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원고는 몇 년 전 대광고등학교 사태와 관련하여 <뉴스앤조이>에 기고했던 내용(2004년 9월 16일자)을 근거로 하여 그 후 기윤실에서 주최한 기독교 교육의 자유와 사학법개정관련한 논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들어가는 말

최근 기독교 교계 내에서는 몇 년 전 대광고등학교 강우석 군과 류상태 씨(전직 교사) 사태부터 보수 대형 교단과 교회들의 목사들의 삭발 의식, 숭실중학교 허형범 교사의 양심선언까지 사학법 개정과 종교 교육의 자유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복잡성은 대부분의 우익보수정치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기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는 점과 사립학교재단의 상당수가 기독교관련재단들이라는 점이다. 보수기독교단체들(예, 한기총)과 기독교재단연합회(예, 한국기독교학교연맹)로부터 이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인한다는 소위 ‘좌파’ 정권과 “좌파” 전교조 탓이라고 그 책임을 돌리는 ‘색깔론’으로 번져간다는 데 있다.

곰곰이 생각해볼 때 이러한 소란과 갈등들이 모두 ‘좌파’ 정권의 탓일까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학법개정의 반대론자들에게서 ‘색깔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사학법개정론자들이 사유 재산과 자유 경쟁을 부인하고 공공성과 정부주도의 통제 일변도의 좌파 이념 중심적으로 ‘개혁’을 이끌어간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 계통의 사학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많은 사학들 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재정과 인사, 교육의 비리와 문제점의 심각성은 자정과 개선의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는데 대한 견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은 극소수의 사학 비리를 부풀려 건전한 대다수의 사학 재단을 범죄자로 삼는다거나 사유재산권의 극도의 제한이나 박탈이라든지 사학 이념 실현(기독교적 가치)의 중대한 장애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는 반론이 나오기도 했다.

1. 종교 교육의 자유과 종교 선택의 자유

최근에 강의석 군과 관련된 대광고등학교 문제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종교 교육의 자유와 종교 선택(신앙)의 자유의 권리에 대한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교육 기관의 자기 정체성과 교육법상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 미션스쿨이냐 기독교 학교냐?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 기관을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라고 불러왔고 그와 관련된 오랜 역사가 있다. 미션스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선교 혹은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불신자들’에게 행해지는 시혜나 봉사 혹은 훌륭한 선교(전도) 수단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개화기나 일제 강점기 혹은 한동안 사회봉사나 전도적 차원에서 비롯된 방법론들 즉 일반 학문이나 기술 등의 교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혹은 기독교적 교양이나 예배 혹은 성경공부(나 전도용 공부)등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 교육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불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전도방법론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교육기관들이 기독교 학교(christian school)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그 대상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신자들로 국한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기독교적 교양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학문까지도 전수되고 교육되어야 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미션스쿨의 전도방법론

한국기독교 내에서 선교(전도)를 목적으로 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소위 ‘선교’(혹은 전도)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검토되고 연구된 바는 있는가? 우선 그것을 물어보고 싶다.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참여하게 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 미션스쿨의 교육방법론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독교 학교라면 성숙하고 교양 있는 기독교인들의 양성하기 위한 방법론과 적확한 목표 의식은 있는가? 새벽기도도 나가고 교회에서 주일에 열심히 일하면서 전교 일등하거나 일류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기독교 학교의 진정한 건학 이념이고 자랑스러운 목표가 될 수 있는가? 일류병의 기독교화가 아닌가?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 교육의 자유와 종교 선택(신앙)의 자유의 권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대학생을 포함한 성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동안에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교육(혹은 개종 교육?)에 있어서 획일화되고 권위주의이며 주입식의 문제점들이 있었다는 점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채플 참여나 종교와 관련된 특별 활동이 실제적인 기독교 계통 학교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고 부족해 보인다. 사실 기독교의 세속화와 다원주의적 입장은 한국교회나 기독교 계통의 교육기관들에서도 이미 만연한 상태다. 과거의 권위주의와 주입식 교육이 먹혀들지 않는 이 시점에서 이럴 때일수록 민주적이면서 자발적인 참여와 교육방법론을 사용한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다. 우려가 되는 문제점은 종교 교육의 다양화와 선택권의 부여가 종교 교육의 부실화 혹은 의미의 상실로 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사학법 개정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에 올인(all in)하는 것뿐인가? 물론 진정한 종교 교육의 자유와 인권법이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방법론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사학법 개정에 대한 전면 거부냐, 부분적 수용이냐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설령 극소수의 기독교 계통 사학 재단이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입법화가 대다수의 기독교 계통의 사학 재단을 범죄 집단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종교 교육의 자유의 침해냐 사학 비리에 대한 척결이냐의 문제. 사실 문제는 재단 혹은 법인의 사유화와 그에 따르는 비리의 척결이 우선하는 것이지, 재단이사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분산시키는 것이 곧바로 종교 교육의 자유의 침해나 사학 재단의 재단 이념 실현의 난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사학 재단이 일방적으로 교사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시혜(施惠)를 베풀던 시대는 끝났다. 기독교 계통의 사학은 재단과 국가(학생이나 학부모가 내는 세금의 지원의 측면)와 학부모들의 재정적 기여와 운영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나아가야 한다. 재단과 학부모와 교사들이 동일한 건학 이념을 충분히 공유하고 살려나가기로 합의한 혹은 숙의하는 경우가 된다면 더 건전하고 성숙한 사학 재단 운영이 되지 않을까?

