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저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라기 2장 1-3절)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하나님이 분노할 일은 성경의 기록에 차고 찼다. 도대체 사랑이 얼마나 크기에, 그 넘치는 분노를 견디고 견디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분노하실 정도이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용납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온갖 곳의 분노가 제멋대로 분출될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뉴스를 통해, 혹은 가까운 지인들을 통해, 그리고 아주 가끔은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몸서리치게 목격한다.

연일 이어지는 테러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 가고, 부모가 아이를 죽이며, 가정 폭력을 버틸 수 없는 아이들이 거리를 방황하며 범죄의 굴레로 빠져든다.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은 시대와 장을 막론하고 생명과 삶이 유린되며,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적 향방 앞에서는 "이것이 답이다" 하는 오만한 소리들이 무성해 유권자들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대중은 차라리 귀를 닫고 권력과 돈의 연횡은 다시 힘을 떨친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지난주는 고난주간이었다. <붉은 그리스도인들>의 쉐인 클레어본 말대로, 우리는 '거룩하지 않는 세상에서 거룩한 한 주'를 보내야 했다. 지난 22일 화요일, ISIS가 일으켰다고 스스로 주장한 브뤼셀 테러 공격은 다시 한 번 서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연이은 테러 사건, 희망을 강탈하고 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고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지난해 11월, 132명의 시민이 사망한 파리 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이 체포된 후 4일 만이었다. 컴퓨터 폭력 게임처럼, 즉각 서로 화답이라도 하듯 폭력이 경쟁적으로 자행되는 인상이 아닐 수 없다.

고난주간을 맞으며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고 있었을 서구 사회는 또다시 일어난 테러 사건을 맞으며 피를 토하는 울음으로 이 비극의 현실을 탄식했다. 세인트폴 루터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 에릭 바레토(Eric Barreto) 박사는 브뤼셀 테러가 발생한 다음 날 <소저너스>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반복되는 폭격과 테러리즘은 우리를 기진하게 하고 숨을 조이는 듯하다. 이젠 모두 너무 평범해졌지만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는 자연스런 죽음이 아닌, 증오와 폭력과 절망에 이끌린 심령들이 일으키는 죽음이 매일 같이 우리의 인간성을 고갈시키고 우리의 희망을 강탈하고 있다고 절규한다. 조지워싱턴대학교 사회학 교수 프레더릭 루믹스(Frederic Lemieux)는 <소저너스>에서,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급진 세력들의 조직적이고 도발적인 테러 공격이 증오와 절망에 의해 배양되고 있다고 밝혔다.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실시한 '극단주의 연구 프로그램'(the Program on Extremism)에 따르면, 2015년 가을 중 ISIS에 참가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라크로 들어가기를 시도하거나 여행한 미국인이 250명이었다. 미국 전체 50개 주에서 ISIS 동조자들에 대한 900건의 조사가 이뤄졌으며, 그 결과 71명의 혐의자가 테러 관련 활동으로 기소되었다.

평균 나이는 26세이며, 그들 중 86%가 남성이다. 27%는 미국 영토에서 폭력을 실행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 그들은 인종, 계층, 학력, 가족사가 다양했으며, 체포된 이들 중 40%가 이슬람 개종자들이었다. 71명 중 58명이 미국 시민이었다. 프레더릭 루믹스 교수는 아라비아반도 국가들의 ISIS 동조자들 비율이 가장 높지만, 미국 토양에서 드러난 이 수치는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브루킹스연구소의 보고를 소개하며, 트위터 사용자에 대한 ISIS 지원을 살펴보면 위치 파악이 가능한 것만 미국이 세계 4위, 영국이 10위라 밝혔다. ISIS가 노리는 타깃 국가 목록에서 명백히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들 나라에서 ISIS를 위한 온라인 지지 기반이 놀랍도록 강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클락 맥컬리(Clark MacCauley)와 소피아 모스칼렌코(Sophia Moskalenko)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급진 세력에 매료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었다.

우선 첫 유형은 자기 국가 정권의 희생자들로,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처럼 정치적 불만이 기존 정치 체제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개인들이 급진화한 경우다. 일반인들이 결합하게 될 때 테러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이들은 가족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파리 테러는 두 형제들과 두 사촌들에 의해 일어났고, 샌버나디노 테러자들은 부부였으며, 보스턴 폭탄 테러자들은 형제들이었다.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이들이 함께 극단화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정 정권하에서 배척된 사람들의 곤궁도 극단화의 또 하나의 주요한 요소다. 2011년에서 2013년 사이, 이라크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집단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일었다. 시아파인 말리키 정부는 수니파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수니파 군인들은 군대에서 내보냈다.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많은 수니파는 당시 안전 공백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ISIS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군사 보복과 반무슬림 정치 수사, 이를 역이용하는 테러 집단들

한편,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서구 나라들에서 무슬림 사회는 여전히 배척받고 있다. 이에 권리가 박탈당한 무슬림 젊은이들 중 급진화의 주요한 대상이 되고 있다.

