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당한 확신> / 레슬리 뉴비긴 지음 / 박삼종 옮김 / SFC(학생신앙운동) 펴냄 / 168면 / 9000원

창조과학 전임 사역자인 이재만 선교사는 <노아 홍수 콘서트>(두란노, 2009)에서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라 신앙으로 소개했다. 진화론이 가진 '전제'를 잘 지적한 말이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합리'와 '객관'이라는 것도 사실 그 토대가 상당히 취약하다. 그러면 창조는 어떨까? 창조 역시 신앙이다.

우리는 창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렇다면 창조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창조 과학자들은 그럴 필요를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레슬리 뉴비긴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이런 시도 즉 신앙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명백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던 때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과학자들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 실재이지 않은가!

만일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다면 과학은 더 없이 좋은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뉴비긴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한다.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학과 기독교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서로 다르다. 궁극적 실재가 다르니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과학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과학에 괜히 아부할 필요가 없다.

<타당한 확신>(SFC, 2013)은 종교 즉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확신에 대한 타당성을 변증하는 책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35년간을 선교사로 사역한 사람답게, 여전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 책을 썼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영향은 지금도 아주 막강하다. 뉴비긴이 이 책의 3장에서 잘 정리했듯이 계몽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이 현대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원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가설에 불가하다. 교회는 이런 이원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기독교적 확신을 붙들어야 한다. 뉴비긴은 이 책을 통해 이런 과학적 이원론이 왜 생기게 되었으며 그 폐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계몽주의의 특징인 과학적 사고의 틀에 기독교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복음이 진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과학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처럼 '사회 통념 구조'의 틀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정책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오히려 '사회 통념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대안으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즉 교회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자긍심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모두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목차만 보더라도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다. 각 장 제목을 따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유럽은 계몽주의가 태동하기 전까지 믿음이 지식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였다(1장). 하지만 회의주의가 범람했고 교회는 확실성을 붙들기 위해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2장). 그러나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도리어 회의주의로 환원하게 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3장).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4장). 이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5장). 성경의 이야기를 충족할 수 있는 비평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6장). 과학적 확실성이 아니라 믿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교회는 복음을 변증할 때 과학적 틀에 의존하기보다 성경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7장).

결국 뉴비긴의 주된 비판은 계몽주의가 양산한 과학적 사고다. 계몽주의는 기독교가 넘어야 할 산이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국제제자훈련원, 2011)에서 계몽주의가 출현하고 난 다음 신앙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고 평가했다. 도대체 계몽주의가 무엇이기에 신앙을 공적인 영역에서 사역인 영역으로 밀어냈단 말인가? 계몽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계몽주의의 발현과 그 특징 그리고 문제점까지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계몽적 세상은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학문의 이름으로 과학적 확실성을 강제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이런 폭력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이미 무소불위의 권위를 확보한 탓이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도킨슨도 믿음은 비합리적인 것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신이 존재하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증거는 과학적인 증거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의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뉴비긴이 바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확실성으로는 궁극적 실재 즉 진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뉴비긴은 헝가리 과학자인 폴라니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이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모든 과학의 이면에는 '암묵적 지식'이라는 '믿음의 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터부시하던 그들이 사실 더 견고한 믿음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계몽주의가 내세우는 합리적 혹은 객관적 진리라는 것은 또 다른 신앙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허겁지겁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교회의 모습이 달갑지 않다. 물론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것을 도구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확실성이라는 무대가 우리의 주된 놀이터가 되면 곤란하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소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계몽주의에 의존했다는 그의 비판은 정직하다. 기독교 선교는 계몽주의의 폭발적인 부흥을 동력으로 삼았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도 계몽주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도 계몽주의는 우리들 가운데 꿈틀거리고 있다. 과학적 확실성에 편승하기 위해 성경을 과학적 확실성의 무대로 가져온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성경 비평의 방법도, 근본주의자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성경 무오성의 교리도 모두 과학적 확실성의 인정을 받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가? 과학이 성경을 향해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파괴된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권위를 누가 과학에게 주었단 말인가!

신앙은 과학적 확실성을 담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뉴비긴이 동방신학의 '부정신학'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던 동방신학은 계몽주의의 횡포로부터 비껴 나 있다. 과학적 확실성과 상관없이 교회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동방정교회 교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복음에 대한 자세와 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이유는 복음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복음이 흔들림 없는 과학적 확실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그분께 인격적으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즉 그분을 믿었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우리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는 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해도 혹은 의심이 들어도 하나님께 질문하며 자신의 인격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 주는 신비며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야 할 확신이다.

서문이 없어서 조금은 불편했다. 책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 채 읽어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도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독해 가면서 이런 불편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과학이 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즉 과학적 확실성에 주눅 들지 않고 믿음의 확실성을 붙들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그래서 지금도 과학적 확실성을 절대 진리로 믿고 있는 이 시대에 매우 절실한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은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교회와 성도를 얽매고 있는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살펴보게 한다. 물론 그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오늘 나와 여러분의 몫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