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백 일이 지났습니다. 정부의 무책임과 국회의 무능함이 유족들을 단식으로 내몰았고 힘든 몸으로 백 리 길을 걷게 했습니다. 슬픔만으로도 버거울 그들을 이렇듯 거리로 내친 국가를, 정치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이날 정부는 고작 유병언 시신을 보도했고 대통령은 유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 채 돈 풀어 경기 회복시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사건 초기부터 공감과 소통에 무뎠고 그 눈물에 진정성 없었기에 기대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백 일 되는 이날 단식하는 유족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음을 보며 그의 자격 없음을 재차 실감합니다.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피격된 자국민의 시신을 자국 공항에서 영접하는 화란의 국왕, 위정자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 우리의 절망이 큽니다.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돈에 앞서 마음이며 진실인 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국민들을 너무 가볍게 보는 처사라 여겨집니다. 유족들이 백 리 길을 걸었고 십여 일을 단식했으며 수만 명이 추모제에 참석했음에도 이를 보도하지 않은 공영방송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또한 이 나라 공권력은 장대비 내리는 새벽 3시까지 유족들을 토끼몰이했고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오로지 청와대의 충견 노릇에만 몰두했습니다. 유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지친 몸에 대한 일고의 배려도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엄마의 이름으로 어버이 연합이란 이름하에 유족들 가슴에 대못 박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국회 특위 위원장의 입에서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교통사고, 재수 없이 걸린 AI 조류 독감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목적하는 떼쓰기처럼 이들의 몸짓을 비웃는 소위 지식인들도 생겨났습니다. 한 시인은 사적으로 여행 가다 생긴 일인 것을 갖고 유족들이 웬 난리인가를 오히려 반문합니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 100일에 맞춰 유병언의 주검과 유전자 확인 기사가 언론 매체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국과수 원장이 의사 가운까지 입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체가 유병언인 것을 증언했으나 백성들은 믿고자 하지 않습니다. 과거 경험에서 이들은 유언비어가 오히려 사실이며 진리였던 것을 학습했던 탓입니다. 국과수 원장의 설명 후 질문에 나선 한 법의학자의 말이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느 공영방송도 끝까지 보여 주지 않았으나 요지는 의학적 소견에 앞서 발견 현장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역시 의학적 진실과 현장적 정황 간의 중첩될 수 없는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라 추정해 봅니다. 현명한 시민들에 의해 제기된 물음에 답하려면 아직도 넘어야 될 산이 많습니다. 여하튼 유병언 죽음으로 세월호 참사가 무마될 것이란 오판을 정부가 거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백 일 집회 후 공권력으로부터 모멸 찬 거부를 경험한 유가족들은 이제 일천 일을 가늠하며 단식 농성을 이어 가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금번 세월호 참사가 특별한 것은 누구나가 알 듯 대한민국의 부실함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사건인 탓입니다. 정치, 행정, 기업 심지어 종교까지 연루된 대재난으로서 '이것이 국가인가'를 묻게 했던 사건인 까닭입니다. 소위 골든타임으로 알려진 절대 절명의 순간에 '가만있으라' 하면서 정작 저들은 자신들의 부정을 덮을 방도를 청해진 본사와 의논했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정작 해경조차도 자신들과 이해관계된 언딘이란 업체를 기다리느라 생존자를 방치했고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복지부동한 이 나라 공복들의 무책임, 비인간성에 이 나라 민초들은 절망했고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 땅의 방송, 언론들조차 거짓 과장된 보도로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에 일조했고 부모들의 기대를 졸지에 허물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가 특별히 특별난 것은 아이들의 죽음의 과정을 그 부모들이 지켜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살 수 있는 아이들을 앞선 이유들로 한 명도 살리지 못했다는 기막힌 사실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건을 두고 조류 독감, 단순 교통사고 운운하고 사적 여행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폄하하는 것은 가수 김장훈의 말대로 사람의 탈을 쓰고 결단코 내뱉어서는 아니 될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족들은 오로지 자식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구체적으로 이런 정황을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족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단식과 농성을 위해 그들은 생계를 접어야 했고 집을 박차고 나와야 했습니다. 집에 남아 있는 다른 자녀들을 돌볼 여력도, 손길도 포기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유족들은 수백 번 회의와 토론 끝에 진실과 돈 중에서 진실을 택하고자 결의를 했다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지만 자식들의 죽음을 헛되이 않는 길은 그리고 이후 누구의 자식도 그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유족들은 용기 있게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분들의 이런 결의와 믿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그들 희망에 마음을 보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세상의 중심은 약자에 있다고 가르치신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그래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에 담긴 유족들의 선한 뜻을 이 나라 위정자들이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대다수 언론도 정권의 애완견 되어 정치가들의 판단이 옳은 듯이 여론을 호도합니다. 그렇기에 백 일 추모제에서 유가족 대표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거짓된 정보로부터 '깨어나 줄 것'을 강력히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세월호 참사 백 일 시점까지 특별법 입안을 위해 일천만 명 서명을 호소하였으나 우리 기독교계, 교회들의 참여가 너무도 저조한 상태입니다. 정토회를 중심한 불교 측의 서명 수에 견줄 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월호 사건으로 기독교가 마침내 그 민낯을 드러냈다는 여론이 대세입니다.

