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퀴어 축제가 개막하면서 행사를 전후하여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때 '예수가 동성 커플에게 던진 한마디'라는 글이 11일 <뉴스M>에 실렸고 SNS에 활발히 공유되었습니다. 지난해 7월 ㅍㅍㅅㅅ에도 게재되었던 홍신해만 씨의 블로그 글로, 마태복음 8:5-13과 누가복음 7:1-10에 나오는 백부장의 이야기를 '퀴어 비평' 입장에서 각색한 것입니다. '종', '하인'으로 번역된 '파이스'를 '동성 연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이를 본 총신대 신학대학원 신약학 신현우 교수가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홍신해만 씨의 글 전문(바로 보기)을 허락받아 싣고, 신현우 교수의 글도 기고받아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마태복음 8:6의 '파이스'의 정당한 해석

개연성을 버리고 가능성을 택하여 마태복음 8:6의 '파이스'를 '동성 연인'이라고 해석하는 사이비 주해가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마태복음 8:6의 '파이스'는 일반적인 용례에 따라 단지 '아이', '자녀', '종'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BDAG, 750~751). 특히 마태복음 저자는 이 단어를 언제나 '아이', '자녀', '종'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 8:6도 같은 뜻으로 쓰였으리라는 개연성을 지지한다(마 2:16; 12:18; 14:2; 17:18; 21:15).

마태복음 문맥은 이러한 용례를 벗어나서 '파이스'가 동성 연인이라는 어떤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헬라 문헌의 몇 구절을 근거로 마태복음 8:6에서도 파이스가 '동성 연인'으로 쓰였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성에 토대하여 개연성을 거부하는 일이다.

누가복음 7:2의 '엔티모스'도 '사랑하는'이라기보다는 '명예로운'이란 뜻이다. 누가복음 14:8에서 이 단어는 '명예로운 자리'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기에 이러한 용례를 무시할 수 없다.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엔티모스'는 '둘로스'(종)를 수식한다. '명예로운 종'이란 종으로서 명예로운 자이므로 연인으로서 사랑스러운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본문도 동성애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해석될 수 없다.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 백부장이 로마 군인이므로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도 근거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8:5에 나오는 백부장은 헤롯이 통치하는 가버나움 지역의 백부장이므로 그는 로마군이 아니라 헤롯에게 속한 군대의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결혼하여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가버나움 백부장이 가족을 멀리 두고 파견 나온 로마군이라 간주하면서 그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을 붙잡는 해석은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연역적 한계를 보여 줄 뿐이다.

더 많은 용례와 문맥의 침묵을 무시하고 극소수의 용례를 가져와 침묵하는 본문에 집어넣어 자신이 읽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정당한 본문 해석이 아니다. 이것은 증거를 채택할 때 개연성보다 가능성을 채택하는 불공정 논증이며,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이다. 사회적 배경마저 문헌적 근거에 토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여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심지어 증거 조작에 해당한다.

단어 용례를 증거로 사용할 때에는 개연성 대신 가능성을 채택하는 불공정 게임을 하고, 본문의 침묵을 남용하여 자신의 말을 집어넣고 배경의 증거는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학문의 탈을 쓰고 복음서를 왜곡하여 동성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다. 만일 그런 식으로 증거를 다루며 재판을 한다면 가능성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을 때려잡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무죄의 증거를 무시하고 약간의 유죄의 가능성을 채택하여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유죄의 증거를 무시하고 약간의 무죄의 가능성을 채택하여 범인을 석방할 것이다. 그들은 피의자의 침묵을 악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소설을 쓰고 피의자를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때로 조작된 증거를 채택하여 재판을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자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동성애자들을 성 소수자라 부르며 포용하면서도, 시대의 패러다임을 벗어난 주장을 펴는 의견 소수자들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며 매도할 것이다.

사본학 분야에도 개연성 대신 가능성을 붙잡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킹제임스역주의자들)은 TR/KJV(텍스투스 레켑투스/킹제임스역본)가 원문을 보존하였을 가능성만을 주장하며 많은 개연성 있는 증거들을 무시한다. 이 사본학적 근본주의자들과 저 주석학적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개연성 대신 가능성을 택하며 연역적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학문의 탈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연역적 결론이 그들에게는 확신에 찬 도그마이거나 편승할 만한 시대정신이겠지만 둘 다 학문을 포기한 선택일 뿐이다.

차별받는 사람들, 긍휼히 여겨야 할 이웃이 많다

동성애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여 이용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동성애 그 자체보다 더욱 큰 문제이다. 동성애자들을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한다. 동성애자들도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하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참된 긍휼은 단지 차별하지 않고 정당화해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참으로 긍휼히 여기려면 그를 차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을 참으로 긍휼히 여기려면 그가 그러한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계속 가난을 즐기도록 보호하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법이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동성애 속에 가두어 두려는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법일 수밖에 없다. 그들을 동성애로부터 해방하는 법이야말로 참으로 그들을 위한 자유의 법일 수 있다.

동성애가 일종의 병적인 상태이며 중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변화를 사회에 가져오려면 그러한 변화가 사회 속에서 안전하고 무해하며 오히려 사회에 이롭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동성애가 동성애자 당사자들에게도 유익함을 입증해야만 한다.

설령 동성애자들을 무조건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백번 양보하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왜 현대사회는 유독 동성애자들을 대표적인 피해자인 양 간주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 마치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기는가. 우리 사회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많고, 무고하게 남에게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법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은 배제한 채 시대의 흐름을 따라 동성애자들 보호에 초점을 맞추는 발상은 시대 조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사회적 차별을 유지하기 위한 특권층의 꼼수가 동성애자들에게 시선 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남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않고도 피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야말로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은 지금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무 잘못 없이 낙태당할 위기에 있는 태아들을 얼마나 보호하는가. 우리 사회는 부모의 이혼으로 깨어질 위험 속에 놓인 가정의 어린이들을 얼마나 보호하는가. 우리 사회는 결혼 서약을 어긴 자들에 의해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보호하는가. 우리 사회에는 이들을 보호하는 어떤 법적 장치가 있는가. 간통죄는 위헌이라 해 놓고 동성애 결혼은 합법화할 것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억울하게 피해당하고 차별까지 받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다. 이 땅에 가장 많은 약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들이다. 특히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는 어린이들이다. 본래 머리가 나쁘게 태어나서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공부 못한다고 구박당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들이 무슨 피해를 세상에 주었다고 차별당해야 하는가. 그들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있는가. 그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으니 정치적 고려 대상이 아니고 동성애자들에게는 투표권이 있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동성애자들 외에도 긍휼히 여겨야 할 이웃이 너무도 많다. 특히 안전 불감증에 빠진 한국 사회 속에서 피해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했는가. 그들을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여 두 번 죽이면서도 동성애자들에게는 너그러운 관용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성추행당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욕하고, 성추행을 한 사람들은 성욕이 강하게 타고 났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개연성을 버리고 가능성을 택하는 자들이 범하는 실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참고
*개연성(probability): [논리]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
*가능성(possibility): 있을 수 있는 것. 일어날 수 있는 일.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

신현우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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