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목사가 되어서 설교를 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너무 쉽게 말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아닌 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는 스타일의 말을 하다 보니 말씀을 그대로 따라 살아야 하는 성도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처지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마음에 떠올려 경계로 삼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목회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직분을 맡았던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성경 공부를 하는 중에 어느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집사님,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알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좀 알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제가 설교 준비할 때마다 저를 깨우쳐 주는 말이 됩니다. 신도들은 전혀 방법을 모르는데 목사들은 그저 말하기 쉽다고 무조건 신도들에게 이리 저리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설교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게 됩니다. 본문 말씀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말은 참 좋은 말인데 과연 어떻게 해야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가? 이게 실상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범사…. 모든 일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을 만나게 되지요. 연세 드신 분들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두 다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인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쁜 일,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남이 들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본인에게는 엄청나게 심각한 일, 남이 들어도 심각한 일, 그러한 이야기들을 모두 다 일컬어 범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범사(모든 일)를 분류해 봅시다. 분류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간단하게 감사라는 잣대를 사용해서 '감사할 만할 일'과 '감사하지 못할 일'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감사할 만한 일' 많이 있지요. 몸이 건강한 것, 그래도 이 정도로 살 수 있다는 것, 등등 말하자면 너무 많이 있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게 감사할 만한 일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인생에 감사하지 못할 일도 더러는 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아직도 쓸 만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을 먼저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분히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있어 감사를 하지 못하겠다면 우선 그 힘든 부분을 빼고 다른 것만 감사하십시오. 우리 주변을 보면 얼마나 그러한 일이 많습니까? 그런데도 몇 개의 감사하지 못할 일 때문에 다른 감사할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날 때에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간을 지나게 하셨는데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이 떨어지자 모세에게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어 먹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나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 16:35)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자 이제 어떤 불평을 했는가 하면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 11:4~6)."

이런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어 그들이 고기를 먹게 해 주셨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민 11:3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감사할 만한 부분을 보지 못하고 불평하는 우리들 인간의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에는 이 힘들고 괴로운 종살이에서 언제 벗어나나 했는데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먹을 것을 불평하고, 그것이 채워지니까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불평을 해 대는 것이 실상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 먹을 것 주신 것들 감사할 일이 많은데 감사는 안 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만 찾아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 모든 일에 감사하기에 앞서서 우선 감사할 부분을 제대로 보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이 있습니까? 맨 먼저 감사할 일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신기한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말씀들이 믿어지는 것일까? 내가 잘 알아서도 아니고 공부를 해서도 아닌데 그것이 믿어지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서 어디 감사할 것이 없는가 살펴봅시다. 먹는 것을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적어도 하루 한 번씩은 새벽 기도회를 마칠 때마다 그런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매일매일 우리가 먹고 살도록 음식을 주시지요? 옛날을 생각해 봅시다. 정말 쌀이 없어서 먹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새는 다이어트 하느라 일부러 굶기도 하지만 그때에는 없어서 먹지 못하였습니다. 시 한 편이 생각이 납니다.

저녁밥을 굶고 나니 첫 아이 갖고 배부른 아내가 가엾고 왠지 무능한 사람 같아 서글퍼졌다.
한 끼 굶자 신앙으로 합의하고 누웠다.
밤 10시쯤 누군가 쌀 한 말과 땔감을 부엌에다 놓고 간다.
늦은 밤, 저녁상 앞에 감사 기도 하다가
우리에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니 감사하나이다 하는 대목에서 울었다.
예수 믿는 날부터 수천 번 주기도 외웠으나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활이 어렵고 태산 같은 근심이 있었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다. -고훈

