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 단체가 장애인의 편에서 운동을 하는 반면, 교회는 장애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사진은 노들장애인야간학교 학생들 모습.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장애인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장애인들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와 똑같다. 사회에 10-20% 존재하는 장애인이 교회에는 그 정도에 훨씬 못 미친다. 교회가 사회보다도 못하다는 반증이다. 왜 장애인의 복음화율이 일반인보다 현저히 떨어질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들에 대한 비호감과 편견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앙적, 신학적 태도 때문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장애인들이 상처를 입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열방과 민족, 방언이 함께하는 곳이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는 어떠한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교회에 나왔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이 너무 많다.

계단 때문에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소아마비 친구 영철이. 큰맘 먹고 찾아간 교회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다른 교회를 가 보라고 권유하며 서둘러 집어 주는 몇 푼의 돈을 얼떨결에 받아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집에 돌아간 시각장애인 준희는 어디 있을까? 손 떨림이 심하다는 이유로 성찬식에 참여를 거부당한 뇌성마비 보람이는 또 어디 있을까? 말 한마디 못하는 지적 장애라는 이유로 세례를 받지 못한 정민이의 손을 잡고 교회 문을 나간 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정민의 부모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귀신이 들렸다는 이유로 귀신 쫒는 의식에 시달리다 못해 더 심해진 정신병으로 고통 받는 철민이 지금 어디 있을까?

교회 지하실에서 베이비시팅을 받던 자폐 장애 아이가 한 번 예배실에 뛰어들어 설교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주의를 받고 "다시는 교회를 다니지 않을 거야" 소리치며 교회 문을 나섰던 은철이 아빠는 언제쯤 교회에 다시 돌아올까?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 예수님이 그까짓 장애 못 고치겠어요? 믿음이 있으면 어떤 병과 장애도 다 고칠 수 있어요" 하고 외치는 강대상 밑에서 매 주일 흐느끼며 "믿음을 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울부짖는 청각 장애아 혜련이 엄마의 눈에는 언제쯤 미소가 깃들까?

"하나님께 아직도 해결받지 못한 죄가 있나 봐요. 같이 기도해 줄게요, 우리 한번 매달려 봅시다. 이번 기회에 장애를 고쳐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립시다" 하며 덥석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하는 믿음 좋은 권사님들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다운 증후군 아들 찬수 어머니. 다음 주일에도 교회에 나올지 걱정이 된다. 장애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감사하는 수진이 엄마에게 "제발 좀 기도하세요. 수진이의 척추 장애를 고쳐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텐데" 하며 기도하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하며 주일마다 한마디 툭 던지는 장로가 보기 싫어 교회 가기 싫다는 수진이 엄마.

예배가 끝나고 친교실에 들어가려면 어김없이 나타나 휠체어를 밀어 주는 사랑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이 똑같은 질문들. "어쩌다 장애가 생기게 되었어요?", "그때 사고 상황은 어땠어요?", "보험 처리는 되었나요?", "그런 몸으로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할 수 있나요?" 이런 똑같은 질문에 질려 다시는 교회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는 남주 형제. 교회 문만 들어서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 줍시다" 하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기도의 용사들 때문에 교회 가기가 무서운 진희 자매. "우리가 기도해도 아직 낫지 않는 것을 보니 자매가 아직도 해결 받지 못한 죄가 있거나 헌신이 덜 되어 그런 거예요. 한번 주님께 화끈하게 바쳐 보세요"라고 당당하게 주문하는 믿음 좋은(?) 기도 특공대에게 주눅이 들어 아예 교회에 발을 끊은 윌리엄스 증후군 장애인 진희 자매.

아들의 루게릭병을 고쳐 달라는 정성으로 일천번제 제물을 드리며 신유 집회란 집회는 다 찾아다녔으나 바친 헌금 액수를 보고 "이 정도로 어떻게 하나님이 감동하시겠어요?"라고 빈정대는 신통한 족집게 강사의 말에 마음이 상해 소리를 지르며 교회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조영선 권사. 뒤에 대고 "저러니 낫겠어?" 하며 호통 치는 능력의 종과 "쯧쯧"을 연발하는 성도들.

실낱같은 소망을 안고 전셋돈 빼내 하나님을 감동케 하려고 큰 헌금을 들고 와 안수 차례를 기다리는 간질 장애를 가진 진준이 아빠 윤 집사님. "왜 자꾸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나요?" 하며 핀잔을 주는 큰 종의 말("내가 안수해도 당신이 낫지 않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야. 믿음을 확실히 해 가지고 나와야지. 그냥 제일 앞자리에 앉아 계속 안수만 받기만 하면 나의 신유 능력이 의심받는단 말야")에 눈물을 흘리며 눈물이 배인 담요를 주섬주섬 챙기며 자리를 떠난 주희성 씨도 지금 어디 있을까?

