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외인종 잔혹사>로 2009년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 (사진 제공 주원규)
야만의 태동 : 질서와 계급, 제도 위에 세워진 교회

우리는 교회라는 말을 듣게 되면 '건물'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공동체의 모임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는 공간이요, 건물입니다. 드러나고 나타난 공간으로서의 교회가 한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도시 야경의 한복판을 내려다보면, 강렬한 붉은 십자가가 타오르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 공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영혼의 쉼을 얻고자 했습니다.

교회의 일원, 즉 소속 교인이 되었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생각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한 사람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모여 신성한 뜻을 나누는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당연하고 마땅한 교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는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기보다는 조직적인 형태를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조직체가 갖는 필연적인 지향성입니다. 공간으로서의 교회가 이루어지고, 교회의 공간을 메우는 공동체는 질서라는 이름 아래 직제를 나누고 각자의 역할 분담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질서의 이름을 닮아 있는 '계급'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쉽고 간단하게, 그리고 부정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계급이라는 용어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라는 공간의 신성성은 하나님이란 신적 존재를 향한 공통의 갈망을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적 존재의 전능성 앞에 인간은 무력함과 동시에 무한한 신의 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 전능성의 날개 그늘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이 신성성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을 끊임없이 모색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신성합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의 영역으로 귀속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세속 도시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언제든지 성향과 흐름이 변할 수 있다는 가변 논리에 방치된 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때문에 세속 세계의 상대성으로부터 절대적 진리를 하나의 불변한 정체성으로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질서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주장합니다. 이것이 종교인들이 신념처럼 떠받드는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 질서가 공동체의 계급 체계를 구성합니다. 갖가지 제도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세워진 토대 위에 종교 활동이 역동적으로 전개됩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여러 분야의 부서가 맡은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됩니다.

교회를 견고한 성역화로 만들어 가는 과정은 비단 프로테스탄트만의 특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교회임을 자임하는 가톨릭교회가 교회 체계 구축과 질서유지에 있어서는 역사적 뿌리가 훨씬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갖는 엄격한 위계질서의 추구는 일종의 집념입니다. 그 정신이 섬김의 정신에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맹목적 추종의 야만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 성역화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보이는 영역으로 박제화하려 합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인류 역사에 걸쳐 나타난 교회의 '야만성'

2,000년에 걸친 서구 역사의 거대한 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의 역사에서 제도로서의 교회를 철저히 한 가톨릭교회가 보여 준 위계질서의 엄중함이 종교적 신성성과 결부되었을 때, 과연 순기능만 가져왔는지 살펴본다면 결과는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교회가 보여 준 끔찍한 야만성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의 야만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개척과 소명의 가치 앞에 무릎 꿇어야 했던 식민지 주민의 강제 개종 역사 또한 야만의 논리로밖에는 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과연 이 야만성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특히 종교의 야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절대 진리의 준엄함,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초월적 신비의 영역을 마치 공동체의 질서로부터 파생된 위계질서의 첨단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른바 지도자가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그 위계의 장악자가 절대 진리를 조율하며, 그것을 넉넉히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러한 가르침의 당위를 강조하는 것에서 야만은 시작합니다. 바로 종교의 야만 말입니다.

이 야만성은 시대의 무지와 보폭을 같이하는 경우가 다분합니다.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않았기에 정치가 종교의 질서 안에 편입되던 양상을 보였던 중세 서구 사회에서 권력의 핵심은 종교였습니다. 권력의 핵심인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자의 영역, 초월적 신비를 교황 혹은 다른 이름의 종교 지도자들이 권위를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면서부터 야만의 횃불에 불이 붙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초월적 신비의 도래는 지상의 가치를 포기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의 죽음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과 종교 지도자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전제 조건으로 지상의 메시아를 강조했습니다. 땅의 메시아와 지상천국을 욕망했던 것입니다. 땅의 메시아는 이 땅의 실제적인 억압의 해체를 요구합니다. 식민지 주민이란 수치의 굴레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억압과 멸시 그리고 온갖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땅의 메시아를 향한 그들의 갈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상의 갈망으로 윤색된 메시아관에서 봤을 때 예수의 십자가 도상에서의 못 박힘은 명백한 좌절이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땅의 메시아를 포기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민중을, 예수를 목숨처럼 따르던 베드로, 가롯 유다, 나머지 제자들을 해체했던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발화된 모든 기대로부터 말입니다.

▲ 절대 진리를 조율하며, 그것을 넉넉히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러한 가르침의 당위를 강조하는 것에서 야만은 시작합니다. 바로 종교의 야만 말입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지상의 갈망을 좌절시킨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런데 야만스러움의 도래는 바로 그 기대로부터 태동합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의 역사, 초기 기독교의 시작과 함께 초월적 신성함의 추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짐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 그 깊은 곳에 숙명적으로 똬리를 튼 땅의 메시아란 주술로서의 뱀입니다. 그 뱀의 유혹이 땅의 메시아를 끊임없이 해체하고자 하는 초월적 의지에 헌신하는 참된 신성의 가르침, 그 궁극의 본질을 다시금 지상의 가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뼛속 깊이 연루된 권력과 공간, 공동체가 배설해 내는 위계질서의 본능적 카테고리 속으로 신성의 가르침을 편입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인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한국교회의 역사, 교회의 흥왕과 복음 진보의 찬란함은 이 야만성의 그늘과 함께 성장해 온 역사입니다. 여전히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야만의 추악성을 너무나 손쉽고 적나라하게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땅의 메시아라는 주술은 어떤 형태로 기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 공간, 교회라는 명분의 처마 아래에 교묘히 은닉해 있습니다. 이렇게 은닉된 주술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야만의 뻔뻔스러움으로 진화합니다. 또한 그러한 야만성은 이중적 행태로 드러납니다. 그중 하나는 교회 집단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존에 손쉽게 생각해 오던 공간과 가시적 질서유지 집단으로서의 공동체로 존립하던 교회가 성역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만 합니다.

성역화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보이는 영역으로 박제화하려 합니다. 또한 그것을 불변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추앙하려는 의욕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간 자체는 절대 신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함도, 불경함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물질의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그 물질의 흐름 위에 모여든 공동체의 질서 또한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신성함은 그 공간에 모여 있지만 객체가 아닌 주체일 수밖에 없는 개인, 개인의 영혼의 골방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숨 쉬는 생명의 호흡을 인지하는 순간, 그 찰나가 바로 신성함입니다. 때문에 이 신성함은 공간을 성역화하고자 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와 질서의 가면을 쓴 계급주의적 가치관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해체하길 원합니다. 좀 더 급진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곧 예수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해체와 저항의 정신이 그렇습니다. 계속

주원규 / 목사,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열외인종 잔혹사>로 2009년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 때문에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됐다.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이유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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