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가면을 쓴 사람들이 가슴에 '빚'이라고 쓰인 종이를 붙이고 서 있다. 이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채무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전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17세기 잉글랜드, 한 남자가 국회의사당을 폭발시키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의 이름은 가이 포스크. 그는 모진 고문을 받다가 결국 처형당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저항의 아이콘으로 기억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얼굴을 본 따 만든 가면이 여러 시위대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 가이 포스크의 얼굴을 한 40여 명의 사람들이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모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아리송한 표정의 가면을 쓴 이들은 가슴에 '빚'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폭탄 형상의 검은 구체를 들고 있었는데, 겉에는 '빚'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빚 폭탄'이었다. 몇몇은 피켓을 들었다. 가끔씩 칼바람이 불어와 피켓을 흔들어댔지만, 그럴 때마다 이들은 문구가 행인들에게 잘 보이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문구는 곧 이들의 구호가 되었다. "돈 때문에 죽지 마세요! 한국교회여 어디로 갑니까"

이 시위는 빚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알리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희년함께·교회개혁실천연대·청어람M·<복음과상황>·<뉴스앤조이> 등은 사회적 기업 희망살림과 함께 '쿼바디스 – 부채 탕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보고 찾아온 기독교인들이었다.

'쿼바디스 – 부채 탕감 프로젝트'는 영화 '쿼바디스' 김재환 감독의 지원을 계기로 지난 12월 초부터 시작되었다. 부채 탕감 운동이 가진 의미에 공감한 김 감독은 영화 수익금 3000만 원을 이 운동에 기부하기로 했다.

빚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을 돕기 위해 기획한 이번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하나는 10년 가까이 장기 연체된 부실채권을 매입해 소각함으로써 채무자의 빚을 탕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대상으로 금융복지상담사 교육 과정을 개설해 상담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지역 내 채무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관련 기사 : 영화 '쿼바디스' 수익금 어디에 쓰나 봤더니)
 

▲ 희망살림 제윤경 상임이사는 가계 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며, 시민사회와 종교 단체가 부채 탕감 운동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대형 교회의 거대 십자가 반만 떼서 부채 탕감 운동에 쓰인다면"

'쿼바디스 – 부채 탕감 프로젝트'는 이날 채권 소각 퍼포먼스를 가졌다. 희망살림 제윤경 상임이사는 이번 채권 소각에서 1억 9000여만 원의 부실채권을 처분했다고 말했다. 채무자 40여 명이 10년 가까이 갚지 못한 빚이었다. 채권은 국내 한 대부업체가 기부했다. 본래 10억이 넘는 규모의 채권을 탕감하려 했지만, 대부업체가 액수를 줄이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채권을 소각하는 계획도, 가면을 쓴 참가자들이 채무자를 괴롭힌 가압류 통지서, 빚 독촉 통지서 등을 찢는 방식으로 바꿨다. 가슴에 붙인 '빚' 글자도 함께 찢었다.

제윤경 상임이사는 퍼포먼스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가계 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열 가구 당 일곱 가구가 채무자다. 114만 명이 갚을 형편이 못 되고, 350만 명이 10년 이상 된 장기 연체자다. 하지만 금융회사는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주기만 하고, 수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헐값에 대부업체로 팔아넘긴다.

부채 탕감 운동은 이러한 금융회사의 채권 장사를 고발하고, 장기 채무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선물한다. 그동안 시민사회와 종교 단체가 모금으로 이 운동에 동참해 왔다."
 

▲ 퍼포먼스 참가자들이 채무자를 괴롭혀 온 가압류 통지서와 빚 독촉 통지서 등을 찢고 있다. 이날 장기 채무자 40여 명이 1억 9000여만 원에 달하는 빚으로부터 면제받았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채권 소각 퍼포먼스 이후 이들은 인근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감독과의 대화'와 영화 '쿼바디스' 상영회를 가졌다. 희년함께 '토지+자유 연구소' 남기업 소장의 사회로 진행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는 김재환 감독과 제윤경 상임이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이들은 부채 탕감 운동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복음과상황>의 글을 읽고 부채 탕감 운동을 알게 됐다는 김재환 감독은, 이 운동이 교회에 새로운 역할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교회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려야 한다. 영화 '쿼바디스'가 교회 문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면, 부채 탕감 운동은 새로운 선순환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윤경 상임이사도 같은 뜻을 내비쳤다. 제 이사는 최근 사랑의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을 지나면서, 교회 꼭대기에 매달린 대형 십자가가 오랫동안 눈에 맴돌았다고 했다. 십자가의 의미가 예수님의 사랑인지 기업의 로고인지 분간이 안 됐다고 했다. 차라리 저 십자가의 반을 떼서 부채 탕감 운동에 기부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빚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관련 기사 : 빚 탕감 운동', 새해에는 쪼그라드나)

▲ 김재환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가 교회에게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면, 부채 탕감 운동은 교회가 갈 길을 제시한다. 

부채 탕감 운동은 교회를 향한 질문의 답

오후 내내 플래시몹과 채권 소각 퍼포먼스에 참가하고 영화 '쿼바디스'를 관람한 참가자들도 부채 탕감 운동과 교회의 역할을 동일 선상으로 봤다. 빚 탕감에서 채무자 지원까지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행사에 참석하러 지방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온 노영숙 목사는, 채무자를 위한 지원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전에 사업을 하다 실패해 파산 면책을 받았다던 노 목사는 실패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실패 이후 재기하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교회가 부채 탕감 운동을 통해 실패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한 대학교 선교 단체에서 단체로 온 학생들도 있었다. <복음과상황>을 읽다가 부채 탕감 운동을 알게 된 이들은, 희년함께가 낸 행사 소식을 보고 참석했다고 했다. 박현미 씨는 "금융 제도에 문제가 있고 가계 부채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도 막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막막했다. 그러던 중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부채 탕감 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 도전이 된다"고 했다.

▲ 참가자들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부채 탕감 운동에 교회가 나서야 한다는 패널들의 말에 공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날 김재환 감독은 영화 쿼바디스를 통해 교회와 각 개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희년함께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은 부채 탕감 운동이 교회가 갈 길을 제시한다고 했다.

이들의 바람은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과도한 빚, 억 단위의 전별금 문제로 따가운 시선을 받는 교회가, 이제는 장기 채무자들의 빚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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