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의 대안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입니다. 세월호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난 오늘의 시대를 돌아보고 대안을 만들어 가기 위해, '공평과 정의'라는 성서적 원리에 비추어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민생의 근본인 토지제도를 개혁하고자 애썼던 한반도의 개혁 정치가들을 살펴보며 하나님나라의 통치 원리와 오늘의 시대를 돌아보려 합니다. 여말선초의 개혁 정치가 정도전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600년 한반도 역사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필자 주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여말선초 극도로 부패한 고려의 현실을 보고 백성이 중심이 되는 나라, 민본(民本)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실제 역사 속에서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에 민본(民本)사상이 착근되기 전에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던 비운의 혁명가였다.

예레미야 역시 멸망 직전의 남 유다를 향해 공평과 정의를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도리어 자신의 동족들에게 멸시와 박해를 받고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고 이집트 땅에서 쓸쓸히 죽어갔던 비운의 선지자이다.

하지만 정도전과 예레미야는 당대에는 오명을 쓰고 죽었지만 역사는 그들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였다. 그들의 삶과 관점은 후대에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개혁과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많은 영감과 통찰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명했던 그들의 삶과 관점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시대적 배경과 역할은 달랐지만 너무도 흡사한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관점을 살펴보고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던 삶의 궤적들을 따라가 본다.

1. 그들은 왜 그리도 혁명적이었을까? : 입장의 동일함

정도전과 예레미야는 당대의 대다수 지식인과 달리 왜 그리도 혁명적이었을까? 박정희 정권에서 조작한 간첩사건에 휘말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였던 신영복 선생은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생각이 그토록 혁명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 스스로가 그 시대의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 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 정도전

정도전의 출신 배경에는 노비 출신의 외할머니가 있다. 정도전의 출신이 천하다는 것은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 고려 왕조를 수호하려던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할 때 구실로 삼았던 명분이었다. 능력과 자질이 기준이 아닌 출신이 기준이 되었던 고려 사회 속에서 정도전은 쓰디쓴 소외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또한 성정이 꼿꼿하여 타협을 몰랐던 젊은 시절의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 접대를 거부하여 권문세족들의 미움을 사 귀양을 간다. 정도전은 유배와 유랑살이로 9년을 보내면서 고려 백성들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왜구에게 침입을 당하고 지주들에게 수탈을 당하는 이중고를 겪는 고려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또한 정도전 역시 왜구를 피해 피난을 가고 지주에게 수탈을 당하는 경험을 한다.

도적을 피하여 내 땅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다른 고을로

가시덩굴 스스로 앞을 가리니 부모 산소가 눈에 선해 잊기 어렵네 …

1380년 유배에서 풀려나 영주 본가에 머물던 정도전은 대규모 왜구의 침입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 지은 시 '도적을 피하다(避寇)'에는 당시 정도전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각산 밑 삼봉재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 향인으로 재상이 된 자가 미워하여 재옥을 철거하자, 공은 제생들을 데리고 부평부사 정의에게 가서 의지하여 부평부의 남촌에 살았는데, 전임 재상 왕모가 그 땅을 자기 별장으로 만들려고 또 재옥을 철거하여 공은 김포로 거처를 옮겼다. -<삼봉집>

유배에서 풀려나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갔지만 재상에게 미움을 당해 집이 두 번이나 철거를 당한다. 이른바 철거민 정도전이었다. 용산참사를 몸소 겪은 철거민들이 소시민에서 투사가 되는 경험을 정도전도 동일하게 하였다.

농사터로 돌아가 몸소 밭을 갈았다/한재수해 연래에 너무도 혹심하니/문 앞에 찾아드는 땅세 독촉 어찌하리 - <삼봉집>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정도전은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추위와 수해로 소출은 적은데 어김없이 소작료를 독촉당하는 백성들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였다. 유배와 유랑 속에서 정도전이 직접 경험했던 민초들의 삶이 정몽주와 다른 관점에서 고려를 바라보도록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유배를 떠나기 전만 해도 정도전의 정치 노선은 온건 개혁 성향의 사대부 주류와 다르지 않았다. 민본주의 역성혁명 사상이 정도전의 정치적 신념으로 굳어진 것은 유배와 유랑생활 10년 동안 각지의 평민들과 접하면서 민심이 이미 고려 조정을 떠났음을 깨달은 후였다. - <정도전을 위한 변명> 中

▲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

(2) 예레미야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렘 1:1).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예언자이다. 아나돗은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 중앙 권력에서 축출된 아비아달 계열의 제사장들의 귀양지와 같은 곳이다(왕상 2:26). 부와 명예와 권력과는 거리가 먼 변방의 제사장 가문이었기에 예루살렘 중앙 권력의 부패와 남 유다 백성들이 맹신한 다윗 언약과 성전 체제의 허구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정도전과 예레미야는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백성들과의 '입장의 동일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깊이 연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2.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관점 : '백성이 가장 귀하고 …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

예레미야가 멸망 직전의 유다를 향해 끊임없이 외쳤던 메시지는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 우상숭배를 일삼는 다윗 왕조와 성전 체제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정도전 역시 백성을 돌보지 않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 기생하는 고려의 기득권층과 고려 왕실은 더 이상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을 이루었다.

