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지난번에는 만주에서 목회하고, 가르치고, 주석 쓰는 시절의 이야기까지 하였다. 이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을 맞아, 정암은 1945년 8월 27일에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 철산리로 돌아왔다." 이곳에 있던 6개월 동안도 정암은 장평교회를 목회했다고 한다. 6개월 후인 1946년 2월에 당시 장경재 전도사(1918~2000)에게 장평교회를 부탁하고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여, 3월 1일에 서울에 와서 이태원의 한 적산 가옥을 빌려 수개월 머물다가 출옥 성도인 한상동 목사(1901~1976)께서 4월에 방문하여 제시한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신학교를 세우자는 뜻에 동의하게 된다.

진해 신학 강좌

그리하여 정암은 5월에 경남 부산에 갔다가 진해로 옮겨 예전에 일본 해군 수련원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강주선 목사가 빌려 사용하던 진해교회 예배당에서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께서 주동이 되어 운영해 나가던 소위 진해 신학 강좌를 3개월 동안 열게 되었다. 정암은 진해 경화동에 있는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봉사하면서 그리했다. 이때 이 신학 강의에 63명이 등록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고려신학교 설립

그 해 9월 17일에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당시 부산진 일신여학교(지금의 금성중학교) 교실을 빌려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본래는 박형룡 교수님을 교장으로 모시고 와서 개교하려 하였으나 이를 위해 봉천신학원 학생이었던 남영환(南永煥) 전도사가 모시러 가는 것이 38선에서 군인에게 발각되어 돌아오게 되자 우선 정암을 학장 서리로 하여 신학교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도 정암이 썼다고 한다. 그런 뜻에서 "어떤 점에서 그가 고려신학교의 진정한 설립자였고, 그의 신학입교의 의지가 고려신학교를 지탱해 가는 힘이었다"는 이상규 교수의 말은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1960년 10월까지 정암은 부산 고려신학교 교수, 교장 서리와 2대 교장을 역임한다.

고려신학교와 박형룡 박사

1947년 10월에 송상석(宋相錫) 목사가 박형룡 박사를 만주로부터 모셔와 부산에 도착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직에 부임하였고(10월 14일 노진현 목사가 시무하던 부산중앙교회당), 이때 조선신학교에서 성명서를 냈던 51인 학생들 가운데서 34명이 고려신학교에 합류하여 학생 수가 120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국 교회와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박형룡 박사는 반년 후인 1948년 4월에 자진 사임하고, 5월 17일에 상경하여 6월에 남산 조선신궁 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1948년 6월 3일에 109명의 편입생으로 개교하였다"고 한다. 후에 1951년에 다시 세워진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53년 9월 2일 취임하면서 박형룡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 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에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고난스러운 고려신학교 시절

한편 한상동 목사가 1946년 7월에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하게 되자 1947년 3월 5일에는 초량교회 부속 건물로, 또 다른 교회 건물로, 그리고 4월 15일에 다시 광복동의 적산 가옥을 확보하여 옮겨 간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초기에 홀로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치며 (박형룡 박사가 떠난) 1948년 5월부터는 2대 교장으로도 섬긴 정암과 1946년 10월 28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군정 군목이었던 정통장로교회의 목사인 John Betzold의 소개로 한상동 목사를 만나고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을 부탁받고 허락한 선교사 한부선, 그리고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 그의 동생 한명동 목사 등의 노력으로 점점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어려운 형편의 단면을 한부선 선교사가 선교부 총무에게 보낸 다음 같은 편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박윤선과 그의 일곱 식구는 방 두 개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이 아내는 이웃으로 물을 길러 가야만 하였고 이 때문에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비가 오면 그 집은 새서 부엌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습니다. 박윤선은 매일 신학책에 코를 박고 살림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걱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한 목사가 그에게 자기 집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 내외는 방 하나에 살면서 먹고 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과 사모님의 소천

그러다 정암은 "여행 경비를 제외한 모든 재정 지원을 얻어" 1953년 11월 2일에 화란 자유대학교에 가서 1954년 3월까지 신약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 정암이 사모님께 보낸 편지가 <파숫군> 1954년 3월호에 게재되어 있어 당시 정황의 일부를 알 수 있다. 그 투와 내용에 대해서 박혜련은 사모님과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정암의 의도를 오해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편지를 너무 기다리지 마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편지를 종종하시오"와 같은 말들이 그런 오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아침마다 두어 시간씩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는 말도 잘 보면 어떠했을까 생각된다.

또한 "나를 위해서는 기도만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마시오. 주님이 허락하시면 돌아갑니다.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안 돌아갑니다. 성령 충만히 받지 못하면 교회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합니다"는 말도 성령이 화란에만 있다는 표현이 아니고, 공부하는 과정도 성령과 교제하는 것이라는 정암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시는 것이 가족을 만나 보는 것보다 좋습니다. 당신도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지 마시오. 하나님만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고 길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할 것은 성령 충만히 받아 돌아가는 것이오" 같은 말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1954년 3월 18일에 일어난 사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보로 전달받고, 떠나 왔으나 결국, 3월 20일 오전 11시에 "고려신학교 이사회 중심으로 신학교장으로" 진행한 장례식 후인 4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한다(정암 48세 때). 귀국하여 먼저 미 해병사령부에 편지하여 아내를 치어 죽게 한 트럭 운전병을 선처해 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곧 바로 4월 2일부터 고려신학교 경건회 인도와 강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짧은 화란 유학 기간에 대해서 정암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화란 유학 기간은 길지 못했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때의 연구 결과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화란 유학이 아니었다면 신, 구약 주석 저술에 있어서 진리를 깨닫는 데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사실 간하배 교수는 정암이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소개하고 인용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했다.

페이스신학교와의 관계

또한 1954년 ICCC 제2차 세계 대회에 참여했다가, 9월 페이스신학교가 개강 예배를 할 때 칼 메킨타이어의 주선으로 한상동 목사와 함께 명예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그리고 10월에 부산 삼일교회에서 이화주 전도사와 재혼하여 (초혼의 3남 2녀에 이어) 2남 1녀를 두게 된다.

부산에 있는 동안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계속해서 성경 주석을 써서 요한계시록(1949), 공관복음(1953), 로마서(1954), 바울서신(1955), 히브리서, 공동서신(1956), 시편(1957), 요한복음 (1958) 주석을 출간한다.

고신 사임

1960년 7월 하순 어느 주일에 발생한 그 유명한 서아도(Arthur Boyce Spooner) 선교사 환송 예배 건으로 주일 성수 문제로 논쟁을 하고 9월 24일에 결국 고신을 그만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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