부정적 시각이나 특별한 조명으로 사실 왜곡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인간의 기준에 미달한 존재', '사회악', '동정의 대상', '병자', '사회의 얼룩', '천벌 받은 사람',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으로 취급받아 왔고 종교적으로는 '귀신들린 자', '믿음이 부족한 자', '죄로 벌받은 자'로 경원시되어 왔다.

장애인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문제지만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즉 장애인을 '하늘의 특별한 메신저'나 또는 '선지자'로 생각하는 것이나 '죄없는 거룩한 사람', 또는 '천사'로 여기는 것도 결국은 장애인의 실존을 왜곡하는 것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기대를 받는 장애인들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훨씬 큰 부담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회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란 타이틀을 받고 특별한 조명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특별한 취급마저 장애인을 비장애인들의 존재와 사업의 목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잘못된 문화적 이해나 잘못 해석되어 온 기존 신학으로 인한 강단의 잘못된 가르침들이 교인들을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으로 몰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바른 장애 신학의 정립이 절대적인 요청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장애 신학> 책 발간은 시의적절한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 받은 벌? 은혜와 교훈의 수단?

먼저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시각으로는 장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벌 또는 교훈적 가르침을 위한 경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벌로 장애를 받았다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거나 회개를 통해서 고침을 받아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특정한 교훈을 받기 위해 받은 장애라면 그 교훈을 받고 제거되어야 할 소모품이다. 이런 영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아무튼 장애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로 장애는 비장애인들에게 은혜와 교훈을 주는 수단이다. 장애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침으로 그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생각이다. 장애인들이 죄로 인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장애인들은 죄와 상관없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장애인들이 의로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존경심과 함께 닮아야 할 표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존의 시각들은 모두 올바른 장애 신학 정립을 방해하는 편협한 시각들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며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며 적선하고 헌금하게 하는 '불쌍한 장애인 돕자' 캠페인은 장애인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주범이다.

이런 캠페인은 장애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장애인들로부터 빼앗고 비장애인들을 시혜자로 등장시켜 장애인을 계속해서 수혜자로 머물게 만드는 편견을 공고히 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보는 것도 가당치 않다. 이런 생각은 장애인 개개인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매개체로 한 감동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비장애인에게 호감과 감동을 주지 못하는 대다수의 장애인들을 더욱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한다.

세 번째 관점으로 장애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메신저나 천사 또는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장애인을 일반인들도 갖지 못한 신비한 능력이나 특출한 능력을 타고 난 사람으로 보며 장애가 오히려 장애인에게 복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세 부류의 생각은 모두 교회가 장애인을 목회의 대상으로만 보는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즉 첫 번째 관점의 경우처럼 불쌍하니까 돌보아 주자는 것이고, 두 번째 관점의 경우처럼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니까 존중하자는 것이고, 세 번째 관점의 경우처럼 장애인은 특출한 능력을 가졌으니 그 탤런트를 사용하여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장애인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들과 달리 해석되어야 할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이런 목회적 고려는 결국 교회가 아직도 장애인을 의학적 모델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생각과 태도 때문에 사실 장애인들에게 있어서 교회가 가장 무서운 곳이 되었다. 교회에 가면 정죄받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면 값싼 동정을 받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면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면 무슨 신비하고도 뭉클한 간증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래서 장애인들에게 교회는 사회보다 발을 들여놓기가 무서운 곳이 된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자

장애인의 복음화율은 형편없이 낮다. 이런 현상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하나님이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의 구원의 확률을 낮게 정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장애인의 복음화율을 높이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라르시 공동체의 창시자인 장 바니에는 장애인 공동체 안에서 장애인을 씻기는 목욕 시간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가장 뜨겁게 느끼는 시간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즉 장애인들을 씻기고 목욕을 시키면서 서로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고 단지 누구는 돕고 누구는 도움을 받는다는 봉사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한 사랑의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는 감사와 흥분의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장바니에 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장애인을 섬기고 있는 봉사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한 몸 경험일 것이다. 이러한 한 몸 경험은 물리적 결합이 아닌 피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나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원리를 통해 공동체 회원 간에 더 이상 건강상 비교를 통한 우열을 나눌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융합으로 이제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이런 한 몸 의식이 건강한 교회의 표지가 된다.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본다.

김홍덕 / LA 조이장애선교센터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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