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TV 연속극이나 영화를 보면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영화나 드라마를 집필하는 작가들 머리들이 비상하고, 또 그만큼 애를 많이 쓴다 싶은데 그들이 줄거리의 힌트나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 헤매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감의 원천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예전에 나왔던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 아시지요? 그 연속극에서 유명했던 대사 "이 안에 너 있다"라는 유명한 대사, 기억하십니까?

그 대사는 분명, 성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를 비롯하여 성경에는 유난히도 그런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또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49일'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드라마에서 극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키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눈물입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어 그 육신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영혼은 떠돌아다니는데, 그 영혼이 다시 그 육체 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즉 다시 살아나기 위한 조건이 누군가가 자기를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도 100% 눈물 세 방울, 부모 혈육 것 빼고. 물론 이것은 그저 작가의 공상의 산물이지, 진짜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쨌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흘리는 진실된 눈물, 찾기가 그리 쉬운가요? 그래서 주인공이 눈물 세 방울을 얻기 위하여 좌충우돌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엮이고 풀리고 하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다가 오늘 본문을 떠올렸습니다. 만약 드라마의 주인공이 오늘 본문의 나사로라면 깨어나는데 필요한 눈물 세 방울 중 한 방울은 분명 예수님의 눈물이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드라마를 집필한 작가가 성경의 본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이 조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본문에서 나사로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여기저기 보이기 때문입니다. 3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에서 '그'는 마리아를 의미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이 나사로를 생각하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유대인이라 했으니, 분명 두 명 이상이었을 것이고, 최소한도 명이라 해도 두 방울,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까지 하면 세 방울, 이런 식으로 작가가 생각하고, 드라마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런 생각은 저 혼자 해 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는 법이니, 드라마상의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 드라마와 본문은 직접적인 연결은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입니다.

눈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도 때로는 울어 보셨지요?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모두 울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말하더군요, 사람이 태어나서 우는 것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받은 후 엉덩이를 때리니 아파서 운다고. 그러나 그것은 우스개 이야기이고, 태어나서 울지 않으면 호흡이 되지 않으니 큰 문제라는 것, 다 아시지요? 그래서 울지 않는 아이는 때려서라도 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음은 맨 처음에는 호흡으로 공기를 들이마셔, 이세상과 만나는 방법이고 그 다음에는 울음이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 다른 의사소통 방법이 없는 어린아이, 갓난아이 시대에는 울음으로 부모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니, 소통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커서도 울음은 여전히 대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소통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릴 때에는 이 세상과 소통을 할 때에는 울음으로 하곤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는 울지 않게 되었지요. 더군다나 뭐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나, 하면서 울면 안 된다고 하지요. 또 어린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가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라는 노래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눈물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 눈물을 흘려야 때, 흘리지 않으니까 이 세상은 삭막하고 비정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 세 방울'이란 드라마의 테마는 매우 신선했고, 눈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보여 주었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 눈물의 의미를 성경은 친절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과 36절. 먼저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 다음 36절을 보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보라."(개역성경)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개역개정)

따라서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이냐? 나사로를 그만큼 사랑하셨기에, 그가 죽은 것이 못내 가슴 아파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주위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우셨을까요? 그것도 눈물을 찍어내거나 훔칠 정도가 아니라 주위 사람이 다 알아차릴 정도로 우셨다는 것이지요.

대개 남자들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웬만해서는 울지 않습니다. 우는 모습 보면, 울어도 그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 조금 더 하면 울음을 감추느라 하늘을 애써 바라보는 척, 하는 정도. 그러다가 누가, '어, 우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황급하게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갔는가 봐' 하는 것이 남자들 우는 모습인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는 모습을 남들이 다 알아차릴 정도로 우셨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만큼 슬픔이 크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우셨는데, 그러면 과연 죽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기에 그랬다는 것인지 한번 살펴보십니다.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지는 본문에 여러 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1장 1, 2, 3절입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누가 사랑하신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에게 말을 전하는데, '예수님이 사랑하시는'이란 말이지요. 그다음에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친구라는 말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실 때, 다른 사람들이 그 눈물을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눈물을 다 흘리실까, 36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나사로에 대하여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에 슬퍼하시면서 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말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표현이 너무 밋밋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그저 그런 정도의 눈물이 아니라 진짜 단장(斷腸)의 아픔, 창자를 끊어내는 정도의 아픔을 동반한 눈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이 상황에서 구태여 눈물을 흘리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설령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에 관한 일을 다 아시고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나사로가 잔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아미 다 알고 있었지요.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따라서 예수님은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이제 자기가 할 일은 그런 슬픔에 잠길 때가 아니라,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나사로를 위하여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목적은 하나, 나사로를 살려내는 일입니다. 11절에 예수님은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목적이 이미 분명하니, 바로 가셔서 나사로를 살려 내 오시면 될 것인데, 굳이 이 자리에서 울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33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비통히 여긴다는 말의 목적어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비통하게 여겼다는 말인가요?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요? 나사로의 죽음을 비통하게 생각했고, 나사로를 불쌍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사로를 위해 울 때에 그 울음이 예수님을 못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요한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히 여긴다'는 말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생깁니다. 통분히 여긴다는 말은 원통하고 분하다는 뜻이니까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분하게 여겼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모습에 화를 내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해석은 그 다음 절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우호적이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인 것에 반하는 해석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슬퍼한다, 무엇을? 나사로의 죽음을 슬프게 생각했다는 것이고, 나사로를 불쌍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울고 있는 사람들의 그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 그래 저렇게 슬퍼하는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체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통히 여기시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어우러져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같이 우신 것입니다. 눈물 몇 방울 비친 게 아니라 그야말로 오열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weep이라 번역하여,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울며 슬퍼하다, 한탄하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흘리는 모습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인생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공감하신다는 말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린 구절을 일일이 살펴본 것은, 그 눈물이 나사로를 살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드라마 '49일'에 나오는 눈물 세 방울이 죽을 사람을 살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눈물과 관계없이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마음을 같이하고, 감정을 나누신다는,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시고, 같이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제가 예수님이 나사로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나,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랑하는 마음이 나사로를 살리려는 마음을 만들어 내었고 죽음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우는 사람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그 사랑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사랑이 말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의 최고 경지의 모습을 울음으로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열하심으로 사랑의 경지를 보여 주셨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럼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래, 그렇게 지극한 사랑을 울음으로 보여 주었다 치자, 그러면 무엇 하느냐?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우리 흔히 쓰는 말로,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사랑만 있으면 다냐, 하는 질문, 많이 들어보시지요?

그런 질문을, 우리를 대신해서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 구절이 사랑이 밥 먹여 주냐, 하는 질문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 좋다, 좋아, 그렇게 사랑해서 눈물을 흘리면 뭐하냐? 그렇게 사랑했다면, 죽기 전에 와서 진작 와서 살려내야지. 지금 와서, 뭐 한다고 울고 있냐?' 이런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말씀으로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끌어내시고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 수의를 풀어 다니게 하라고 하셔서 온전히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무엇하는 물건인가? 사랑한다고 하면 다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죽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죽을 사람을 살려냅니다.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굳이 증거를 대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질문 -사랑은 무엇하는 것이냐– 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사랑,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우리 역시 사랑으로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질문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 너희들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너희들끼리 좋아서, 서로 서로 대우해 주고, 챙겨 주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냐고 하는 그런 질문에 이제 너희들이 대답하거라. 온몸과 너희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런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라.

요한일서 4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바로 우리를 살리려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살림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랑으로 우리끼리 또는 나 혼자 잘 지내고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려내야 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