3. 평준화의 문제-학생의 학교 선택권과 학교의 학생 선택권의 문제

이전의 필자의 기고문(2004년 9월 16일자 <뉴스앤조이>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종교 교육의 자유의 문제는 ‘평준화’라는 쉽게 풀리지 않는 암초(?)에 묶여있다. 일부 사람들은 평준화가 우리의 문제의 손쉬운 해결책인 것처럼 주장하나, 필자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한다. 종교 교육의 자유를 위해서 평준화의 일부 조항을 해제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기독 교육의 이념을 구체화하거나 실현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여전히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 사학 내에서도 기독교의 가치와 교양인 양성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4. 국가적 재정적 의존과 커리큘럼의 규제에 따른 기독교 사립학교의 존재 의의의 문제점

교육법이나 인권법에 따르면, 사립학교는 국가 이념의 실현을 위한 위탁 교육 기관인가? 이러한 잣대로만 본다면 모든 교육 기관에서는 교육 이념의 획일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국가로부터의 재정적 의존이나 교육 이념 혹은 커리큘럼에 대한 지나친 규제는 기독교 사학의 존재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재정적인 차별이나 커리큘럼의 획일화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한 가지 토론 주제다. 물론 평준화라는 것이 커리큘럼의 획일화를 초래한 부분도 있다. 내가 볼 때, 사학 재단이 학생들의 등록금이나 국가 재정에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국가로부터의 재정지원은 국가가 주는 ‘시혜’가 아니라 세금의 적절한 분배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정부는 시민이 낸 세금을 납세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교육기관에 분배해주는 관리자나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유럽식 모델). 물론 이러한 주제들은 기독교계통 사학을 포함한 모든 사학들의 법이나 재정이나 인사 등에 대한 투명하고 객관적인 체계가 수립된 후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5. 기독교 사립학교의 미래는

사실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은 신학교육과 주일학교 교육까지도 포괄하는 거대 구조 속에서 논의가 되어야 하고 이론적인 연구와 실천적인 적용, 그리고 재단과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들이 함께 머리를 마주 대하고 이야기해 보아야 할 주제다. 물론 이것은 한국교회가 떠맡아야 할 큰 숙제이며 과제이기도 하다. 기독교 사학의 미래는 재정적인 면에서나 인적인 면에서 혹은 정체성의 면에서 한국교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계통의 사학이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에게 닥친 재앙은 외부에서가 아니고 안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이상 혹은 기독교적 교양을 실천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그 이념을 실천할 재단과 관계자들이 먼저 삶과 행동으로 그것들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 사학은 개혁의 쓴 잔(혹은 십자가)을 달갑게 마시길 권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도 100년을 위한 투자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세속주의와 교회지상주의 혹은 비민주적 태도를 가지고 교회 성장이나 경쟁 논리 등에 급급하지 말고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교양인들을 키우는 일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아직은 시청 앞 광장으로 뛰어나가거나 단체로 머리를 깎을 때가 아니라고 본다. 정부나 기독교 사학 스스로나 힘의 논리를 앞세워 기독교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기독교 계통의 사학이 사는 길은 먼저 기독교 교육의 의미를 정립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며 그동안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틀을 짜는 길이며 교회는 또 하나의 기독교 교육과 실천의 장인 기독교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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