테러리스트 집단 간 경쟁 또한 폭력적인 그룹들의 급진화를 강화한다. 따라서 더 많고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경향이 커져 가고 있다고 프레더릭 교수는 우려했다. 지난 몇 년에 걸쳐, ISIS는 알카에다(Al-Qaeda)의 대척점에 서서 알카에다의 지도력을 무시하고 동일한 인구군에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경쟁했다.

ISIS에 의해 계획된 파리 공격 직후, 알카에다는 자신들이 말리 호텔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직접적인 경쟁은 영토와 오일 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것으로, 더욱 폭력적인 쟁투와 외국으로부터 더 많은 전투요원 유입을 불러오며, 서로 각축하게 된다. 

ISIS와 같은 이들 폭력 그룹들은 주짓수라는 유도 기술 전략을 사용하는데, 그들이 서구의 목표 대상을 공격할 때 적의 반응을 역이용하는 방식이다. 벨기에, 프랑스, 미국, 러시아, 영국 같은 나라의 정권들은 대규모 군사 보복과 적대적인 반무슬림 정치적 수사를 퍼뜨리게 되는데, 이는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바이다. 극단주의 그룹들은 그러한 반응들을 역이용해 자신들의 응집력을 강화시키고, 폭력의 타깃이 되는 국가의 청중들로부터 오히려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또한 ISIS는 자신의 적들을 비인간화하고, 그들의 생명을 경시하도록 하기 위해 증오 담론을 이용한다. 서구인들과 비신자들에 대해 이러한 이미지를 형성해 외국 인질들을 참살하고 콥트족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살아 있는 죄수들을 불태우는 것과 같은 자신들의 극단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자신의 추종자들이 죽게 되면 고통을 겪고 죽을 가치가 있는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을 적국 청중들에게 확신시키려 하고, 그들 죽음을 순교라 하여 자신들 신념을 선전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한다. 순교자들은 영웅이 되어 찬양받으며, 인터넷은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확정한다.

고난주간을 거룩히 보내고자 마음을 먹었을 기독교인이라면 다시 벌어진 테러 사건 앞에서 선지자들처럼 몸서리치며 절규했을 것이다. 쉐인 클레어본은 이 끔찍한 시간들을 다시 또 감내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예수가 겪은 고난의 시간들을 중첩시켰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고소를 당했다. 비난, 폭동 조장, 음모, (신전 파괴를 모의했다는) 테러리즘, 더하여 신성모독죄.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사랑이었고 치유였으며 희망이었음에도 그는 괴롭힘당했으며 심문당하고 학대받고 고문받았다.

로마 당국은 그를 모욕하며 옷을 찢어 벗겼으며 신이라는 그의 주장을 멸시했으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웠고 왕의 도포를 씌우며 조롱했다. 그의 친구들 대부분 그를 버리고 떠났다. 길고 긴 고독은 심장이 뒤틀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으며,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겪는 이 현실의 고통 앞에서 예수가 겪은 고통을 떠올린다. 예수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예수는 어떻게 그 시간을 극복했을까.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러한 시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

평화 훈련 조직인 글로벌이머젼프로젝트 공동이사 존 허킨스(Jon Huckins)는 "'저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더 이상 세상의 반대편 헤드라인 뉴스로만 돌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집 현관으로 바짝 다가오며 우리의 매일의 일상을 위협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정권이 강화시키는 안전 이데올로기가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일구는 걸음을 위축하게 하고, 반목과 대립을 심화시킬 뿐이라 지적한다.

신실한 믿음은 '원수 사랑'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시각으로 사태를 볼 것을 주문하다.

첫째, 테러의 목적이 두려움을 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관철할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무엇이 실제인가에 대해서는 오도될 수 있는 거짓 현실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가 두려움의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고 정치 세력에 의해 조장되는 거짓 현실에 매수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상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고 계시는 새롭고 역동적인 방식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가 안전을 추구하는 수단은 종종 하나님나라 정체성을 내주고, 덜 안전한 것으로 이끌리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시민의 안전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고 그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교회는 우리의 정치적 충성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충성을 이기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세상이 제시하는 '안전'이라는 우상에 매이게 될 때, 하나님나라의 증거를 타협하고 안전을 얻기 위한 수단을 정당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더 안전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의 죽음을 환영하는 것은 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보다 안전이란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어떤 바람도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악마화하고 벌을 내리게 된다.

