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 주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이다.

I. 정암의 생애

▲ 숭실전문대 재학 시절의 박윤선 목사. ⓒ이승구

1905년 12월 11일(음력)에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 해변가에 있는 351번지에서 출생한 정암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평북 철산 해변의 작은 마을" 안에서 살던 그의 가정은 "부모님(부친 박근수(朴根秀) 모친 김진신(金眞信))과 형님 박윤석, 그리고 위로 누님이 두 사람, 아래로 여동생 한 사람으로 구성된 농부의 가정이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여 이웃을 돕고 가족을 잘 보살피는 아버지는 선량한 분이셨으나 기독교를 믿지는 않으셨고, 정암 자신도 불신이었다.

정암은 "9살 때 (마을 부호의 사랑방에 있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근면히 공부하여 사서삼경은 (주해까지) 거의 다 암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9세 되던 해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정암의 고향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선천군 국산면 장공동에 있던 (1885년에 "김도순이라는 부자가 사립으로 설립한 일종의 기독교 학교"인) 대동소학교 6학년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공부하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아침마다 예배"를 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들의 설교를 듣기는 들어도 사실상 믿음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셨다. 이는 대동학교에 가기 전 수년 동안 15리(6km)를 걸어서 "자발적으로" 출석한 동문동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정암의 교회 출석은 그의 10대 중반에서 말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김영재 교수는 정암이 17세 때에 동문동교회에 출석하였다고 하고 있다. 1921년이 그 시작이라고 제시한 자료도 있다. 또한 이 학교 다니던 중 18세에 당시 15세 되던 김예련과의 혼인을 하였다고 하였다(1922년 11월).

1923년 3월 최우등으로 대동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4월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에 세운) 정주 오산학교 2학년에 입학하였고, 그 학기 말에 이구하 교장 배척 데모가 일어나 방학식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다가, 1924년 봄에 보결 입학 시험을 치루고 선천의 신성(信聖)중학교 3학년에 들어갔다고 한다. "신성중학교는 평북 선천에 설립된 기독교 학교로서 1906년 4월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위트모어(Norman C. Whitemore) 선교사의 조사(助士)였다가 1907년에 처음으로 목사가 된 7명 중 하나였던] 양전백(1870~1933), 안준, 김병농, 김석창 등이 설립한 중고등 과정의 남학교였다."

신성학교에서도 우유 배달, 김매기, 변소 청소, 소 먹이기, 그리고 선천 YMCA에서 경영하는 '무산 아동 교육' 교사 일을 하면서, 점심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에서 날마다 예배할 때 "예수를 잘 믿어 보려고 힘썼다"고 한다. 특히 "설교를 듣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때 정암은 주일마다 선천북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신성중학교 설립자의 한 분이었던 양전백 목사였다. 또한 방학이 되면 학우들과 함께 전도대를 조직하여 여러 지방으로 가서 전도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이즈음 첫째 자녀인 박경조가 태어나 자라다가 심히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정암은 이때의 자신을 평하면서 "공부에는 열중했으나 가사를 돌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언제나 마음에 떠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 후에 정암은 아내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밤에 선천으로 데려와 기초적인 가르침을 주어 선천읍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재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박윤선은 늦게야 공부를 시작했으나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참으로 즐겼으므로 아내와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부와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내를 공부하게 한 일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그의 인품을 엿보게 하는 그런 대목이다."

정암의 딸도 이에 대해서는 "이 일은 짧은 어머니의 생애를 위로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쓰고 있다.

그 뒤 정암은 1927년(23세) 4월에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31년 3월에 졸업하고, 그 부인도 보성여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이 숭실전문 시절인 1931년, 정암의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숭실전문학교에 다닐 때에 이유택, 송영길, 김철훈(이상 후에 목사가 되었으나 공산당 박해로 순교했다 함), 박기환, 방지일, 김진홍 등과 함께 모란봉 뒤 숲속에서 소위 "조기(早起) 부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새벽 기도 운동을 하였고, 이때도 학생회 종교부장을 하던 정암은 방학 때마다 전도대원으로 만주나 고향인 철산 지방에도 가서(1929년 7월 1일부터 19일) 전도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1931년에 정암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고"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는 "성경 해석에 취미를 가지고 방학 때는 주석을 몇 권 빌려 가지고 시골에 가서 성경을 연구하곤 했다"고 하며 "신약 원어와 구약 원어에 주력했고 독일어는 자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신학교 교장이던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의 나부열(羅富悅, Stacy L. Roberts, 1881~1946)에게 배운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많이 가르치면서도 언제나 부드러운 말로 가르쳤기에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끼쳤다고 하며, "그는 자기가 말한 대로 언제나 실천에 옮기는 진실한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마포삼렬(Samuel A. Maffett, 1964-1939),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요 할리팍스장로교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Halifax) 출신의 업아력(業雅力, Alexander Francis Robb, 1872-1935),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李訥瑞, William D. Reynolds, 1867-1951) 등의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믿음과 덕의 감화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인 교수들인 신약학의 남궁혁 박사에 대해서는 "무게 있는 인격자"라고 하셨고, 구약학의 이성휘 박사는 "겸손한 목회자로 서문 밖 교회를 주로 도우셨다"고 하시고, 박형룡 박사에 대해서는 "인격적 감화가 큰 동시에 신학자로서 인상 깊은 교수"라고 하시면서, 박형룡 박사는 "학구적으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유익을 많이 주었다"고 하시면서 "교수직에도 능하셨지만 진리를 수호하는 데 많은 공적을 남기셨다"고 했다. 또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독일인이었지만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왕길지(王吉志, George O. Engel, 1868~1939) 교수의 가르침과 함께 공부하던 10여 명의 학생들을 언급한다.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방지일, 김진홍 제씨와 함께 <겨자씨>라는 잡지를 내었고, 숭실중학교 학생 방문을 위한 사감도 하고, 주일에는 모란봉 뒤에 가현리에 있는 가현교회에서 시무하였다고 한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정암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열심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열렬했던 것 같다. 나의 생활 형편은 역시 어려웠지만, 그때도 기도 생활에 열중했기 때문에 생활 문제를 염려하지 않고 기쁨으로 지낼 수 있었다." 평양신학교 2학년 때 맏아들 춘호 씨가 태어나고(1932년), 2년 후에 맏딸 춘자 씨가 태어났다고(1934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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