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추모 예배가 열렸단 소식에 많은 이가 놀라면서도 기시감을 느꼈다.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십자가 대신 차려 놓은 교회의 모습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추모 예배를 준비한 박원영 목사. ⓒ뉴스앤조이 이규혁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발전의 탁월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추모 예배'가 처음 열린 2013년 10월 25일, 온라인이 들끓었다. <뉴스앤조이> 페이지에 올라온 추모 예배 사진은 순식간에 7만여 명에게 전달됐고 누리꾼들은 강한 비판을 쏟아 냈다. 십자가 자리를 차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과 박 대통령을 칭송하는 목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많은 이가 기시감을 느꼈다.

한국 개신교가 정치권력 앞에 두 손 든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올라간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두고 저항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로 나뉘었는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이듬해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해 일제에 협력하기로 했다. 전체 개신교인 40만 명 중 70%를 차지했던 장로회가 일제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이 행태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진다.

신사참배의 악몽은 이후 한국교회가 반공을 열렬히 외치는 주요 동기로 작용한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실장은 근본주의 신학을 가진 장로교가 신사참배에서 느낀 수치심을 공산주의를 향한 분노와 증오로 대치했다고 분석한다. 종교의 역할을 부인하는 공산주의를 공격하면서 굴욕감과 치욕을 감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국가 조찬 기도회는 권력과 종교가 유착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장이다. 올해 3월에 열린 국가 조찬 기도회 모습. ⓒ뉴스앤조이 임안섭

개신교와 반공주의의 결합이 가장 빛을 발한 건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이다. 국가 조찬 기도회는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정부를 목사들이 내놓고 찬양할 수 있는 장이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 대형 집회는 반공주의 선전장이었다. 선전과 찬양 뒤에는 보상이 따랐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은 하나님이 성공시키신 것이다"는 발언을 한 김준곤 목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의 부지를 받았다.

한국교회는 정부 덕분에 교인 숫자 늘리기의 정당성도 획득했다. 전호진 박사(캄보디아장로교신학교 총장)는 한국교회가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개발‧성장주의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축복과 성공에 두었다고 분석했다. 부와 건강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해석은 교회가 커지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는 설명을 가능하게 했고, 교회들이 대규모 전도 집회로 몸집을 불려 나가게 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와 맞아떨어지는 '삼박자 축복'으로 교회를 엄청나게 키운 조용기 목사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지원으로 대형 집회와 광고 등을 통해 홍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개신교는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 60.9%를 기록한 교회 증가율은 1970년대에 157%까지 치솟았다. 증가율이 65.1%인 1980년대와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교인 수를 보면 성장세는 더 확연하다. 1960년 62만여 명이던 개신교인은 다음 해 319만여 명으로 늘어나고 1977년에는 500만 명을 넘어선다. 교회 문만 열어도 사람이 모이던 시절이었다. 반면 정권을 비판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인이 거의 늘지 않았다.

▲ 박정희 정부와 야합한 극우 한국교회는 대형 집회와 광고 등을 통해 교인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지난해 열린 극우 개신교 단체의 집회 모습.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교회 성장의 황금기를 향한 그리움은 박정희 정권의 후예인 정치인 박근혜가 등장하면서 거세졌다. 1970년대를 기억하는 개신교 목사들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를 열심히 지원했다. 특히 보수 개신교 대표를 자임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활약이 가장 컸다. 한기총은 박근혜 후보를 둘러싸고 신천지 논란이 불거지자 박 후보 대신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박 후보를 비판하는 인사는 맹렬히 비난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정권을 향한 구애는 더 과감해졌다. 한기총은 올해 4월 '새마음국민운동중앙협의회'를 창립했고, 조용기 목사는 4차원영성글로벌포럼을 통해 '새마음·새생활 운동 선포식'을 열었다. 새마음운동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후 영부인 역할을 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펼친 운동이다.

올해 열린 추모 예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예배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을 살피면 목적은 훨씬 현실적이다. 예배를 준비한 박원영 목사는 교단 돈을 횡령한 혐의로 고소당했고, 축사를 맡은 하귀호 목사는 박 목사와 함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위기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하나님의 독재에 비유해 물의를 빚은 김영진 목사는 세습 반대 여론이 드높던 지난해 말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인사다.

박정희 추모 예배 소식에 민감했던 사람들과 달리 역사학자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담담했다. 역사 앞에서 개신교는 늘 정권에 야합하려는 세력과 견제하려는 세력 둘로 나뉘었는데, 이번 일은 정권의 힘을 빌려 옛 영광을 재현하고픈 몇몇이 벌인 촌극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교수는 이번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호들갑 떨기보다는 늘 있었던 개신교 내 세력의 하나의 움직임, 즉 앞으로도 계속될 현상의 하나로 보길 조언했다. 과거에 기댄 기성세대에 절망하기보다는 미래를 만드는 젊은 세대를 기대하라는 말과 함께. 

* 참고 문헌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강인철, 중심, 2007)
<기독교, 한국에 살다> (강현선 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3)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김진호, 현암사, 2012)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이원규, 감신, 1998)
<한국 기독교와 역사>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과 해외 선교' (전호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경제와 사회> '한국 기독교 교회들의 정치적 태도' (최종철, 한국산업사회학회, 1992)
<기독교사상> '국가조찬기도회, 무엇을 남겼는가' (한규무, 대한기독교서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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