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버지 이야기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 정지용, '발열' 중

아버지는 고열에 시달리는 아들을 차마 볼 수 없다. 가쁜 숨결을 몰아쉬는 아들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차라리 그쪽을 선택했으리라.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작디작은 아들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무능력한 아버지는 아들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닥치는 대로 기도한다. '저 작은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차라리 저에게, 아이의 모든 아픔을 돌리십시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들 이삭의 질문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폐부를 찌른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얼버무린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제단을 쌓는다. 그 위에 장작을 벌려 놓는다. 아들을 묶는다. 제단 장작 위에 묶은 아들을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칼을 들고 아들 위에 올라선다. 아들과의 마지막 눈 맞춤이다. 그 찰나의 순간, 영원히 뇌리에 기억될 순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마땅하다. '이 작은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번제물이 되겠습니다.'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 어둠이 빛을 가린 것인지,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아버지, 곧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운 탓인지 알 수 없다. 오직 극악스런 고통에 매달린 아들과 아버지, 이 둘만 안다. 비참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죽어 가는 아들이 울부짖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현재 진행형으로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있는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적어도 아버지라면, 아픈 아들을 붙들고 닥치는 대로 기도하거나, 세상의 번제물이 된 아들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려 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인간적인 생각과 가정은 '아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인간인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에 일어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십자가의 불가해한 역설과 기이한 모순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준 아버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아들의 죽음을 용납한 아버지'. 십자가는 정녕 사랑의 상징인가, 아니면 매정한 아버지가 벌인 불행한 자작극에 불과한가. 그리스도교 중심에 세워진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비극인가, 희극인가."

'The Sacrifice of Isaac' Rembrandt. 퍼블릭 도메인
'The Sacrifice of Isaac' Rembrandt. 퍼블릭 도메인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새라 코클리의 <십자가 -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비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정에 참여한 이들에게 외면할 수 없는 십자가의 질문을 마주하게 한다. 이는 난해한 질문이므로 세계적인 신학자인 그녀가 탁월한 신학 작업을 통해 답을 내려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클리는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십자가의 초대장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이야기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는 "우리의 삶 전체를 건 여정"으로 진지하게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녀는 본 저서에서 십자가 사건을 우리 삶에 맞갖은 이야기로, 우리의 존재가 스며드는 드라마로 그려 나간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수난이라는 드라마로 초대합니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며 모든 드라마에 종지부를 찍는, 모든 드라마를 종결하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한 남자가 버림 받은 이야기도 아닙니다. 올바른 행위를 했을 때 어떤 보상을 받는지를 전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수난은 너무나 섬세하고 변혁적인 하느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아는 모든 정의를 넘어서고 전복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43쪽)

십자가는 "변혁적인 하느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아는 모든 정의를 넘어서고 전복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의 모든 상식과 정의, 공정, 사랑에 관한 전제를 무너뜨린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 선다. 동시에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저항한다. 이 저항은 격렬하다. 십자가는 기존에 알고 있던, 당연하게 여기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하나님 앎, 이 모든 것을 뒤집는, 우리의 삶 전체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맹렬한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 그저 머리로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을 수정하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와 몸,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문제다.

새라 코클리는 십자가를 통해 변혁되어야 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 존재, 삶 전체를 '욕망'이라는 핵심어에 집약한다. 본 저서의 원제가 암시하듯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존재 근원에 자리한 욕망이 변모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뒤틀린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불순종에는 마땅한 심판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과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랑은 합당한 처벌과 적절한 뉘우침이 선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적절한 교환 논리'에 젖어 든 우리의 상식이다. 적당한 선을 그어 두고 '그 선'을 넘지 않으면 나 또한 상대의 선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관계를 이어 가는 방식. '상대가 나에게 베푼 만큼 나 또한 상대에게 베풀리라'고 가정하고는 선의를 베푼 상대에겐 보상을, 악의를 비친 상대에겐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방식은 그녀가 보기에 십자가 아래서 심판받고 변모되어야 할 우리의 뒤틀린 욕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보낸 초대장은 우리의 뒤틀린 욕망에 보낸 도전장이기도 하다. '합당한 처벌'과 '적절한 보상'이라는 상식을 전제로 이뤄지는 사랑과 정의를 깨트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느냐는 도전장. 조건 없이 부어지는 무한한 사랑의 수혜자이자 변혁적이고 전복적인 하나님 사랑을 베푸는 이로 살아가라는 초대장. 이것이 그녀가 그려 내는 "모든 드라마에 종지부를 찍는, 모든 드라마를 종결하는 드라마", 곧 '사랑과 배신이 빚어내는 드라마', 십자가다.

