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란트 교육>을 쓴 김태복 목사와 최재희 사모를 만났다. 조심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인터뷰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사진 제공 김태복)
언론 노출을 꺼리던 인사도 책을 내면 인터뷰를 자청하기 마련인데, 얼마 전 <달란트 교육>을 쓴 김태복 목사는 달랐다. 큰아들 용민의 총선 때 한바탕 홍역을 치른 탓일까, 인터뷰를 조심스러워했다. 언론과 사람에 시달리고 나니 선거가 끝나고 한 달 동안은 집안에서 큰 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김 목사 부부였다.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한국 주류 언론의 빈틈을 파고들어 주류의 대항마가 된 '나는 꼼수다'를 탄생시키고, '슈퍼스타 K'로 전 국민을 가수 지망생으로 만든 형제의 부모다. 영국으로 건너가 동양인 최초로 부르더호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딸을 두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부모를 궁금하게 여겼고, 어떻게 자식을 키웠는지 물었다. <달란트 교육>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난 6월 10일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서 김태복·최재희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가르치지 않고 보여 주기

사람들은 자식 교육의 비법을 궁금하게 여겼지만, 답은 가르침이 아니라 살아냄에 있었다. 김 목사 부부의 삶이 그대로 교육이었다. 김 목사 내외는 판자촌에 자리 잡은 홍익교회에서 33년을 목회하며 삼 남매를 키웠다. 창고 같은 30평 남짓한 건물에 50여 명이 모이는 교회였다.

가난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교회를 돌보느라 자식을 돌보지 못했다. 김 목사는 자녀에게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덕분에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고 했다. 부모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은 교인, 이웃들과 만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사회를 배우고 대인 관계를 맺었다.

▲ 가난한 교회 목회자 가정이 대부분이 그렇듯 김 목사 부부도 자녀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남매는 서로 돕고 배웠으며, 교인과 교제하며 자랐다. (사진 제공 김태복)
밤낮으로 교인을 위해 일하는 부모를 지켜보면서 아이들도 부모를 이해했다. 큰딸 지연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에 최 사모는 오갈 데 없는 아기를 맡아 3개월 정도 키웠다. 일반 가정에서 말하는 수험생 뒷바라지와 거리가 멀었지만 장래를 고민하던 딸에게는 좋은 교육이었다. 지연 씨는 대학 전공을 사회복지로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아기를 돌본 어머니의 모습을 꼽았다.

맹자 어머니라면 당장 짐 보따리 쌌을 동네에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김 목사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달란트 교육>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약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했다. 주변에 극빈 가정이나 결손 가정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김 목사 가정의 형편이 나았던 점도 자녀가 감사하며 자란 배경이라 했다.

강압하지 않고 자유롭고 다정하게

김 목사의 교육 철학은 확고하다. 부모의 뜻이나 욕심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학교나 사회가 중시하는 성적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재능이 자랄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도왔다.

'소통'은 자녀의 뜻을 이해하고 부모의 생각을 따뜻하게 전하는 교육의 핵심이다. 조언해야 할 때는 주로 글로 말했다. 차분히 적어 내려간 글에서 아들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읽었다. 편지로 사랑을 표현하고 용기를 주는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총선에서 낙선한 아들 용민에게 용기를 준 것도 어머니와 누나의 편지였다. 두 사람의 편지는 <달란트 교육>에도 실렸다.

▲ 삼 남매는 아버지의 진중함과 뚝심, 어머니의 발랄함과 재치를 물려받았다. 부모의 삶을 보면서 자연스레 배운 덕이다. (사진 제공 김태복)
"하나님이 키워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은 진심이지만, 방치만 한 건 아니다. 최 사모는 집에 들어오면 라디오를 켜고 '굿모닝 팝스' 같은 프로그램을 들었다. 일터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자녀를 대하기 위해서다. 역사·과학 만화책을 사서 주기도 했다. 물론 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발로 차든 굴리든 언제고 볼 수 있도록 아이들 곁에 두었다.

부부의 상반된 기질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과묵하고 뚝심 있는 아버지와 유쾌하고 활발한 어머니의 성격은 씨줄과 날줄 엮이듯 조화롭게 자녀에게 전달됐다. 이야기를 웃음과 감동으로 풀어내는 감각은 어머니로부터, 한길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레 걷는 끈기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다.

큰아들의 총선 출마…오해는 상처로

용민·용범 형제가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유명세를 얻을 때 즈음, 가족에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장남 용민이가 덜컥 정치에 도전장을 내민 것. 너도나도 달겠다고 달려드는 금배지였지만 최 사모는 좀체 "당선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자식이 무엇이 되거나 받길 빌어 본 일이 없었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들이 쓰임 받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 결과에 상심하지 않고 평안히 아침을 맞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김 목사는 <달란트 교육> 말미에 당시 겪었던 어려움과 심정을 따로 적었다. 가족에게 상처가 된 건 결과가 아닌 숱한 오해였다. 상대 후보가 제안하고 보수 언론이 기획, 연출한 '막말 김용민'은 크게 흥행했다. 김 목사 집 전화기는 숨 쉴 틈 없이 울어댔다. 전화를 받아도 대화는 불가능했다. 전화기 전원을 껐다. 아들 기사에는 새까맣게 댓글이 달렸다. 국민과 야당, 한국교회 앞에 죄인이 된 아들을 바라보며 부모의 가슴은 시커멓게 탔다.

▲ 김 목사 부부는 큰아들의 선거 출마로 홍역을 치렀다.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도 이따금 쑤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을 알려진다고 믿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은실
김 목사 부부는 표현의 잘못을 옹호할 생각은 한 터럭도 없다. 다만 발언의 맥락과 취지가 공세에 묻히고만 일은 안타까워했다. 막말을 비난하는 보수 개신교 단체의 '막말'은 그럭저럭 견뎠으나, 신실한 기독교인들마저 외면할 때는 시리도록 아팠다. 특히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쏟아낸 질책이 왜곡된 것은 지금도 욱신거리는 상처다.

김 목사는 40년 동안 교회 개혁을 부르짖은 자신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진 아들이 반기독교적인 인물로 비친 데에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래도 김 목사 부부를 아는 교회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이나 용민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30년 이상 보아 온 분들입니다"며 그들을 믿고 지지했다.

"시간이 가면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김 목사 부부는 아픔과 슬픔을 거두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무자비한 공격에도 꺾이지 않고 자식을 지지한 강인함과 잔인했던 봄을 털어내는 넉넉한 미소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궁금해 마지않던 자식 교육의 비결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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