물론 우리들 중에도 조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는 특별법이 법 체제를 흔드는 일이라 걱정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한 논리적 싸움이 치열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너무도 특별한 것이기에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유족들의 논리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정상적 사법 절차 속에서 진실이 밝혀진 경우가 너무 적은 것도 이유가 됩니다. 언제나 경험하듯 몸통은 없고 깃털만 밝혀지는 사례가 너무 많았던 것이지요. 금번 세월호 참사에 연루된 부패의 규모와 범위가 너무도 크고 넓어서 그리될 개연성이 농후합니다.

민변 측에서 제시한 안에는 세간에 알려지듯 위법하지 않으면서도 실효성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언론에 접하고 방송에 귀기울이냐에 따라 우리들 판단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편향 되었다면 좌편의 언론에 더 많이 접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우 앞서 보았듯이 세상의 중심은 약자에 있다는 진리에 충실해야 마땅합니다. 어떤 이론이고 논리라도 일리(一理)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합리성, 필연성 그리고 적합성이 저마다 각각의 이론 속에 다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피해 여리고 고개를 성급히 넘는 대제사장도 틀리거나 잘못된 존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성전 제사를 지내야 할 급한 책무가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이를 피해 도망치듯 달려가는 레위인 역시도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평생 율법을 가르치던 그로서 피는 부정한 것이었기에 그를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사마리아인 역시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가도 되었습니다. 남북 왕조 분열 이후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평생 원수 지간이었던 탓입니다. 이렇듯 합리적, 필연적, 논리적 이유를 지녔음에도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논리 곧 장벽을 넘어 강도 만난 자에게로 달려가 치료했고 이후의 삶도 염려해 주었습니다. 성서의 예수는 이 이야기를 영생의 주제와 관련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좌우의 시각을 지닐 수 있습니다. 보수, 진보의 차이가 있다는 것 역시도 당연지사입니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분리시켜 살고자 하는 것도 틀린 것이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성향에 따라 그런 선택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틀에 안주하는 것은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삶일 뿐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삶은 영생과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지금 세월호 참사는 국가에 의해 총체적으로 강도 만난 자의 상태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기존하는 모든 차이와 관점을 뒤로하고 이곳, 팽목항, 안산으로 발길을 향하고 마음을 모으는 일이 영생을 관심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무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쌍한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듯이 그분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틀, 테두리, 이념, 성향, 교리 등을 깨고 현장에로 발걸음을 옮기라고 명하십니다.

