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 후보가 막말 논란 때문에 4.11 총선 향방의 변수로 나타난 가운데 박경신 고려대 교수가 김 후보에 대한 입장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박 교수의 동의를 얻어 <뉴스앤조이>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김어준이 "나꼼수를 왜 했는데…"라고 말끝을 흐린 것을 많은 사람들은 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다.

나의 해석은 이렇다. 나꼼수는 우리 정치사에 언어 혁명을 가져왔다. 그전까지의 우리나라의 언어 문화는 매우 이중적이었다. 구어체와 문어체가 엄청나게 다르며 공석이냐 사석이냐에 따라 매우 다른 규범이 적용된다. 일본의 혼네와 다테마에는 아닐지라도 진심을 공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지면서 욕망과 가치의 투쟁은 은폐되어 왔고 그 장막 위에 기존 사회질서는 안전할 수 있었다.

나꼼수는 이 반동적인 구분을 파괴하였다. 친구들 간의 술좌석 말투로 진행되는 시사평론을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엿들을' 수 있게 하였는데, 항상 공석에서의 절제하에 문어체로 답답하게 다루어 왔던 소재들이 사적 유희의 대상으로 구어체로 다루어지는 카타르시스를 군중에게 제공하였다. 현실계에 더 근접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상징계에 나타난 거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정치인들도 수십만 명이 듣는 줄 알면서도 나꼼수에 출연하기만 하면 격조고 위신이고 다 집어치우고 F4의 말투를 따라가기 바빴고 이런 현상은 녹음장 밖으로 급격히 확산되어 갔다. 물론 공적 대화와 사적 대화의 규범의 차이를 파괴하는 현상은 SNS도 한몫했다. 오프라인에서도 말을 감성 트윗 날리듯이 하게 된 정치인들을 보라. 나꼼수와 SNS는 우리나라 언어 문화에서 같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역사 속에 성공한 민중혁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쉽게 하는 말이 '왕의 목을 벤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을 완전히 파괴시킬 정도의 강력한 자기 승인을 성취하지 못하여 항상 나머지 부족한 승인을 기존 질서에서 찾는다.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민중혁명 87항쟁에도 항상 '반쪽의 승리'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서울역 회군이야말로 기존 위계질서가 요구하는 예의를 준수하여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근성 때문에 혁명이 요구하는 결단성을 자기검열한 대표적 사례이다.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을 승인받고자 하는 근성에 실존주의가 결별을 선언했지만 우리는 아직 덜 실존적인가 보다. 한국 역사가 '미완의 혁명'을 반복하는 이유 즉 혁명이 계속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이유이면서도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자기 검열된 언어라고 생각한다. 왕의 목을 벤 적이 없는 이유는 아무도 '왕의 목을 베자'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의 목을 벤 김재규도 정작 '왕의 목을 베자'는 말을 하지는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혁명과 전혀 관계없이 혼자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미국 베트남전 시대에 한 병역 거부자가 "나에게 강제집총을 시킨다면 나의 첫 과녁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미국대법원은 버젓이 대통령협박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판결을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에서 혁명이 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정도의 민간사찰이 발각되면 대통령이 자진 하야 할 정도의 민주주의는 이루어내었다.

▲ 김용민이 지난 발언 때문에 사퇴를 한다는 것은 나꼼수가 시작한 언어혁명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결국 김어준이 말한 '젊은이'들의 진짜 혁명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언어혁명 없이 진짜 혁명 없다. ⓒ뉴스앤조이 양상호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분노의 분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가 있다. 효순이 미선이가 장갑차에 깔려 죽은 상황에서 거의 말초적으로 나오는 반응 ‘Fucking U.S.A.’가 대표적인 예이다. 2MB18NOMA, 원주시 시보에 이명박XXX를 그려넣은 만화가, G20쥐그림 모두 자신의 행복 여탈권을 쥔 권력자들에 대한 증오감의 자연스러운 분출이다.

