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빛의 종교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빛을 증언하고, 그 빛을 반사하는 이들이다. 요한복음도 '그 빛'에 관해 증언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 1:3-4)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준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리스도교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빛'을 말한다. 그러나 '어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빛이신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성육신했다. 그리스도는 새 생명의 빛을 두르기 위해 십자가라는 어둠에 침잠했다.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인들, 나아가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에 빛을 증언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같이 어둠에 머물렀다. 어둠을 묵상했고, 어둠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어둠을 찾아다니시며 '어둠 속에 빛을 밝히는 분'이다. 그는 상한 마음을 찾으시는 분이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자유의 빛을, 어둠에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다. 빛을 증언하기 위해 어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어둠을 찾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는 명백히 어둠에 관한 이야기다. 기이한 일이다. 빛을 증언하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어둠이 있다니. <상처 입은 앎>(비아)은 바로 이를 포착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를 '어둠'이라는 관점으로 살핀 책이다.

<상처 입은 앎 -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380쪽 / 2만 원
심오한 모순과 어두움

로완 윌리엄스는 책을 시작하며 신앙의 역사를 관통하는 불가해하고 기이하며 심오한 모순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심오한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5쪽)

신약성서 저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타나 활동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곤혹스러운 주장'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기이하고 불가해한 역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유죄판결을 받고 죽으셨다는 이야기와 이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다는 역설을 붙들고 몸부림쳤다. 이 모순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법과 그리스 철학의 지혜에 깜깜한 어둠을 드리운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 어둠을 외면하지 않았다. 모든 빛을 삼키는 십자가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대표적인 저자가 바울이다. 로마서에서 그는 어둠을 향해 질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했는가?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거부하셨는가?'(23쪽) 그는 어둠 속에 머무르며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을 마주했다. "하나님은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버리시고 파괴하시는 분이다."(23쪽) 사람들은 예수를 저버렸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저버리셨다. 그리고 버림받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온전함에 이르도록 친히 자신들을 택하셨음을 깨닫는 특권과 멍에를 받은 백성들이다."(23쪽) 예수는 이 모순을 자신의 온 존재로 살아 낸 하나님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인간의 실패와 무력함 가운데 계시는 분, 그러한 가운데서도 활동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존재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할지 말지 결단하도록 밀어붙이신다." (23-24쪽)

로완 윌리엄스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심오한 모순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특별한 사적 경험을 해석하는 학문을 넘어서는 활동이다. 영성은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 즉 공적인 영역과 사회적 영역,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 인간관계, 윤리적인 세계와 그 병든 차원 역시 다루어야 한다."(17쪽) 영성은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을 다룬다. 이는 로완 윌리엄스가 말한 바, '그리스도교 신앙이 심오한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진실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추상적인 관념의 빛을 좇지 않는다. 관념의 빛은 어둠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섣부르게 빛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세계와 지혜에 고통스럽게 균열을 내며 상처를 입히는 '어둠 속에 비추이는 빛'을 따라간다. 이 빛은 우리의 어둠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자신의 경험을 하나님께서 창조 활동을 펼치시는 무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자신의 존재를 부활의 빛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리스도교의 빛은 우리를 온전한 빛으로 변화시킨다.