<십자가 -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 새라 코클리 지음 / 정다운 옮김 / 김진혁 해설 / 비아 펴냄 / 164쪽 / 1만 20000원  
<십자가 -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 새라 코클리 지음 / 정다운 옮김 / 김진혁 해설 / 비아 펴냄 / 164쪽 / 1만 2000원  
드라마의 배역과 갈등에 동참하기

이 드라마에는 동참하는 배역과 저항하는 배역이 있다. 코클리는 성경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 '예수', '예수 곁에 있던 여인들'이 십자가 수난 드라마의 초대와 도전에 어떻게 동참했는지, 또한 '군중', '배반자 유다',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하던 이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끝내 거부했는지를 드러낸다. 이들이 드라마 속에서 그려 내는 갈등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변혁적인 사랑과 그 사랑을 자신의 몸으로 본을 보이는 예수가 있다.

이를테면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자기에게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인다. 부정한 존재에 불과했던 자신을 정결한 존재로 변혁시킨 그 사랑의 선물에 그녀는 진실로 감사하며 예수의 발 앞에 눈물과 입맞춤 그리고 향유를 선물한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자신이 지지하는 하나님상과 메시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예수를 대적자들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유다가 저항하고 거부하는 역할이라 하여 그의 운명이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유다의 운명이 비극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잘못에 비관한 것, 곧 '잘못에는 합당한 처벌'이라는 그가 상정하는 정의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며, 친히 예수께서 그의 곁에서 본을 보이신 하나님의 전복적인 사랑에 유다 자신이 '넘겨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클리는 수난 드라마의 배역들이 그려 내는 갈등 안에 우리 또한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아니, 십자가가 우리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갈등 안에서 '선물', '배신', '사랑', '두려움', '모욕', '용서' 그리고 '죽음'을 숙고한다. 아니, 경험한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무조건적인 하나님 사랑에 감동하여 나의 존재 전체를 선물로 드리고픈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끝끝내 무한한 하나님 사랑 속으로 넘겨지기를 거부하는 유다에게서 완고한 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 그녀는 재차 묻는다. 십자가의 초대에 진정 동참했느냐고,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픈 욕망과 거기서 비롯된 하나님상을 포기하고 우리의 뒤틀린 욕망이 변혁되는 여정을 걷고 있느냐고.

사순절기, 매년 반복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은 어쩌면 십자가 드라마를 멀찍이서 관망하기보다는 이 드라마의 배역이 되겠다는 결심이자 적극적으로 이 드라마의 연기자가 되어 보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에 기록된 수난사화와 십자가에 대한 여러 묵상글과 통찰들이 좋은 대본으로 이미 주어졌지만 드라마의 배역이 되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좋은 대본이 있다고 꼭 훌륭한 연기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대본에 따라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신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에 나 자신을 열고, 그 사랑에 따라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은 사실 우리 안에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보다 앞서 십자가의 드라마에 배역으로 참여했던 이들, 신앙의 선배들은 겸손하게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였고 직면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코클리도 이 사실을 주지한다. 이번 개정 증보판에 새롭게 추가된, 기도에 관한 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가 왜 필요한지, 기도를 통해 무엇이 이루어지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는 도전이다. 쉴 새 없이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절망과 외면하고 싶은 상처 그리고 세계에 즐비한 고난을 직면하게 한다.
십자가는 도전이다. 쉴 새 없이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절망과 외면하고 싶은 상처 그리고 세계에 즐비한 고난을 직면하게 한다.

그리스도교 중심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본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언덕, 해골이라 이름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다. 십자가는 도전이다. 쉴 새 없이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절망과 외면하고 싶은 상처 그리고 세계에 즐비한 고난을 직면하게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를 선택의 순간으로 내몬다. 깜깜한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채, 지난날의 실패와 상처에 자기 정당화를 덧칠하며 죽음에 머무를 것인지. 자기 십자가, 곧 부끄러운 과거와 존재의 나약함을 직면하고 마침내 인정하여 자기 정당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죽음 저편으로 '넘어오라'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초대에 응할지를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를 뒤흔드는 십자가의 초대 앞에서 겟세마네의 예수처럼 기도하게 될지 모른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을 짊어지고 끝끝내 십자가의 수난을 감내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의 존재는 무너진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 전에, 십자가의 초대장을 받아 들고 골고다 언덕 아래서 방황하기 전에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기도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겟세마네의 예수처럼 기도한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이 기도는 우리의 완고한 자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산산히 부서졌음을 알리는 항복인 동시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아들을 향한 사랑을 저버린 매정한 아버지가 벌인 불행한 자작극이 아니다. 우리 영혼의 어둔 밤, 십자가의 어둔 밤을 직면하고, 마침내 그 앞에 머무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세계의 고난을 대하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적인 의미는 부서져 버린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 곧 자기 실패와 상처를 정당화하고 싶은 욕망과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상은 모두 산산히 부서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산산히 부서진 우리의 욕망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마지막 말과 함께 변모한다. 우리의 욕망은 주도권을 온전히 하나님께 '넘기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모든 것이 변화한다.

윤관 / 삶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전주강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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