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회는 재림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 문장은 진실일 수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실일 수 있다는 의미는 재림 예수가 실제로 영광 중에 이미 오셨음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 경우 기독교 교리, 특히 종말론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그러한 명제에 마땅한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왕 중의 왕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기록은 예외 없이 초림 때의 예수와 재림 때의 예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진리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깊이가 권위의 영감성에 의해 직조되었다는 복음주의적 신념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재림 예수의 상(像), 이미지가 영광의 권위를 등에 업은 통치의 개념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그것입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림 예수가 종말의 때에 영광 중에 임하신다는 거룩한 성서적 계시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실체에 대해서는 우리의 안목이 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자 하는 선명한 편견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진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만은 외면하지 못하겠습니다. 재림 예수가 영광 중에 임하신다는, 다시 말해 하늘의 구름과 천군 천사들이 찬란한 위엄과 함께 이 땅의 진정한 메시아, 왕으로 오신다는 개념은 실제의 약속을 담보로 하지만 영적 개념의 뉘앙스가 좀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새 예루살렘 역시 이 땅 위에 건립되는 보이는 공간의 의미 너머에 있음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 지극히 자연스럽게 새 하늘을 군림과 통치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군림과 통치의 위용은 지상의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관념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짓밟고 약탈하여 자신의 발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관념 말입니다. 전형적인 폭력의 도상 위에 정의를 실현했다고 믿으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야만의 미소를 드러내는 그러한 땅의 메시아관이 혹시 재림 예수의 군림과 왕적 통치의 이미지로 치환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인간 예수의 이미지

초림 예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 부음받은 자인 그리스도가 2,000년 전 유대 지역 변방 갈릴리에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는 귀신을 몰아내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싸웠으며 굶주린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초림 예수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공생애 막바지 때 예루살렘 입성의 순간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목 놓아 부르짖었습니다. 민족의 해방, 선택받은 백성의 구원이 목전에라도 온 듯 그들은 마음껏 메시아를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그들의 찬양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실망과 전율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기득권자와 지배자들의 야만적이고, 누가 보아도 모순으로 가득한 재판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형벌이 단순한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서 전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은 대속의 필연이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통치 섭리 속에서 말입니다.

▲ 주원규 목사. (사진 제공 주원규)
그렇지만 예수의 삶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났던 그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군림과 통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에 둔 혁명가의 모습이었습니까? 불온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예수의 모습은 그렇게 느끼기엔 형편없이 초라했습니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게걸스럽게 어울렸으며, 어부처럼 변방에 밀려난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지독히도 비주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주류의 세력과 기득권층을 향한 그분의 외침과 성토는 다르게 보면 급진적으로 보일 만큼 과격한 면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다른 한편에 선 예수의 이미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는 두 세력 모두에게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층으로부터는 종교적 아성에 도전한 죄목으로, 비주류의 오클로스(무리들)로부터는 혁명을 거부하는 비겁한 타계주의자의 모습으로 낙인찍혀 외면당했습니다. 그 철저한 '외면'과 '버림당함'의 실존 속에서 초림 예수는 십자가 도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나심, 그 부활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영적 왕국, 새 예루살렘의 시작을 공표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님 왕국의 최종적 도래뿐입니다. 이미 실현되었으나 아직은 아닌 왕국의 주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를 신앙하는 교회는 오늘날 괴이하게도 초림 예수 때 두 극단적 편에 선 세력들의 전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하나님 왕국의 주체로서 부각되는 재림 예수의 이미지는 온전히 영적입니다. 영적이라 함이 단순히 미신적인(mystic) 의미로서가 아니라 재림의 영광이 우리가 생각하는 초림 예수 때의 두 세력의 편견 속에서 발아된 현세적 영광과 반드시 비례하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재림 예수의 왕적 통치는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인류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는 거룩함의 실현입니다. 그 거룩함은 철저한 순수함을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또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왕국의 이미지는 끔찍할 정도로 2,000년 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두 세력의 편견의 한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두 세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어쩌면 이미 좌정하고 있는 재림 예수의 이미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 세력 중 하나는 종교가 되어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 오늘날 교회는 거대한 건물을 종교화했고, 기독교의 이름을 빌려 땅의 이념을 형성했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종교심은 인간 본성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본성을 왜곡된 집단주의로 몰아가는 데 매우 효과적인 이념으로 작용하며 '헌신'을 요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작금의 현실을 지켜보면 그렇습니다. '교회'라는 거대한 건물이 기독교의 이름을 빌려 종교가 될 때, 그리고 그 종교가 결코 무시 못 할 이 땅에서의 이념, 막강한 '피플 파워'를 형성한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의 중심에서 숨 쉬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 속에는 이 종교의 첨단에 자리 잡은 재림 예수의 이미지를 심판과 정죄의 이미지로 고착화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정죄에 대한 굶주림은 세상과 자신들의 종교를 분리하려는 의욕에서 더욱더 첨예하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종교의 도그마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이라고 부르짖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교'로 왜곡된 교회는 온갖 협박과 공갈로 땅의 백성을 유린합니다. 진리 앞에 깨어나고자 했던 백성의 심장과 머리를 정죄와 심판의 종교 이념으로 세뇌시켜 바로 그 종교의 첨단에서 재림 예수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기득권화된, 이념화된 종교로서의 재림 예수는 종말의 때에 천군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이 땅에 편만해 있는 온갖 악을 심판하고 자신들의 내세를 보장해 주는 보증수표로 경화될 것입니다. 이 재림 예수를 붙잡기만 하면, 재림 예수의 이미지를 모셔 놓은 신당 개념으로서의 물질화된 교회 안에 들어와 앉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희망합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건물이 되어 버리고 선동의 홍위병이 되어 버린 교회를 향한 충성을 맹세하기만 하면, 구름 타고 오는 재림 예수의 보좌가 자신들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집요한 보상 심리의 중심에 불행히도 진짜 재림 예수는 없습니다. 아니, 재림 예수가 서 있을 곳이 더는 없습니다. 어느새 재림 예수의 정신과 그의 왕권이 쏟아내고자 하는 생명의 메시지를 상실해 버린 공허한 종교 속에서 지껄여 대는 허탄한 구호와 선동의 열정만으로 고취된 거짓 재림 예수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모든 이미지는 기득권층의 아집과 편견 그리고 현상 유지의 교활한 욕망만으로 지탱되는, 그야말로 사상누각 위에 세워진 신기루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산(死産)의 교회, 골방의 예수