김용민의 여러 발언들 "럼즈펠드, 라이스를 강간하라.", "자유의 여신상의 XX에 미사일을 꽂아넣어라" 등등도 아부그라이브의 미군 성폭행 및 미국 대외 정책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물론 그 표현도 여성을 비하해서는 아니되며 '강간'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않고 여성성에 대한 극단의 공격이다. 강용석의 아나운서 조롱이 똑같이 공인에 대한 조롱이면서도 최효종의 국회의원 조롱과 다른 것은 여성 아나운서들의 여성성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민의 발언은 다르다. 가장 쉬운 반론은 럼즈펠드는 남자고 김용민은 세계 권력에 대한 분노를 "씨발 라이스, 씨발 럼스펠드"라는 대신 "라이스와 럼스펠드를 강간하자"로 예의 바르게 풀어서 쓴 것뿐이라는 것이지만 그 반론은 째째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용민이 럼즈펠드를 빼고 '라이스를 강간하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황당무계한 과장법이 명제의 진정성을 부인하고 있다. 강용석의 명제는 '실제로 여성아나운서들의 다수가 몸을 팔아 승진한다'는 것이지만 김용민의 명제는 '실제로 럼스펠드, 라이스를 강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모든 언사(communicative action)는 항상 언사가 담은 명제가 진실이라는 진정성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용민의 명제에는 그런 진정성 주장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하 씨의 구분에 따르자면 '씨발, 럼스펠드 라이스' 정도의 감정표명이 된다. '대통령에게 총을 쏘겠다'라는 반전시위자의 말이 적시한 '총살'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에 대한 공격이며 범죄이면서도 이 말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역시 "대통령을 총살하는 것이 옳다"라는 진정성 있는 명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Hustler대 Falwell사건에서 래리 플린트가 우리나라로 치면 김수환 추기경 정도 되는 사람이 어머니와 성교를 했다는 허구의 스토리를 게재하고도 면책된 이유를 상기해 보자.

그렇기 때문에 '라이스를 강간하자'는 '씨발, 라이스' 이상의 여성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김용민의 독설로 지적되는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분노의 표출이지 진정성을 조금이라도 호명하는 사실적시가 아니다.

나는 진중권을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을 싫어하는 이유로 진중권도 좋아한다. 나꼼수 못지 않게 말버릇이 없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나꼼수 나오기 10년전부터 역시 보통 지식인들이 지키는 말의 규범을 모두 일탈하여 말의 형식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고 우리 사회에서의 은폐된 투쟁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물론 김어준의 딴지일보도 그 즈음에 시작되었다. 지금 진중권을 대리하여 우리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변호사들이 모욕죄 위헌소송을 제기하고 있는데 김용민도 곧 대리하게 되지 않을까. 이들은 이미 우리 사회를 혁명에 한발 더 다가가도록 한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표현의 자유 이야기가 아니다. 즉 김용민이 '대통령을 쏴 죽이자'는 말을 했다고 형사처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데 김용민이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을 쏴 죽이겠다'는 발언을 했다면 사퇴하는 것이 정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이 시사평론가지 거의 반 개그맨으로서 활동하면서 국민의 분노를 과장법을 빌어 대신 표출하며 살아가던 김용민에게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자신에게 강제집총을 시키고 살인을 강요하는 대통령에게 극단의 발언으로 분노를 표출한 반전시위자가 수년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원색적인 언어로 점철된 김용민의 과거는 지금의 나꼼수의 성공의 토양이었다. 김용민이 이 발언 때문에 사퇴를 한다는 것은 나꼼수가 시작한 언어 혁명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결국 김어준이 말한 '젊은이'들의 진짜 혁명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언어 혁명 없이 진짜 혁명 없다.

P.S. 개그맨 김용민, 과거에 속시원하게 말 잘해 줘서 고맙다. 정치인 김용민, 이제 같은 말도 절대로 똑같이 표현하지는 마라.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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