(1) 정도전 – 맹자의 역성혁명과 민본 사상 계승

정도전이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백성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꿀 수 있었던 힘은 백성들과 입장을 같이한 경험과 유교경전인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이었다.

임금이 무도하여 사직이 위태로워지면 임금을 바꿀 수 있다. -<맹자>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 -<맹자>

임금이 백성을 돌보고 국가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왕을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 사상과 백성을 위해 국가와 군주가 있다는 민본(民本) 사상으로 인해 중국의 일부 제왕들은 <맹자>를 금서(禁書), 소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정도전은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이은 상을 당한 이후 3년간의 여묘살이를 할 때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 정도만을 읽으며 숙독(熟讀)하였다. 이 시간 동안 정도전은 맹자의 역성혁명과 민본 사상에 대해 체득하였다. 그리고 1375년 천민들이 사는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귀양을 가서 고려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했을 때 역성혁명을 통해 백성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결심하였다.

옛날에 사해를 다스리며 천자가 관작을 설치하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인의 동작과 시설, 명령, 법제는 그 하나하나가 반드시 백성에 근본을 둔 것이다. …(중략)…임금이 관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며, 관리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도 하나같이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성은 존중되었다.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조선의 개창 이후 태조 3년(1394)에 저술한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본 사상을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천명하였다.

(2) 예레미야 – 다윗 언약과 성전 체제의 허구 폭로

남 유다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남 유다의 기득권층이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믿었던 것은 다윗 자손의 왕위를 영원히 보장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즉 다윗 언약과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해 지은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예루살렘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은 그 옛날 사사시대의 제의 중심지였던 실로 성소처럼 황폐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1~12)

정의롭게 판결하여 기득권층에게 착취당하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으면 다윗의 집에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붓겠다고 하신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 7:4~7)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해 지어진 성전이 있는 한 예루살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예레미야는 폭로한다. 다윗 왕조와 유다가 망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정의를 행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가 흐르는 일이 유다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정치권력이든, 종교 권력이든, 이 땅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뭇 생명들을 돌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권력이다. 하지만 그 권력이 하나님의 뜻인 공평과 정의를 이 땅에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위임하셨던 권력을 거두어 가신다고 예레미야는 멸망 직전의 남 유다를 향해 간절히 외쳤다. 왕도, 종교도 하나님이 아끼시는 이 땅의 민초들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 예레미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관점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3~5)

3. 정치가와 예언자 : 고단했던 그들의 삶

정도전은 권력을 쟁취하여 국가를 바꾸고자 했던 정치가였으며,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정치권력, 종교 권력자들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계도하는 재야의 예언자였다. 정치가와 예언자로서 각자의 역할은 달랐지만 이 땅에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는 그들의 삶이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지만, 당대의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고단했고 비극적인 말로를 맞았다.

과거에 비해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했다면 그 이유는 앞선 누군가의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 덕분일 것이다. 그 피땀 어린 노력에는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고단했던 수고와 희생도 포함될 것이다. 세대를 이어 가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통해 역사가 하나님나라의 근사치에 도달해 가기 위해서는 오늘도 역시 각자의 노력과 희생의 분량이 필요하다.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고단했던 삶을 반추해 보며 오늘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수고의 분량을 생각해 본다.

(1) 정치가 정도전 : 구정물 속에서 연꽃을 피우다

정도전은 원명 교체기에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권문세족들의 친원 정책을 반대하다 1375년부터 시작된 9년간의 유배와 유랑 생활을 마치고 1383년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을 통한 개국을 결심한 후 1392년 조선을 개창한다. 조선을 개창한 후에도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의 방향을 제시한 조선왕조의 헌법전 <경국대전>의 토대가 되는 <조선경국전>을 집필하고, 왕조의 안정을 위해 사병 혁파를 시도하는 등 한 시도 쉴 틈 없이 신생국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하지만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본의 나라를 안착시키기 전에 1398년 이방원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만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기 전에 지은 시, 자조(自嘲)는 정도전의 삶을 잘 압축하고 있다.

양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송현방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여염집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는 세상,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라에서 최고의 학식과 능력을 갖춘 재상이 중심이 되어 다스리는 신권 중심의 국가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500년 가까이 오명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정도전이 남겼던 조선의 건국이념과 개혁의 전반적인 방향은 정도전 사후에도 인정받고 계승되어 <경국대전> 등 조선왕조 법전 편찬의 기초가 되었다.