따라서 한 신학자는 성육신의 신비는 고통 받는 현장에서 재현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신비가 재현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최선을 최악으로 만드는 형편없는 종교가 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지요.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오로지 사실만을 알고자 하는 유족들의 마음 밭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대형 교회일수록 서명하는 숫자도 적을뿐더러 서명하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고 하니 그래도 그것이 교회일 수 있는지 염려됩니다. 미가서에는 예언도, 신비도 잃어버릴 성직자의 운명을 예고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한국 기독교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미가서 3장의 말씀과 정직하게 맞닥트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언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한다. 에언자들아 너희의 날이 끝났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내 백성을 곁길로 이끌었으니 너희가 다시는 환상을 못볼 것이고 다시는 예언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한국교회 성도님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성직자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금 자식 잃은 세월호 유족들이 한없이 지쳐 있습니다. 단식과 더위 그리고 장맛비로 몸이 망가져 갑니다. 집에 남아 있는 어린 자녀들에 대한 염려도 뒤로한 채 오로지 진실만을 알고자 합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그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떼쓰는 몰염치한 존재로 어버이 연합회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백 일 추모제를 지내면서 정부와 관료들 그리고 공권력의 횡포를 여실히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족들은 지친 몸으로 이후로도 단식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자식 팔아 돈을 얻고자 한다는 악의 찬 홍보에 맞설 목적에서입니다. 목숨을 잃은 학생들 중에는 예술가, 가수를 비롯해 목사, 신부 지망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학생들이 아니었다고 내 자식이 아니었다고 이제는 그만 다시 잠잠할 것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경우, 정작 우리가 원할 때, 우리에게 큰 일이 닥칠 때 그 누구도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기독교 인구가 많으니 걱정 없다 자신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지 못할 경우 세상은 우리를 등질 것입니다. 교황의 목숨 건 개혁 의지를 배우지 못할망정 가톨릭과의 일치를 거부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어찌 우리의 미래가 있다 하겠습니까?

이제 말을 줄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성서는 피조물들이 너무 슬퍼 스스로 탄식조차 못할 시 그들을 대신하여 탄식하는 존재를 성령이라 합니다. 지금 유족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일생동안 한 번도 경험치 못한, 생각지도 못한 싸움을 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지금이라도 그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금도 일선에 서 있는 것은 성령께서 대신 탄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우리 교회에게 호소합니다. 수백 명의 자식을 잃은 시공간, 그것이 옛 라마였고 예루살렘이었으며 오늘의 안산일진대 그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마음을 합하는 것이 바로 성령 체험인 것을 숙지하십시다. 특별히 제가 속한 감리교회여, 더 이상 우리 시대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맙시다. 교단이 율사들의 손에 휘둘리는 사태를 더 이상 만들지 맙시다.

그간의 잘못을 회개하기 위해서라도 유족들의 절규에 적극 응답하십시다. 그들에게 조차 외면당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죽을 각오로 기도하며 행동합시다. 유족들 중에는 우리 감리교회 소속 목회자 부부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로 인해 유족들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정도를 걸어올 수 있었던 것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백오십만 감리교도들이 유족들의 눈물을 거두는 일에 앞장서길 바랍니다. 아니 일천만 기독교인들이 지친 유족들을 대신하여 단식하며 기도합시다.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세월호 참사 앞에서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를 외쳐 봅시다.

세월호 이전과 다른 나라, 다른 교회, 다른 우리가 되기 위해 무엇부터 달라지고 변해야 할 것인지를 하느님 앞에서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한없이 지친 지금 그래도 본뜻을 잃지 않고 진리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자 하는 이들 곁에 서는 것을 하느님의 명령이자 신앙의 일로 여기며 삽시다. 이를 하느님 주신 마지막 기회로 알고 최선을 다해 보십시다. "슬픈 자와 함께 슬프고 기쁜 자와 함께 슬퍼하라"는 성서 말씀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을 우리의 이웃이자 내 몸처럼 여길 수 있는 진리의 실험에 실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권력의 상징인 대통령이 못 했던 공감의 힘을 우리 신앙인들이 맘껏 펼쳐 봅시다. 그래서 권력의 별것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 봅시다. 이는 오로지 신앙, 곧 믿음의 힘을 믿는 까닭입니다.

이정배 교수 / 감신대 통합학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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