이는 차별 없이 사랑하신 예수가 아닌 안전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폭력을 피해 도망쳐 오는 사람들을 거부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나그네'를 돌보라고 요청하신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안전의 우상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권이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수단들은 지속적이고 유지 가능한 안전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증오와 억압과 불안정을 낳을 뿐이며, 더 많은 폭력을 초래할 뿐이다.

셋째로 존 허킨스는 예수가 우리에게 요청한 것은 우리의 안전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다. 신실한 믿음은 우리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넘어 적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이를 사랑하는 능력보다 두려움이 더 커지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결국 더 이탈시키게 될 수밖에 없다. 안전에 대한 우상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고, 우리와 같은 모습,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 속으로 우리 자신을 위축시킨다. 관계성 밖에서는 어떠한 사랑도 기대할 수 없으며, 오직 오해와 악마화와 판에 박힌 규정만 있을 뿐이다.

"우리를 가르고 있는 장벽들을 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의 '적'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길은 우리가 내적으로 매몰되려는 유혹을 거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거듭 '타자'에게로 나아가도록 부르고 계신다."

부활 신앙을 붙들어야

배움터경당에서는 10명의 친구들이 공동생활 수련을 하고 있다. 함께 가까이 지내며, 먹고 자고 공부하고, 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눈다. 지내다 보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붙들고 서로의 이질적인 측면들을 함께 공유한다.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갈등이 표면화하는 순간들은 우리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들로 우리의 삶에 축적된다. 오늘도 한 주를 돌아본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이런 고백을 했다.

"지내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만남의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 화가 금방 가라앉는 거예요. 이제는 그런 마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금방 다시 좋은 거죠. 그건 우리가 그만큼 가깝고 서로 깊이 만나 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변한 자신과 우리의 관계가 놀랍고 신기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만남, 서로에 대한 헤아림, 문제를 풀어 가려는 노력이 어느 지경까지 방치되고 방치되면 자신을 죽이거나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분노를 해결하려 하게 되는 걸까. 이게 얼마나 오랜 세월을, 얼마나 심각한 수준까지 곪으면 전 세계적인 테러 행위가 빈번해지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일까. 

이토록 곪고 곪을 대로 심각해진 상황은, 인류 역사가 있어 왔던 만큼의 시간 동안 보상하고 상쇄해 나간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못할 문제처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다 사람이 행하고 초래한 일인데,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한 천재지변 같다.

서로를 향한 담은 더욱 높아지고 분노와 증오와 공포는 더욱 강력해진다. 무수한 개별 주체들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그 주체들이 서로를 향해 바라보며 참으로 기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서로 간에 장벽이 강고해지면 서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현실을 초래한다. 이는 서로가 바라보며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뻐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조롱하는 신성모독이다.

존 허킨스의 권면처럼, 믿음은 부질없지 않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도 더욱 확고하고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승리하심에 대한 더욱 실질적이고 생생한 믿음이 절실하다. 심연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고난의 시간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이 길이 종국에 부활로 이어질 것임을 믿는 커다란 믿음이 필요하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부활은 세상의 악행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절된 것이며, 죽음이 단번에 생명으로 화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믿는 것은, 갑작스러운 역전, 갑작스러운 새 국면이 가능함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능케 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우리로 더욱 많은 것을 위해 기도하게 할 것이며 더욱 많은 것을 행하게 할 것이다.

그 꿈 같은 일이 기적처럼 이뤄질 그 과정 중에, 우리는 그간 상처받고 고통받은 모든 자들이 위로받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며, 테러리즘이 성행해 가고 있는 국제적 정세 속에서 그들을 극단적으로 내몰았던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며, 타인의 희생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화하는 이들의 도모가 효과적으로, 때론 극적으로 좌절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에서 서로 몰랐던 이들이, 그래서 서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서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더 잘 이해해 가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저 멀리 벨기에에 있는 사람이든, 중동에 있는 사람이든,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사람이든, 그가 누구이든, 서로를 향한, 그들을 향한 인정(仁情)의 마음이 애틋이 일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도모하지 않은 무수한 역사하심으로 이 땅의 깨어진 관계에 부활의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의 믿음이 너희를 구원했다" 칭찬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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