의 흥분으로 엄습해 드는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였다.

하지만 예수는 광장에 나선 인간의 또 하나의 성찰 기제인 밀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을 정치적, 종교적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총체적인 시장의 욕구로부터 벗어나 골방에서 기도할 것을 요구했다. 누가 보아도 오합지졸로 보이는 제자들로 버림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비효율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예수의 사자후는 분명 본질적 사자후다. 정치적이지도 않았지만 결국엔 정치적 본질을, 그다지 종교적이지도 않지만 끝내 종교의 본질을 묘파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성이 예수의 존재 의미라면, 그러한 존재 의미가 한바탕 쏟아 내는 바탕 정서인 저항과 축제, 평화와 고요의 정미한 준동 기제를 광장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온당한 예수 정신의 한 해석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통념의 선 긋기, 외연의 위선, 위악으로 회칠된 오염된 광장, 그 시대의 중심을 돌파하던 예수의 사자후를 이후의 연결 고리임을 표방하는 교회가 어떻게 연대하고 있는 지 살펴볼 때, 매서우리만치 가혹한 문제의식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오늘의 교회만이 아닌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계승한다고 말하는 시대와 계층을 망라한 모든 교회의 문제의식으로 계속해 왔었다.

도발적인 질문을 감히 남겨 보자면 이렇다. 교회는 광장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의 교회적 현실에서 이 질문은 더욱 아프고 날카롭게 실감된다. 그리고 다시 묻게 된다. 오늘의 교회는 시장과 자본의 야만에 의해 잠식된, 간신히 형해(形骸)만 남은 민의와 영성의 교환 가능태로서의 광장과 함께하고 있는가. 아니, 함께할 최소한의 의지는 남아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 나눔과 성찰의 의미로서 예수님을 인용했기에 부득이하게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존칭 생략에 대한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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