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명준 교수의 편집으로 나올 <한국의 칼빈주의자들>(킹덤북스, 근간)에 실릴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내용으로 여기서는 본문만을 소개합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 전체는 나중에 나올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간단히 생각해 보고(I), 그의 사상을 소개한(II) 후에 그의 실천적 가르침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III). 이것은 정암에 대한 오해가 많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의 한 부분입니다. -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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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이어서 정암의 생애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정암이 언제부터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느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10대 말에 출석하기 시작한 동문동교회에서는 빠짐없이 그저 출석했다고 하셨고, 신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날마다 예배할 때 "예수를 잘 믿어 보려고 힘썼다"고 했고, 특히 "설교를 듣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셨으니, 이때 확실히 구원을 생각하며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때 정암은 주일마다 선천북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신성중학교 설립자의 한 분이었던 양전백 목사였습니다. 정암은 자신에 대해서 잘 표현하지 않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감동, 감화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암은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 2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가족은 고향 철산 장평리 초가삼간을 얻어 머물게 하고", "성경 원어를 연구하려고 세계적 권위자인 메이첸 박사를 찾아가"기 위해 1934년 8월 4일에 한국을 떠나 "일본 고베(神戶)에서 지지부마루라는 배를 타고" 27일간 여행하는 중 요한계시록을 외우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9월 학기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특별 학생으로 1935년 봄 학기까지 공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웨스트민스터는 200달러의 장학금 지급하고, 수업료도 받지 않고 기숙사 방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특별 학생으로 공부하던 1934년 가을에는 기초 히브리어, 고급 히브리어, 헬라어, 복음서의 역사를 공부하였고, 25년 봄에는 히브리어 강독, 본문 비평, 요한 문서, 예수의 탄생, 로마서 4-11장, 칼빈의 신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 해인 1935년 가을부터 1936년 봄 학기까지 신약 전공의 대학원(Th.M.) 학생으로 등록하여, 창세기 1-12장, 아람어, 공동서신, 바울과 그의 환경, 요한계시록, 성경적 종말론, 히브리어 연구, 1936년 봄에는 아람어, 누가복음, 히브리서, 위기 신학, 그리고 초급 아랍어를 공부하고, 메이첸 박사의 지도를 받아 공부를 마쳤다. 이때 메이첸 휘하에서 그와 같이 공부한 사람이 한국 선교사 한위렴(William B. Hunt) 선교사의 아들로 평북 정주 출신의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라고 불리는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이다. 한부선은 휘튼대학교와 럿거스대학교를 마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924년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고, 그해인 1928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청주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안식년을 얻어 1935년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신학 연구를 하였기 때문이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발견하였고,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암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웨스트민스터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제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교육받았던 평양신학교는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기는 하였지만,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하였다"고 한 바 있다. 이에 근거해서 정암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허순길은 "그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와 그 심오함을 깨닫게 된 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했을 때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암 자신도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칼빈주의 신학 지식을 재정비하게 된 것이 성경 주석 사업에 실제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1936년(31살) 8월에 귀국하여 표준 주석 작업을 하는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 편집실 근무와 평양신학교 원어 강사, 고등성경학교 시간 강사 등 여러 일을 하다가, 아마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의 신학교가 1938년에 한 학기 마치고 자진 폐교하여 일자리가 없어졌고, 더 중요한 이유로는 아마도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원어와 신학을 더 알기 위해" 1938년 가을에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1940년까지 개인적인 연구를 하였는데 이때 특히 원어와 반틸의 변증학에 관심을 가지고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정암이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인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可)하다는 안타까운 결정이 내려졌다. 정암의 두 번째 미국 유학 시기는, 김영재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두 번째 웨스트민스터 시기에 정암은, 1938년 가을 학기에는 시리아어, 연구 과목으로 히브리어, 아랍어, 성경 아람어를 하였고, 데살로니가전후서 논문을 썼다고 하고, 1939년 봄 학기에는 연구로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골로새서를 하고, 논문으로 변증학(위기 신학)을 8시간 한 것으로 나온다, 1939~40년의 가을 학기에는 고급 시리아어, 교회사, 교리적 설교를 듣고, 변증학 논문으로 4시간 인정받은 것으로 나온다. 1939년 4월에 나온 미국 교계지에 실린 그의 글을 보면 그가 반틸과 그의 변증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난다.  

그[C. Van Til]는 기독교 유신론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변증함으로 (칸트와 플라톤의 체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체계가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반틸 박사야말로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터뜨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우리가 어떻게 모든 비기독교적 공격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의 체계는 단순한 인간의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제시된 방어의 체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편이다. 주께서 한국에서 그의 진리를 방어하는 데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이와 같이 성경 주석을 잘할 수 있도록 어학과 반틸의 변증학을 잘 공부하고서 다시 귀국할 때인 1939년 10월에 정암은 동경에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수개월간 사설 언어 강습소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가,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있었기에 만주에 있는 한국 교포들이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던 뜻을 따라 만주에 가서 1940년 3월에 만주 한인예수교장로회 신경(新京)노회에서 목사로 임직하여 만주 오가황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리고 베자상교회도 시무했다고 한다. 조금 후에 봉천 북능(北凌) 지방에 세워진 만주신학원(현 동북신학원)에서 신약학 교수로 사역하였다. 후에 박형룡 박사님도 신사참배 문제로 동경에 망명 중 초빙받고 일본 해로로 이 신학교에 와서 가르치셨다. 당시 이 학교는 박형룡 박사와 정암이 신사참배하지 않도록 하면서 교장인 정상인(鄭尙仁) 목사를 비롯해 다른 모든 이들과 학생들이 다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암도 한번 신사참배하였다고 1950년 어떤 목회자 수련회에서와 합신 5회 졸업생 최미희와의 인터뷰에서 정암 자신이 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번민"하였다고 한다. 정암은 "신사참배와 일본기에 대한 경례 문제로 고민하다가 드디어 사임하고", 봉천에서 80km 떨어진 공업도시 안산(鞍山)으로 가서 해방 직전 2년 동안은 계시록 주석 쓰는 일에만 집중하셨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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