"메시아의 시대는 현재의 고통과 실패 가운데 실현된다"는 신약성서 저자들의 생각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생각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세상의 삶'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매우 특별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체험'을 신약성서 저자들은 사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모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는 십자가라는 어둠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고, 종국에 부활의 빛이 비추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에 드리운 어둠은 끝끝내 절망적이지 않다. 끝끝내 이 어둠은 부활의 빛 아래 새로이 변모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부르짖으며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둠 속에 내주시는 방법으로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고난을 택하셨다"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라고.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세계와 지혜에 고통스럽게 균열을 내며 상처를 입히는 '어둠 속에 비추이는 빛'을 따라갑니다. Unsplash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세계와 지혜에 고통스럽게 균열을 내며 상처를 입히는 '어둠 속에 비추이는 빛'을 따라갑니다. Unsplash
어둠을 외면한 자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가 만난 가장 강력한 적은 어둠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2세기 중엽 영지주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세상의 어둠을 찾아다녔다는 역사를 거부했다. 그리스도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어두운 세상에 오셨다는 신학을 거부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십자가라는 어둠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는 진리를 거부했다. 로완 윌리엄스는 말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성서의 저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붙들고 씨름하던 불가해한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보다는 쉬워 보이는 말끔한 길을 택했다고. 그들은 어둠과 빛을 날카롭게 갈라내고 명약관화한 빛을 좇았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빛은 어둠에 있을 수 없다. 무한한 하나님은 유한한 역사를 무대로 활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육신에 임할 수 없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을 옥죄는 것은(바울이 이야기했듯) 도덕적 무능과 교착상태가 아니라 무지ignorance, 단순히 자아의 상태, 혹은 행동의 동기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초월적 역사'에 대한 무지와 그 방법, 즉 인간 역사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초월적 역사에 합류하는 방법에 대한 무지였다." (62쪽)

이와 달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침잠한 어둠과 불가해한 모순을 끝까지 붙들었다. 하나님보다 아래의 신이라고, 인간의 육신을 입은 척했던 신이라고 더 명확하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길을 몰랐던 게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 하나님인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와 살아 내고, 죽었다는 기이한 모순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였기 때문에 어려운 길을 고집했다.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의 '가장 강력한 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영지주의자들의 은밀한 유혹과 영향력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단순한 지적인 회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오늘도 반복된다. 신앙의 신비를 이성의 눈으로 재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거부한다. 신앙의 여정이 그리스도인의 육체와 삶을 통해 드러나고 이어져야 함에도 이성과 관념의 놀이터로 전락한다. 영지주의는 근대인으로 육화한다. 신앙과 이성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던 근대인의 오만함은 이성에 드리우는 십자가의 어둠을 외면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빛 역시 방식은 다르나 어둠과 모순을 제거한 빛, 육체를 거부하는 빛이다. 로완 윌리엄스가 '다시 보기'를 권고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란 결국 심오한 모순과 신비를 말끔하게 제거한 이들과 싸우며 끝끝내 십자가를 붙들었던 이들의 발걸음이다.

로완 윌리엄스(Rowan D. Williams, 1950~).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유튜브 채널 갈무리
로완 윌리엄스(Rowan D. Williams, 1950~).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유튜브 채널 갈무리
어둠 속에 거한 자들: 리옹의 이레네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구원을 영적 기술로 축소하는 것"(63쪽)에 반대했다. "의에 합당한 것들은 육체에서 완성된다"(64쪽)는 선언은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명토 박는다. 예수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실현하고 그분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하나님에 관한 앎"(115쪽)까지 확장한다. 인간은 결코 이성으로 하나님 이해의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앎에서 끝없이 초월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요한복음도 이를 증언한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 1:18) 인간의 이해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가닿으려 하지만 그곳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어느새 저 멀리, 저편에 계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 전체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마음이 울부짖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불타올랐다. 그는 <고백록>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유년기부터 있었던 자기 존재의 어둠을 고백한다. 육체와 물질에 대한 과도한 애착, 성공과 출세를 향한 욕망, 쾌락을 탐닉하는 것, 친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두려움까지. 자신의 실패를 정직하게 직면하는 "무한하리만큼 고통스러운 과정"(146쪽) 속에서, 그는 놀랍게도 그 모든 순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삶에서 버려야 할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47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둠에 침잠한 것은 영원한 빛,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회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복잡다단하고 기이한 세계,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 모든 위험과 고난, 그와 비슷한 일들 때문에 당신께서는 제 마음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제 상처로 인해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당신께서 계속 제 상처를 치유하고 계심을 제가 느낀다는 것입니다." (150쪽)