반면 혁명가 정도전의 삶 이면에는 권모술수로 정적을 제거했던 마키아벨리즘적 정치가가 있다.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현실 정치권력을 쟁취해야 했던 정도전은 고려의 개혁과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권모술수를 적극 활용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을 평가할 때에는 그의 역할이 정치가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려 말기 같은 혼탁한 정치 현실에서 깨끗하고 올바른 방법만으로는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는 이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갖 원초적 욕망이 잡다하게 뒤섞인 시궁창과 같은 곳에서 '정의'라는 연꽃을 피워 내야 하는 고도의 예술이기에 도덕적 잣대만을 기준으로 마키아벨리즘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동참하였던 본회퍼 목사의 행위를 도덕적 잣대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듯이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며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을 판단하는 보다 중요한 잣대는 정치를 사익의 도구로 사용하는지 공익의 도구로 사용하는지 일 것이다. 또한 그가 생각하는 공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역시도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2) 예언자 예레미야 : 봄의 선구자, 진달래

▲ <특강 예레미야>(김근주, IVP)는 예레미야의 삶과 관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공평과 정의가 무너져 버린 자신의 조국, 남 유다를 향해 멸망을 선포하며 온갖 비난과 박해를 받았던 선지자이다. 그리고 유다 멸망 이후에도 그에게는 편한 길인 바벨론 포로로 가지 않고 이스라엘 본토에 남아 동족의 고난에 동참하다 끝까지 반역하는 백성들로 인해 이집트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 비운의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인류의 죄를 지고 고난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구약의 표상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멸망의 징조를 감지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예레미야는 마치 탄광 속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미 들을 귀가 막힌 남 유다의 왕과 권력자들은 예레미야를 감옥과 구덩이에 가두는 등 박해를 하고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또한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어 예루살렘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에는 아나돗에 있는 친척의 땅을 사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심판 너머에 회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여 주기 위해 멸망 직전의 남 유다의 땅을 사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숙명이다. "봄철을 먼저 알고 찬바람 부는 산허리에 피어 다가올 봄을 몸소 보여 주는 진달래(특강 예레미야 208쪽)" 같은 삶이 예레미야의 삶이었다.

비록 현실 정치 속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남 유다의 멸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재야의 예언자였지만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봄의 선구자 진달래처럼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했던 예레미야를 통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다.

4. 오늘 우리의 몫

'평등 속의 어울림'이 극대화된 하나님나라는 역사 진보의 정점에 서 있다. 세대를 이어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앞선 세대들에 이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과 분량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정도전처럼 정치권의 한복판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예레미야처럼 불의한 시대와 구조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과 지식인, 목회자, 교사의 은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정도전과 예레미야가 가졌던 관점과 그들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종교 권력‧정치권력‧시장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와 교회와 기업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행태가 만연한 오늘날, 자신의 은사와 재능과 삶을 공적 가치를 위해 던진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정도전과 예레미야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지만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상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다. 정도전과 예레미야 시대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자신의 몫을 다했던 사람들이 있다. 정도전이 유배를 갔던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은 주로 천민들이 살았던 거주지였다. <삼봉집>에는 유배 시절 만난 백성들에 대해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고, 오래 사귈수록 더욱 공손하며, 지혜로우며, 이해관계를 떠나 이웃과 정을 나누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유배 시절 만난 백성들로 인해 정도전은 백성이라는 존재에 새롭게 눈을 뜨고 경전 속의 '민본사상'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백성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와 일상을 성실히, 묵묵히 살아갔던 소재동의 백성들이 없었다면 '민본'이 건국이념이 되는 조선도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시대에도 소재동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레미야 35장에서는 레갑의 자손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의 위기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달리 레갑의 자손들은 그들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마시길 거부한다. 아마도 아합의 집안을 멸한 예후의 혁명에 동참했던 요나답은 불완전했던 예후의 혁명(왕하 10:29)에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후손들에게 세속화된 이스라엘이 주는 향락에서 급진적으로 단절할 것을 명령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세속화된 이스라엘에서 향락을 누리며 살기보다는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처럼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평생 동안 장막에 살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레갑 자손들을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며 살았다. 레갑 자손의 이러한 결기와 순종은 예레미야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예언자로 살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이었다.

정도전과 예레미야의 사상과 관점은 난세 속에서도 인간의 선한 양심을 지켰던 무수한 민초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고지순하게 순종하고자 했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벼리어졌다. 즉, 그들의 혁명적이고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과 실천은 한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시대 무수한 민초들과의 관계의 산물이었다.

모든 사람이 왕이 되고, 재상이 되고, 예언자가 될 수는 없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고자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길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역사가 진보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소수의 탁월한 혁명가와 사상가가 아니라 선한 양심과 일상의 순종을 묵묵히 감당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없이는 정도전과 예레미야와 같은 혁명가와 사상가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양심과 일상의 순종을 감당하는 필부필부들이 당대의 혁명가와 사상가를 길러낸다는 평범한 진리는 인류 역사 곳곳에 묻어 있다.

이성영 / 희년함께 협동간사
 

① 정도전과 하나님나라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② 정도전과 예레미야1 : 국가멸망의 징조
③ 정도전과 예레미야2 : 왕조의 멸망을 대하는 두 사람
④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하나님나라의 공평과 정의
⑤ 두 진정성의 충돌 -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과 갈등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대와 우정
⑥ 민본사상의 구체화, 계민수전 & 공평과 정의의 구체화, 희년
⑦ 역사 속 하나님의 통치는 유효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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