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ㅅ교회 ㅈ목사의 성추행설로 한국교회가 큰 열병을 앓고 있다. 사실 그동안 교회 내부로부터 들려왔던 성 추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ㅈ목사의 성추행설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예견하셨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남다른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고 있다. 이유는 추문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ㅈ목사라는 사실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ㅈ목사에게는 그래도 한국 교회의 미래요, 청년들의 지도자며,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즉 이번 사건이 남다르게 충격적인 이유는 이 사건이 낡은 구세대의 구태적 행태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개혁적인 신세대 지도자에 의해서 자행된 범죄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마치 한국교회의 신세대조차, 즉 청년들의 세대조차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어느 목사는 이번 사건을 보고 한 마디로, "더 이상 한국교회는 없다"며 잘라 말했는데, 이는 한국교회를 향한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지난 500년 간 주류 교회로부터 외면받고, 비난받아 왔던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도)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왜 하필 아나뱁티스트인가? 그것은 그들이 중단 없는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개혁을 촉구했던 종교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들의 노선을 가리켜 급진 종교 개혁(radical reform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자신들의 교회를 초대 교회의 전통 속에 위치시키고 싶어 했다. 이러한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주류 교회에게 밉보였으며, 아직까지도 주류 교회로부터 '재세례파'라고 경멸적으로 불리며 멸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들의 그러한 열정과 그들의 긴 고난의 체험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우리 한국교회로 하여금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덮을 것인가? vs. 도려낼 것인가?

최근 일어난 ㅅ교회 ㅈ목사 건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양상이다. 한편에서는 그냥 덮자고 한다. 덮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는가. 젊은 사람이 혈기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가 다 얼마나 연약한 자들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젊은이는 선지자가 되지만 나이가 들면 제사장이 되는 법이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가?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괜히 건드려서 상처만 덧나고 긁어 부스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문제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만 가린다. 그러니 교회 문제는 교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세상에 알리지 말라. 이 모든 문제를 다 보고 계시고,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만 맡기고 우리는 그저 잠잠히 기다리자. 그러니 이제 그만 덮자.

한편 반대 측 입장은 이러한 태도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최근 여당의 한 의원이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해서 출당 조치되었는데, 성 추행 목사를 어찌 그냥 놔 둘 것인가? 어찌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정치인들의 수준만도 못하느냐며 분노한다. 피해자를 생각해 보라. 피해자와 그의 가족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큰 가? 그러한 약자의 편을 들지는 못할 망정 강자를 감싸고도는 것이 복음인가?

복음은 불의를 두호하고, 악을 권장하는가? 정죄 없는 복음을 복음이라 할 수 있으며, 회개 없는 용서가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악을 간과한다면 교회가 어찌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이야 말로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암세포는 수술해서 도려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삽시간에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말 것이다. 자, 이제야말로 수술 칼을 들이댈 때다.

악순환

자신을 아나뱁티스트 침례교인(Anabaptist Baptist)이라고 부르는 풀러 신학교의 글렌 스타센 교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학(Kingdom Ethics)에서 이 세상에 만연한 악을 '악순환'(a vicious circle)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악순환이란 악이 점차 개선되기보다는 점점 더 악의 공고한 세력을 만들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악순환이라는 개념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사뭇 다르다. 헤겔은 정과 반이 충돌하여 변증법적 긴장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제 3의 합(合)이라는 대안적 종합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하지만 스타센 교수의 악순환 개념은 정과 반이 충돌하면 대안이 만들어지기보다는 우리 인간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덫이요 굴레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컨대,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뽑아 버리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죄를 지으면 진짜로 손을 자르고 눈을 뽑아야 한다고 보는 엄격주의자가 있다. 반대로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을 수 없으니 죄를 지어도 놔두어야 한다는 관용주의자가 있다. 이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 답이 찾아질까? 아니다. 도리어 복음서 독자를 혼란과 혼돈 가운데로 빠뜨릴 가능성이 많다. 이도 저도 못하니 아예 그 본문을 피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스타센 교수가 말하는 악순환이다.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ㅈ목사 건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이러한 악순환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은 대체로 스타센 교수가 말하는 악순환의 형태로 고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통상 그 교회는 친목사파와 반목사파가 척지게 된다. 각각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성서의 본문을 끌어오기도 하고, 신학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차 양측은 파워 게임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누가 더 힘이 세냐가 점차 문제의 본질이 된다. 방관자는 둘 중 한 편에 서거나 안 그러면 교회를 떠난다. 갈등은 애초의 문제의 사안에서 떠나 '너 죽고 나 살자'식 전투로 변질된다. 그렇게 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기려고 하고, 그러한 와중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전투 논리'뿐이다. 비방, 욕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공간과 건물을 점령하고, 대자보가 나붙고, 전단지가 뿌려지고, 스프레이와 래커 글씨가 어지럽고, 심지어는 용역들까지 왔다 갔다 한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어느 한편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된다. 다행히 한 편이 굴복하면 싸움은 멈추지만, 양측 모두 힘이 비등하면 결국 법정으로까지 가고 만다. 물론 패배자는 제거되고 교회는 승자만 남게 된다. 세상의 법정이 문제를 가려내 주도록 교회의 문제를 들고 가는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러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일찌감치 전투를 포기하시는 나름 훌륭한 분들이 계시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분들의 백기 투항은 갈등의 회피이지, 갈등의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한국교회는 교회 내의 갈등을 용서와 단합, 치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 길을 갈 의지와 용기가 없는 모양이다.

