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흔히들 인사 나눌 때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편히 주무셨습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편히 계십시오, 등등. 그런 인사말에 들어 있는 기본적인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안녕'입니다. 평안하고 무사하고 탈 없고 등의 의미를 지닌 '안녕'.

그렇게 사람들은 안녕, 평안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디 사람만 그런가요, 하나님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안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의' 평안에 관심이 많을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1절은 우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앞길에 재앙이 아니라 평강을,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I. 평안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사람이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 했는데, 그 평안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러한지,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10절, 11절, 12절 세 절을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야말로 하늘에서 복이 뚝 떨어진 것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적지로 끌려간 유다 민족이 해방되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글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없도록 번역되어 있습니다(물론 다른 구절을 통하여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10, 11, 12절 세 개 절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그 세 개 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10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앞 절인 9절 그리고 뒤에 나오는 11절에서는 10절의 사건이 생기는 이유를 찾아볼 만한 연결고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오해할 만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개 절을 합하여 읽어 보면, 이렇게 이해가 되기 쉽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II. 기도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성경에 '기도'라는 말이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그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야. 그렇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을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거야'라는 식으로 이해를 하기 쉽습니다.

백 보 양보해서 그렇게 이해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같은 교훈만 얻고 말뿐입니다. '기도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과연 이 본문이 그런 기도를 하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래서 기도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일까요?

좋은 해석 같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면 더 깊은 뜻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가 하면 10, 11, 12절 이렇게 세 절의 관계를 우리가 따져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만 해석을 해 버립니다. '아,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 당연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는 거야.' 끝! 그러면 새로운 내용을 우리가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앞 문장과 뒤 문장은 반드시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게 각각 뜻이 다른 문장을 이어 간다면,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지 제대로 뜻을 전하려고 하는 문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는 예쁘다'. 이런 두 개의 문장이 있다 합시다. 이런 두 개의 문장이 서로 관련이 있으려면, 그 가운데 접속사나 관련을 맺어 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는 예쁘기 때문이다.' 또는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영희가 예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문장 사이에 연관을 맺어 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데 10절, 11절 그리고 12절은 제각기 제 할 말만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한글 번역으로 살펴보아서는.

그래서 어떤 식으로 흔히들 이해하는가 하면 10절은 그냥 그대로 홀로 놔두고, 11절과 12절을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11절을 결과로, 12절을 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그래서 너희가 나에게 와서 기도한다면, 내가 기도를 들어주어서 너희 장래에 평안과 희망을 줄 것이다'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표준새번역의 경우도 개정개역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III.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나 영어 성경으로 이 세 절을 살펴보면 그게 아닙니다. 10절에 나오는 내용,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그 다음절 11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plans to prepare you and not to harm you, plans to give you hope and a future."

"왜냐하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영어 성경에는 그 절의 성격을 분명히 해 놓습니다. For가 11절의 맨 앞에 등장합니다. For가 '왜냐하면'이란 뜻입니다. 앞 절에 나오는 사건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인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 절인 12절은 어떤 관계일까요?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그런 후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Then이라는 말이 앞에 등장합니다. Then은 '그리고 나서', 또는 '그런 후에'라는 뜻이니, 너희들이 고향에 돌아간 다음에 기도하고 부르짖고의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절을 문장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정리해서 다시 한 번 읽어 본다면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절). 왜냐하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기(때문이다)(11절). 그런 후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절)."

이렇게 해석을 하고 보니, 우리가 맨 처음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해석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데 반하여 제대로 살펴본 해석은 하나님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그러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통용되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무언가 해서, 하다못해 기도라도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야만 그제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평안의 길을 허락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고향 시골에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는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애타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아들과 손자가 고향집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식에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줄 용돈과 맛있는 과일 등등을 선물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추석이 되어 아들 식구들이 다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마악 꺼내 주려는 순간, 손자가 말합니다. "할아버지, 나에게 뭐 주실 선물 없어요? 주세요."

자, 이렇게 되어서 할아버지는 준비한 선물을 손자에게 주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선물을 주고받은 경우, 선물을 받은 손자나 건네준 할아버지가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입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그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입을 벌려 주시라고 했기에 할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그 선물은 손자가 달라 하지 않았어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주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굳이 손자가 입을 벌려 말하지 않았어도, 주려고 계획한 것이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섭섭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손자에게 주려고 한 것인데, 손자가 달라고 해서 마지못해 준 것같이 보였을 것 같아서 마음이 서운한 것입니다. 그만 손자가 순서를 어긋나게 만드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도 흔히들 해석을 잘못하여, 평강을 주시려는 하나님이 그만 사람들이 간청을 하니,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것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잘못된 해석, 천편일률적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평안의 길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평안의 길로 불러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은혜를 베푸셔서 평안의 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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