그는 십자가에 참여한다. 심연,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절규했듯이. 로완 윌리엄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심연은 삶의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삶 전체다"(165쪽).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밝은 면모도 있지만, 끝없는 고통과 절망을 안겨 주는 어두운 면모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골고다 언덕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고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십자가에 참여함으로 온전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거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사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는' 순간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고난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고난에 소리를 내신 사건이라고,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이라는 기이한 징표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로 이루어진 몸, 즉 교회의 고통에 소리를 내신 사건이라고 말한다." (170쪽)

아우구스티누스의 울부짖음은 루터에게까지 울려 퍼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류가 만나는 장소라고.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곧 파괴적인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형을 받아들이는 것"(171쪽)이라는 외침이 루터의 입에서 메아리친다.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은 오직 굴욕과 고문을 당한 예수의 모습으로만 자신을 '가시적으로', 공공연히, 역사 속에 드러내신다."(292쪽) 인류는 어느새 자기 안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곧 "죄, 지옥, 고통과 죄책감, 외로움, 절망 등 하나님을 반대하거나 그분과 대립하는 곳"(293쪽)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신학은 바로 이곳에서, "가장 극단적인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작된다"(293쪽). 그래서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어둠 가운데, 실패와 상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루터는 어둠이 어느 순간 걷히고 밝은 날이 찾아온다는 깔끔한 도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조명이란 어둠 속에서 살기 위해, 그 안에 머물기 위해 매일 분투할 때 어둠을 그 자체로 생명과 은총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다"(299쪽).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바로 여기에 있는 어둠을 온전히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가 얼마나 심오한지를,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곳, 모든 경험이 그 안에서부터 변화되는 은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 감추어져 있지만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해방이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곳은 가장 비참한 소외의 장소임을 루터는 모두에게 일깨워 주었다." (312쪽)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류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Unsplash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류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Unsplash
실패와 상처 가운데 하나님 만나기

그리스도교는 빛의 종교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둠 속에 머무르고, 그 어둠을 묵상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실패와 상처를 외면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어둠은 예수께서 강림하신 현장이고, 그리스도인에게 상처는 하나님이 회복하셔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새 몸을 입게 할 지체다. 로완 윌리엄스의 안내로 다시 본 신앙의 역사에서 어둠을 외면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신의 이성과 영성에 균열을 내는 하나님 앎을 갈구했다. 그리스도교는 어둠을 긍정함으로써 빛의 종교가 되었고, 마침내 그 빛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빛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가 어둠에 머무르고, 말한다는 것에 불편함이 있다면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빛과 어둠을 다시 눈여겨봐야 한다. 찬란한 빛의 존재를 영광스럽게 찬양하는 이 복음서 역시 어둠을 말하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 1:5)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어둠에 관한 로완 윌리엄스의 가르침이 나의 마음과 몸 그리고 신앙의 여정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그가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고백을 빌어 증언하는 '어둠 속에 비추는 빛'이 당신과 나의 마음에 비춰지기를. 그래서 우리네 일상과 세계에 드리운 고통과 절망, 실패와 상처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신뢰는 어둠 속에서의 신뢰다. 빛을 삼킨 듯한 어둠 속에 가만히 머무를 때, 그리스도인의 동공은 최대한으로 확장한다. 실오라기 같은 한 줄기 빛을 포착하고, 온전히 응시할 때를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머무른 어둠, 끝내 회피하지 않은 십자가의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의 모든 어둠과 빛을 심판하시리라는 믿음을 따라 오늘도 멈추지 않고 어둠 속으로 기꺼이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스도교의 찬란한 빛은 어둠 속에 비추인다. 가장 잔혹한 어둠, '십자가가 모든 것을 검증한다. 다른 시금석은 없다.'" (351쪽)

윤관 / 삶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전주강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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