제3의 길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숱한 순교자들이 피로써 써 내려간 피의 역사가 바로 그들의 교회사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 외부로부터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 중단 없는 도전과 갈등에 직면해 왔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항상 제3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제3의 길을 찾아냈으며, 그 길을 따라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놀랍게도 그들의 제3의 길은 세속 정부와 행정가들 및 사법부 관계자들조차 머리를 숙이며 배우기를 청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이다. 회복적 정의란 법정의 정의를 죄에 대한 징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뉘우치고, 잘못을 돌이키는 것, 나아가 가해자 및 피해자의 관계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다. 프레스노 메노나이트 브레스런 대학에서는 COSA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는데,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은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이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회복되고 살려야 한다는 것이 아나뱁티스트들이 취하고 있는 제3의 길이다.

아나뱁티스트의 제3의 길은 한마디로 구속적 길(redemptive way)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적 길은 모두가 사는 길을 말한다. 서로 상충되는 양자 간의 갈등에서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패하는 윈-루즈(win-lose) 모델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양자 모두 살리는 윈-윈(win-win) 모델을 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나왔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시면서도 그들에게 치마를 해 입혀 주신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아나뱁티스트가 강조하는 구속적 길이다.

자녀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것을 알았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모르는 체 할까? 안 된다. 그러면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엄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을까? 이것 역시 교육적으로 좋지 못하다. 자칫 잘못하면 자녀에게 분노와 반발심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료비도 만만치 않다. 부모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도둑질한 자녀를 혼내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다시 얻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모의 심정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죄인에게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의 치리에 반영하고자 노력해 왔다. 필자는 이들의 노력과 성과가 한국교회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필자는 몇 번의 기고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 죄와 악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실천해 왔던 제3의 길, 곧 구속적 길을 적용해 볼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첫 걸음: 고통과 함께 걸으라

제3의 길을 걷기 위한 첫 걸음은 고통에 대한 태도를 확정하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보기에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도려낼 것이냐 덮을 것이냐를 두고 논쟁할 경우, 양편 모두 범하고 있는 오류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두 편 모두 교회에서 발생한 고통을 서둘러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마치 몸이 아플 때 환자의 제1관심은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까 하는 것처럼 양편 모두 교회 내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서둘러 종결할 것인지가 그들의 지상 최대 관심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덮자는 사람의 편에서는 상처는 건드리면 덧나고, 긁어 부스럼이 생기니 더 큰 고통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덮자고 한다. 도려내자는 사람은 암세포는 놔두면 온 몸에 퍼지니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도려내서 애초에 싹을 자르자는 것이다. 그런데 아나뱁티스트가 볼 때 양편 모두 고통의 제거 내지는 감소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서 있으며, 이 입장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한 손에는 삶(living)을, 또 한 손에는 고통(suffering)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실제로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500년 동안 거의 내내 고통을 받아 왔다. 1~2년이 아니라, 500년 동안 수 십 세대에 걸쳐서 이어지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들은 그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고통이란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은 함께 걷는 친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최소한 우리만큼은 말이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웠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내에서 갈등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절대로 그 문제를 덮어 두지 않는다. 덮어 두려는 시도는 고통을 회피하겠다는 태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을 서둘러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도 쉽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문제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주시함

그렇다면 그들이 취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들은 문제를 주시한다. 계속해서 주시한다.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될 때까지 보고 또 본다. 물론 문제를 주목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것은 마치 태양을 한사코 똑바로 쳐다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들은 회피하지 않는다. 문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들은 뭘 하는 걸까?

첫번 째로, 모두가 그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어느 누구도 열 외자는 없다. 문제를 일으킨 '그(녀)'와 문제를 바라보는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문제에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두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눈다.

두 번째로는 문제를 주시하면서 그 문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 다르다. 인간이 기껏 찾아낼 수 있는 길은 덮을 것이냐, 도려낼 것이냐 하는 두 가지 정도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무궁무진한 해결 방법이 있다. 그때그때 다르다. 사안별로, 개인별로, 상황별로 그에 맞는 제3, 제4, 제5의 해결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내실 수 있다. 물 가운데로도 길을 내시고, 불 가운데로도 길을 내신다. 성경을 통해서, 신학자들의 글을 통해서, 이웃 교회의 자문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체 식구들의 진지하고 정직한 논의를 통해서 그들은 길을 찾는다.

세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주시는 길은 구속의 길, 곧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모두에게 임하는 구원의 길을 찾는다. 갈등 당사자 모두와 공동체가 살아나는 길, 피해자를 회복하고, 위로하고, 보상하는 길, 동시에 가해자를 쳐내지 않고, 다시 얻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길을 찾는다.

물론 어떤 경우는 오랜 기간 동안의 논의를 통해서도 마땅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자신들에게 지혜가 부족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특정 문제를 주시하고, 바라보고, 함께 아파하는 노력은 그 자체로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발휘한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필자에게 '너는 누구냐? 아군이냐, 적이냐'라고 물어 오실 분들이 분명 계실 줄로 믿는다. 필자는 양편 중 어느 편을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사는 길, 그리고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실 것이리라는 소박한 믿음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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