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5-13을 동성애 옹호적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논란이 되고 있나 보다(관련 기사: 예수가 백부장 동성 커플에게 던진 한마디). 내 관심은 '동성애'라는 주제보다는, 성경 해석에 관한 것이다. 만일, 성경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한 의미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공정한 것인지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낀다.

그들의 논거는 이렇다.

첫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자가 각각 백부장의 아픈 하인을 의도적으로 παῖς(파이스)와 ἔντιμος δοῦλος(엔티모스 둘로스)란 표현을 사용한 점. 즉, 이 구별된 어휘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백부장과 예수의 계급과 관련한 사회학적 분석은 백부장이 그의 아픈 하인과 연인 관계라고 하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전거들이다.
셋째, 결론은 이렇다. 예수의 한마디,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넷째, 그리고 "동성 연인을 사랑한 이 백부장이 하나님나라에서 인정받게 될 거라 칭찬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1)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단어들을 해석할 때, '문화적' 맥락보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문맥'이다. 이것은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학적 논의에서 이미 합의가 된 결론이다. 문제가 되는 본문의 1차적 배경은 유대교나 유대적 문화이다. 그레코로만 문화적 배경은 2차적이다. 1차 청중이 유대적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이스'를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적 배경에서 읽는 것은 부차적이다. '파이스'가 문화적으로도 '종, 아이'로 읽히는 것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단어가 마태복음 안에서 어떻게 쓰였는지가 해석의 중대한 배경이 된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예수를 당시 '문화적'으로 소크라테스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와 비교하는 것이 더 본문의 문맥에 적합한 것과 같다. 외적인 '병행'을 발견하면 흥미롭고 상당히 그럴 듯하게 느끼게 되지만, 그런 병행을 바로 본문 안에 쉽게 대입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she is hot'은 무슨 뜻인가? 그녀가 매력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녀가 덥다는 뜻인가? 그것은 그 단어가 사용된 본문의 문맥을 알지 않고는 단정할 수 없다. 본문 해석에 있어서는, 어떤 외적인 '병행'보다 '본문 내적인 문맥'이 훨씬 더 결정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2) 누가복음의 ἔντιμος δοῦλος(엔티모스 둘로스)는 ‘특별히 여김'을 받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여김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수많은 가능성 중에 확정할 근거는 본문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엔티모스'에서 '티메'란 원래 '존경받을 만한, 존귀한'이라는 뜻이다. '명예로운 무엇'으로 보는 게 더 일반적이다. 그래서 종('둘로스')이라면 마땅히 일을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훨씬 더 타당하고 일반적이며, 가장 안전한 해석이다. 그 이유를 '동성애'라고 보는 것은, 해변의 모래알들 중에 한 움큼을 쥐고 이것이 이 바다 모래알들 가운데 가장 때깔이 좋은 모래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 사회학적 분석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보자.

"그런데 이 이야기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로마의 백부장은 당시 정복자였고 억압자였다. 예수에 비해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 반면 예수는 유대 랍비로 피지배계급이었고, 억압받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 백부장이 예수에게 자신을 낮추고 간청하는 모습은 비범한 일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Mark 목사와 Jeff 목사는 백부장이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그 하인이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이는 심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라 주장한다."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는, 본문이 처한 인접 문맥이 우선이다. 이 본문의 핵심은 '종과 주인'의 '관계'이다. 그 종이 어떤 종이었는지는 본문의 관심이 아니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백부장에게서 놀라운 점은, '예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동성애자에 대한 사랑과 애착의 뜨거움'이다. 동성애적 뜨거운 사랑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지, 예수 자신의 권세에 대한 믿음에 눈이 멀어 자기 신분도 잊은 것이 아니다. 그는 어떤 사랑에 눈이 멀었는가? 그러한 권세와 긍휼을 가지신 예수에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눈이 먼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도 절박한 그에게 있어서, 병 고쳐 주는 대상이 굳이 예수였을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헬라의 그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에게 빌었어도 칭찬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과연 이렇게 '절박한' 믿음을 칭찬한 것이었을까? 마태복음 본문은 이스라엘에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한 질타를 포함한다. 이방인도 알아보는 메시아를 왜 유대인은 못 알아보는가에 관한 질타이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 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10절). 예수는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그 백부장처럼 동성 애인인 하인을 뜨겁게 사랑한 경우를 보지 못해서 그를 칭찬한 것인가?