그렇지만 요즈음에는 누가 그런 것으로 감사를 합니까? 그래서 가장 먼저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 마음에 감사를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회복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동독과 서독이 통일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동독 사람들이 쓰레기를 트럭에 싣고 와서 서독 땅에 갖다 버렸답니다. 서독 사람들이 화가 나서 동독 사람들이 버린 그 쓰레기에 자기네 쓰레기까지 보태서 갖다 버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오히려 동독 사람들에게 유용할 과일 통조림을 잔뜩 실어다가 한 트럭 쏟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런 쪽지를 한 장 적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는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동독 사람들은 쓰레기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자기들은 풍성한 살림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하는 마음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마음속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그 모든 일의 근본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해 주십사 하는 요청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축복하셨구나" 하는 감사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지금까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범사, 즉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우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사람의 보기에 감사할 만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나눈 다음에 감사할 만한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그것에 신경이 쓰여 건강한 다른 부분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감사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그렇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불행이 다른 감사하는 마음을 꽉 틀어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가 막혀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차들이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것처럼 감사 못 할 만한 사건이 생기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감사가 꽉 막혀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감사할 일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것보다는 실상은 나머지 그렇지 못한 하나가 더 중요합니다. 나머지 하나, 감사하지 못할 일이 해결되어서 그것부터 감사할 수 있어야 나머지 열 가지 감사할 만한 일에 대하여 제대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꽉 막혀 있는 그 길을 뚫어야만 나머지 감사도 술술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감사하지 못할 일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 고통을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지난번 글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상대편에 말씀을 듣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듣는 우리가 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은 결코 혼자 소리를 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코 하나님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좋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은연중에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 당신의 계획, 의지를 밝히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의지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이 감사할 만한 일이 되게끔 일을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감사할 만한 일이 되도록 하나님이 진행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배고프지, 밥 먹어라!"고 말을 하는 경우에 밥상을 차려 놓고 아이를 부르겠습니까? 아니면 밥은 차려 놓지도 않고, 밥을 할 쌀도 준비하지 않은 채 아이를 부르겠습니까? 물론 요즈음에는 셀프 서비스가 유행이어서 밥 먹으라고 하면 아이가 부엌에 들어가 척척 라면 끓여서 먹는지 모르겠으나 제대로 된 집 같으면 밥상을 차려 놓고 아이를 부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실 때에는 감사의 밥상을 차려 놓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먼저 앞치마를 두르시고 우리에게 감사의 밥상을 차려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반드시 이미 그전에 하나님의 귀하신 역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은 번제에 쓸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예수님께서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령을 받으라." 분명히 명령입니다. 이때 이미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임재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실 생각도 않는데 성령 받으라, 하신 게 결코 아닙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면서 이미 감사의 밥상을 차려 놓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에게 그런 감사의 밥상을 차려 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되, 그냥 되는대로 아들딸을 삼으신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표와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다가오는 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렵고 싫은,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게 보이는 일조차도 사실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위하여 우리를 훈련시키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일들 -인간적으로 볼 때 감사하지 못하게 생각되는 일들-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모세를 택하셨는데 그렇게 작정하셨으면 모세가 조금 나이 들어 세상 분간할 수 있고 말 좀 한다 싶으면 바로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일이지 왜 살인범이 되게 하고 광야로 도망가게 해서 40년간을 광야에서 게르솜아 게르솜아 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하십니까? 이게 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모세를 광야 학교에 보내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의 밥상을 차려 주시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또한 친히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갈 4:4~7)."

그렇게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계실까요? 세상에서 살아 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시면서 인간의 고달픔이 어떠한 것인가를 몸소 겪으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근심인 줄을 아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보여 주시면서 결코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 12:28~30)."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일 중에서 감사하지 못할 만한 일들은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지금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그런 각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제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로 감사하지 못할 일까지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다. 하얀 종이 한 장이 있는데 거기에 실수로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종이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에 사람들은 그 잉크 자국 때문에 그 종이 전체가 버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 참, 아까운 종이 한 장을 버렸다. 저것을 이제 어디에 쓰나, 잘라서 휴지로나 쓰면 몰라도…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얀 종이 위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유명한 화가가 그 종이에 떨어뜨렸다고 한다면? 그래도 사람들이 그 종이가 못 쓰게 되었다고 생각을 할까요? 아니면 무언가 그 위에 멋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기대를 하겠습니까?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의 혼인 잔치에 갔다가 어떤 가난한 아낙이 빌려 입고 온 비단 치마에 음식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얼룩이 져서 울상인 것을 보고 그 부인에게 그 치마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 치마를 받아든 신사임당이 치마의 얼룩진 부분에 몇 번 그림붓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그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울려나왔습니다. 그 치마 위에 아름다운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임당은 그 자리에서 얼룩이 진 비단 치마폭에 포도 줄기와 풍성한 포도송이들을 그려 주어 시장에 내다 팔아 빌려 온 치마 값을 갚아 주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그런 치마폭이요, 종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지금 잉크로 얼룩져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멋진 그림으로 그려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잉크 자국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 잉크 자국은 화가가 무언가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싫다고 우리가 화가에게 불평하고 왜 그렇게 그리느냐고 항의한다면 화가는 멋진 그림을 그리려는 계획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감사하지 못할 일 나머지 하나를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일, 즉 범사에 대하여 감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십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언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지금 붓을 들어 멋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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