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의 선물> / 이창우 지음 / 대장간 펴냄 / 172면 / 8000원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지 않은 다양한 일들을 경험한다. 아프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질병으로 혹은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기도 한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런 일을 경험한다. 그런데 나타나는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창우 목사의 <창조의 선물>(대장간, 2014)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짧지만 깊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이창우 목사는 현재 침례신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는 특히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 책도 키에르케고르가 선물, 즉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인생에 대해 적은 글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 책이다. 이 책은 총 4장(Chapter)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창조 중에 있다(1장). 고난은 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에 고난을 보고 실족하면 안 된다(2장). 사람의 욕망은 진공상태에 있기에 이웃의 것을 탐내기보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욕망으로 선용해야 한다(3장). 그럴 때 인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

1장에서 그는 인간의 창조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창조의 완성은 재창조 즉 중생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재창조를 창조의 완성이라고 말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먼저 첫 번째 창조를 불완전한 창조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창조였다. 그리고 재창조를 창조의 완성이라고 하면 재창조는 필연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타락 전 예정설이다. 교회사를 통해 별 소득 없는 논쟁으로 판별된 것을 재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말도(10쪽) 수긍하기 어렵다. 피조 세계 역시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뒤틀렸고(창 3:17~18) 지금도 허무한 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하며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롬 8:19~22).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피조 세계를 새롭게 해 줄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모두며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이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2장에서 그는 실족이 복음의 핵심이며 교회는 실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우리가 창조의 완성을 통해 안식을 누린다. 그런데 이 안식은 고난이 제거된 안식이 아니다. 도리어 고난 속에서의 안식이다. 고난 없는 삶이 없다. 주님은 우리를 초대할 때 멍에를 벗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도리어 멍에를 지고, 즉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실족하게 된다. 그저 구원만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이처럼 저자는 기복 신앙으로 변질된 복음을 비판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바르게 역설한다.

실족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주목하지 않고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마뜩하지 않다. 아마도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철저히 고수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가정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데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62쪽).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인간이시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한 채 생애와 가르침에만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와 모든 가르침은 너무 소중하다.

3장의 제목은 '존재론적 진공'인데 종교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에게 재창조가 필요한 까닭은 죄 때문에 뭔가 부족한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타락은 존재의 결핍이다. 이 존재의 결핍은 물질이든 명예든 그 어떤 것으로든 채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게 욕망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대개 비교에 의해 생긴다. 이웃의 것을 탐하는 것은 이웃이 가진 것을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욕망이다. 사실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자체는 진공상태에 있고 중립적이다. 이 욕망이 이웃을 것을 탐내는 것으로 발현된다면 곤란하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망으로 나타난다면 이 욕망은 선한 욕망이 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때 분명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 이 명령으로 아담은 자유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아담은 불안하게 되었고 이게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명령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내모는 것이 되고 만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형벌을 주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지 않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자유와 불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유익하지만 죄는 해명하고 분석하기보다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임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3장에서 소개하는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 역시 약간 생소하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 속에 있는 분노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우리들도 마음이 악하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까? 물론 분노의 마음을 풀고 예배드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믿음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히 11:4). 차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아벨을 죽인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인류 최초의 문화가 이와 같은 살인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그의 분석도 흥미롭다. 물론 르네 지라르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살인의 뿌리에 시기가 있고 시기는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현재 세상의 문화를 잘 분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말대로 10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그야말로 반문화적이며 세상을 거스르는 명령이다. 이처럼 어떤 점에서 교회는 현대의 문화를 거슬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다(롬 12:1~2).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비결은 예수님을 욕망하는 것 외에 길이 없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곧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그의 지적은 너무나 당연하다.

4장의 제목은 '선물'이다. 어떠한 삶이든지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고난은 수용되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그의 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공감을 불러 오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수용이라는 것은 거부와 반항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시편의 기도를 보면 고난 중에서 곧 바로 감사로 나가는 경우가 드물다. 거의 다 탄식하고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러던 중에 그의 고난을 수용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기도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도 조금 조심스럽다. 물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설득했다. 히스기야도 더 살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했으며 더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흥정을 했지 않은가!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 우리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하는 불행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에 대해 의심하며 묻는 것에서 자유롭게 된다. 많이 때론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이런 지식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물론 감사는 비교를 통한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세리와의 비교를 통한 감사였다. 다른 이들과 같지 않아서 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그런데 저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지식과 결부시키는 것은 약간 어색했다. 아마도 철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추론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을 지식 일반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는 지나치게 의심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아마도 지성과 의심이 근본인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은 세례 요한과 도마의 의심을 해소해 주셨다. 바울 역시 성도들이 가진 종말에 대한 의심 부활에 대한 의심을 소상히 풀어 준다. 의심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의심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더 관건이다.

사용 설명서가 없는 기계를 다루기가 어렵듯이 서문이 없는 책은 매우 읽기 어렵다.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전혀 엿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랬다. 서문이 빠진 것이 편집자의 실수였는지 모르겠으나 독자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치 구름 헤매는 기분이었다. 각 장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고난을 성경적 관점에서 성찰한 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책을 다 읽고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 서문 혹은 출판사 리뷰 형식으로 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어려운 이 책은 저자처럼 종교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을 위해서 쓴 책인 것 같다. 앞으로 깊이가 있지만 일반 성도들도 쉽고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글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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