(4)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라고 하셨다. 그들의 해석대로라면, 그것은 동성애자를 그대로 인정한 것인가? 혹시 그의 병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파이스'에 대한 그 많은 의미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맞을 확률이 있다면, 이 하인의 병이 지금 우리가 '에이즈'라고 알고 있는 그 병일 확률은 얼마나 더 높은가. 만일 그렇다면 혹시, 그 동성애로 생긴 병을 고쳐 주시는 분께서, 그 병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는 동성애를 계속하라고 가르쳤을까?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그분이 여기서도 일관되게, '내가 그 병을 고쳐 줄 테니, 다시는 그런 병을 유발하는 그런 죄를 ― 고대에서는 죄와 병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 다시는 짓지 말라 하셨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파이스'를 동성애적으로 해석하는 정도라면, 이런 해석이 무리하다고 어떻게 반증할 것인가?

(5) 그들의 결론을 인용해 보자. "동성 연인을 사랑한 이 백부장이 하나님나라에서 인정받게 될 거라 칭찬한다." 이것이 오해의 끝이다. 잘못된 해석의 끝이다.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예수의 권세를 알아본 이방인의 예수께 대한 '믿음'이다. 그 크신 권세와 긍휼로 자신들에게 오신 이스라엘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다. 이것이 기이한 점이라는 것이 마태복음 8-9장의 문맥이다. 설혹,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그 ‘동성애자인 백부장’을 사랑했다고 하자. 그것은 예수께서 그 '동성애 자체'를 인정한 것인가? 역시, 본문이 처한 마태복음 전체, 혹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일관된 태도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것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죄도 사랑하시는가? 혹은, 결혼에 대한, 이혼에 대한, 간음에 대한 예수의 일관된 입장을 보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 하셨다(동일한 마태복음의 문맥, 5:28). 그런 자는 '오른 눈을 빼 버리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29절). 미안하지만, 예수께서는 '남자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라는 가정은 아예 전제하지도 않으셨다. 바늘 도둑이 죽을죄라면, 소 도둑은 아예 거론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생각을 해 보라. 그리고 성경을 케이크의 맨 위에 놓인 체리 빼 먹듯, 전체와 분리시켜 읽는 버릇을 버리라. 당신은 친구의 말을 들을 때, 한 단어만 빼서 읽고 이것이 그의 뜻이라고 우기며 싸우는가? 그런 친구를 계속 사귀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적어도,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동성애 자체가 정상이라고 인정한 흔적이 없다. 그 반대이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결혼·이혼관보다 예수 자신은 더 엄격한 결혼관을 보여 주신다. 이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창세기를 인용하실 정도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4-6). 잘 보라.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성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다. 한 몸이 되는 것의 전제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을 창조 때 의도된 성적 결합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임을 천명하신다. 같은 성의 결합은 아예, 출발부터 전제 속에서조차 없다. 그것은 창조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에 혹시 나타나 있을지도 모르는 '동성애'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더 원리적이고 분명한 표현이다. 생각해 보라. 법에서도 '조례나 시행규칙의 한 예들'에서 원리를 꺼내지 않고, 더 상위에 있는 민법, 형법, 그 위에 헌법에서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상식이다. 성경에서 덜 명확한 것의 의미를 확정하는 방법은, 그에 관해 더 명확한 본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헌법이 조례보다 상위법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태복음은 8장의 '파이스'라는 희미한 용어보다, 더 명확한 본문에서 성 정체성의 문제, 성적 결합의 문제에서 확연히 말한다.

만일 내가, '마태복음 8장을 동성애 옹호적으로 해석한 그들의 다른 해석들은, 볼 것도 없이 해석학적으로 서투르고 일방적인 엉망진창이다'고 단정한다면 그들은 분개할 것이다. 마태복음 8장 해석만 보고 어떻게 다른 해석들도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냐며 화를 낼지 모른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그들의 단정도 그렇게 경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더 슬픈 일은, 본문을 그 원래의 문맥에서 떼어 내, 자기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는 '자의적 해석'이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굳이 논증할 것도 없는 이런 해석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이것보다 더 슬픈 마구잡이 성경 해석으로 교회를 혼탁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치명적인 세속적 바이러스에 감염시켜 중병으로 끌고 가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이 이미 우리 안에도 얼마나 많은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채영삼 / 백석대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 이 글은 채영삼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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