오늘의 교회는 이 공허의 내부를 직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 허망함을 채우려 하는 또 다른 세력들로부터 발아되는 재림 예수의 우상적 이미지 역시 반드시 파괴해야 할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세력이 우상화하는 이미지는 '시대의 정의'를 위해 희생되는 재림 예수입니다. 이 역시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정의를 찾기 위해 온갖 제도적, 구조적 악과 부패의 고리를 끊어 내고 불평등과 부조리를 극복해야 하는 일은 땅의 백성으로서의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렇지만 냉정히 말해 이러한 몫, 정의의 실현은 우리 스스로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이 사회가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이유와 원인을 분석하는 것,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평등의 토대 위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하는 것,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자행해 놓은 이 제도적, 구조적 악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이 곧 무력한 전능자의 소산이라고 말하며 의아해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전능자라면 이 땅에서 자행되는 터무니없는 구조적 부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이 옳으냐는 공분에 가득한 성토를 토해 냅니다. '신이 우리를 버렸다'는 자조적이며 절망적인 구호로 다가올 재림 예수의 영광을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역시 심각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림 예수의 영광은 섬김과 사랑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의 거룩함을 묵묵히 실천해 갈 때 서서히 드러날 것입니다. 안개가 걷히듯 새벽 미몽의 모호함이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소멸하듯 이 땅에 서 있는 우리, 땅의 백성은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예수의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도래하는 재림 예수가 참된 재림 예수일 것입니다.

▲ 예수는 기득권자와 지배자들의 야만적이고, 누가 봐도 모순으로 가득한 재판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때 재림 예수가 몰고 오는 거룩한 종말의 영광은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원초적 영성의 발아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서 현실에서의 절망과 타계주의로의 몰입으로 인해 훼손된 재림 예수의 이미지만이 난무한다면, 우리는 급진적으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영으로 좌정하셨던 미래의 개념으로서 재림 예수를 우리가 사살하지는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너무나 끔찍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안에 오순절 영으로 거하신 성령이 이미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서 질식되어 사산(死産)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의 교회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타락의 오물통 속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겠습니까? 그 외에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오늘의 교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있습니다.

재림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도, 선민의식 속에서 견고화된 내세의 왕적 메시아도 아닙니다. 그분은 골방 안으로 임하셨던 분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원초적 갈망을 해소해 주기 위해 냉수 한 잔을 건네는 바로 그때 영광 중에 오시는 분이 바로 재림 예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재림 예수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초림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품고 있는 재림 예수의 장엄함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피조물의 관념을 초월한 창조주의 역설, 그 극치의 장엄함 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답을 구하고, 절대의 교리처럼 답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안에 계신 당신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글을 쓰는 저 역시도 무책임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자고 제안하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는 끝없는 무기력을 통감할 뿐입니다.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동서말씀연구회 목사

<열외인종 잔혹사>로 2009년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 때문에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됐다.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이유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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